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한 계단』을 함께 읽고
독서모임의 책 선정은 대부분 내가 한다.
예전에 민음사에서 주최한 독서모임 운영자 강의에서 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운영자가 소화할 수 있는 책으로 선정하라.”
그땐 그냥 듣고 지나쳤지만, 3~4년간 모임을 꾸려오면서 그 말이 왜 중요한지 절절히 알게 되었다.
독서모임의 운영자라는 자리는 단순히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가는 ‘조율자’이기도 하다.
책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진행하면, 대화는 가벼워지고 흐름은 쉽게 끊긴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모임은 힘을 잃게 된다.
하지만 모임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상과 의견이 더해져야 비로소 살아 숨 쉬는 대화가 된다.
그래서 가끔은 회원들이
“이 책, 꼭 다뤄봤으면 해요.”라며 조심스레 내미는 책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열한 계단』도 그렇게 우리 모임에 들어온 책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깊고, 국문학을 전공한 언니가 추천해 준 책.
사실 나는 이런 인문학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어서 조금 망설였다.
이 책을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 모임을 잘 이끌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책은 언니가 진행해 주면 좋겠어요.”
언니는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10월 모임을 맞이했다.
『열한 계단』은 종교,철학,문학 그리고 다양한 학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가볍게 읽히지는 않지만,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책.
어려운 단어 앞에서 주춤했던 이들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죄와 벌, 신약성서, 붓다, 차라투스트라, 체 게바라, 공산당 선언, 티벳 사자의 서, 우파니샤드...'
책 속에는 익숙하지만 감히 손대지 못했던 무게감 있는 텍스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삶과 고민, 시대의 질문을 섞어 그 책들을 풀어낸다.
책을 읽고 난 후, 회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에요.”
“나 스스로 인간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이 책을 ‘좋다’고 말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 책에서 언급된 책들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신의 삶을 조용히 되돌아본 것이다.
반면 유일하게 이 책을 ‘불호’라고 말한 한 분은, 책에 나오는 모든 참고 서적을 직접 읽어본 분이었다.
그분은 작가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고, 모임에서 작가가 놓친 지점이나 잘못 이해한 부분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한쪽은 ‘몰라서 열린 마음’으로,
다른 한쪽은 ‘알아서 생긴 거리감’으로 책을 대했다.
나는 이 두 관점을 모두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그날,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 앉아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는 독서모임이 지닌 진짜 힘을 다시 느꼈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건 생각을 나누는 일인 동시에, 상대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안에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싹트고, 조금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시민으로 자라나는 것 같다.
함독이라는 작은 독서모임은 매달 한 번씩 문을 연다.
책 한 권으로 한 달을 사는 사람들,
낯선 문장을 만나며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모여, 또 한 권의 책을 펼쳐든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책을 읽고, 나누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