내가 멕시코에 온 이유
그 위험한 멕시코를 간다고?! 뽀르께?!
* 스페인어 ‘Por que(뽀르께)’의 뜻은 영어로는 ‘why’ 한국어로는 ‘왜’에 해당하는, 이유를 물을 때 쓰는 단어이다.
내가 멕시코에 온 이유
멕시코의 ‘멕’자도 모르던 내가 이 나라로 오게 된 이유는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와 비슷하게도 복합적이었다. 제일 큰 이유는 국가에서 어학연수와 해외취업을 지원해주는 K-Move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고 나 자신도 해외취업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관심사(음악,미술,언어 등)
엄마는 나를 입시학원에 잘 보내지 않으시고, 어릴 때는 예체능 위주의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바둑 등을 배우게 하셨다. 영어는 방문 선생님계의 조상뻘인 ‘윤선생’을 시작으로 흥미를 붙였다. 엄마의 교육관은 질리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다양한 음악 장르와 미술 분야에 관심이 많고 성인이 되어서도 어렸을 때 배웠던 바이올린, 미술 등을 취미로 찾게 되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핑계로 꾸준히 하지는 못 했지만 심심할 때는 종종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여행을 할 때는 그 도시의 미술관을 방문해본다. 음악 또한 일상생활에서 빠지지 않는다. 스피커로 음악을 켜놓고 혼자 따라 부르거나 리듬을 타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위에서 말한 분야들은 내가 흥미를 가지고 꾸준히 찾았기 때문에 쉽게 질리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언어를 배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편인데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있어 단순히 글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 배경도 함께 배우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 배운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할 때 그 성취감이 짜릿하다!
해외여행 & 해외봉사 활동
중학생이 되어 공부방을 다니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 2년간 생활을 하셨고 해외 경험을 통해 학생들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방학 때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지역을 여행 다녔다.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내 몸을 비행기에 싣는다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첫 여행지인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너무 떨려서 기내식으로 나온 샌드위치를 한 입도 먹지 못했다.
한국의 여느 고등학생들이 그렇듯 나 역시 입시에 매진하는 시기가 되었고, 고등학교 3년을 대학생의 자유를 꿈꾸며 열심히 보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나는 봉사활동을 핑계로 미지의 나라 ‘터키’로 떠났다. 터키는 유럽과 이슬람 두 문화가 섞여 신비로움을 자아냈고 나에게 대단히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지중해의 온화함 속에 매일 다섯 번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울리는 예배 소리는 종교적인 경건함을 상징한다. 사실 어떤 이유에서 터키를 선택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혼자 떠나는 해외여행을 아주 기억에 남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2주간의 봉사활동을 통해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났고 한국을 소개하는 입장이 되는 건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이후 한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도 느꼈고 영어라는 공통어로 외국인들과 소통이 된다는 것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교환학생 경험
대학에서 영어 학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선배들을 몇몇 보았다. 1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해외생활을 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봉사활동은 짧은 여행과도 같았다면, 다른 나라에 거주하면서 한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외국인들이 다수인 환경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지 내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콜로라도주 ‘Greeley’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UNC(University of Northern Colorado)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지면서 KCC(Korean Cultural Club)라는 ‘한국 문화 동아리’를 만들어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활동을 했다. 당시 만난 태국인 룸메이트 ‘키티야다’, 친자매 같은 대만 친구 ‘짜이유’, 그리고 내가 ‘미국인 부모님’이라고 부르는 ‘Ed’ 할아버지와 ‘Jan’ 할머니 등 소중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독립심 & 직접 경험
앞서 말한 일련의 경험들로 인해 나에게 해외 생활은 막연한 꿈이라기보다는 실현 가능한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물론 교환학생을 통해 해외 생활이 많이 외롭고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음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멕시코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다. 외롭고 생각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기도 할 것이라는 각오도 함께 가지고 왔다. 함께 연수 온 언니, 오빠들과 못 하는 스페인어로 지낼 집을 찾고 가격을 흥정하고, 아플 때는 병원에 가서 어디가 아픈지 설명도 하고, 버스로 여행을 다니고, 현지인들이 가는 재래시장에서 요리할 재료도 직접 장보는 등 그들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배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스페인어로 이야기할 동료들이 생겼고 부족한 언어를 빨리 따라잡고 싶어 퇴근 후에는 스페인어 과외를 받으며 따로 공부하기도 했다. 옆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르쳐준 멕시칸 동료들 덕분에 듣기 실력과 회화실력이 생각보다 빨리 늘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부모님의 전적인 지지
마지막으로 부모님께서 낯선 땅에 가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뭐든 해보라고 응원해 주셨다. 멕시코를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가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겠지만 직접 부딪혀서 깨닫고 성장해보라’고 하셨다. 실제로 취업을 하고 처음 몇 달간 너무 힘들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스페인어도, 경력도 하나도 시작한 게 없는데 이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뭘 하겠냐며 조금은 엄하게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많이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아빠가 그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면 이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단한 사람, 괜찮은 사람
여전히 나는 마음이 여리고,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 받지만 예전보다는 빨리 극복할 수 있는 회복 탄성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단해진 지금의 내 모습이 좋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멕시코는 조금 위험한 나라 일지는 몰라도 멕시코와 함께하는 5년 동안 나는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내적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