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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Mar 29. 2017

황석영, 낯익은 세상

아이에게 책 권하는 이야기



다인.

왜 살다 보면 이런 마음이 불쑥 솟구칠 때가 있잖아. 세상이 참 불공평하구나 하는.

너처럼 젊을 땐 더 할 것 같아. 욕망은 많은데 그걸 이루려니 장벽이 많게 느껴지는 때.

하고 싶은 일은 잘 안 되는데 그 원인이 나에게 있을 거라는 생각 또한 잘 안 드는 나이잖아.

나는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이 세상은 내 능력을 몰라주잖아.

내 편을 들어주지 않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떠밀려 다니는 느낌.


지금 내 나이쯤 되면 공평과 불공평을 생각하는 자체마저 흥미가 떨어지지만(늙는 건 그런 건지도 몰라)

나도 한때는 이런 억하심정이 솟구치곤 했어. 태어나 보니 가난한 농사꾼 집안이었던 데다 여덟 살엔 아버지마저 죽어버렸으니. 속절 없이..

아이 다섯 딸린 서른대여섯의 어머니에게 남겨진 농토라야 산인지 비탈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돌 밭이었어..

그 밭고랑에 게딱지처럼 엎드려 종일 일하는 어머니는 늘 얼굴이 그을려 있었고.

그런 엄마에게 내 꿈이며 이상을 말해 뭐 할까, 말하면 엄마가 이해는 해 줄까 싶은 마음이 그땐 있었어.

어린 마음에 엄마는 자기 살기도 바쁜, 아니 자기 사는 것조차 가늠해내지 못하고 삶을 견뎌내기도 힘겨워하는 것 같아 보였거든..

왜 그럴 때 있잖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아, 난 이담에 커서 뭐 해 먹고 사나 이런 생각 말야.

딱히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열정을 불태워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데다 돈도 힘도 없는. 생존은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뭔가 불안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뭘 당장 시작하자니 의욕은 안 나고.

가만있자니 시간은 좀 먹어 들어가는 것 같아 불안하고(이거야말로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을 추종하는 어른들이 만든 거지만)


지금 너도 그런 상황일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소설에도 그런 엄마를 둔 아이가 나와. 딱부리라는 별명을 지닌 소년.

그래도 딱부리라는 이름에서 난 어떤 위안을 얻었어. 강하진 않지만. 여명의 햇살처럼 희끄무레한 위안.

뭔가 야무져 보이잖아.. 주어진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나름 줏대도 있어 보이고.

누가 시비를 걸면 주춤 물러서며 쉽게 굴복하는 게 아니라 주먹을 날리든,

그게 안 되면 머리로 들이받든 그럴 상대도 못되면 짱돌이라도 집어던질 것 같잖아. 그러면서도 비열할 것 같지는 않은.

한 번도 이런 유의 사람이 되지 못했던 나로선 그래서 처음부터 이 소설이 좀 거슬리긴 했어.

뭔가 주인공은 나보다 근본적으로 나은 인간 같아 보이잖아.

보나 마나 주인공의 활약담이 나오겠구나 생각했지. 홍길동이나 장길산 같은 류의 소설 말야. 인간시장(김홍신)도 그렇고. 007영화도 그렇고.

이런 소설들은 숨겨 놓은 나의 열등감이 자꾸 건드리거든. 난 정의롭지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고 영웅도 못 되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나보다 잘났잖아. 읽으면서 자꾸 나와 비교하게 되더라고. 특히 네 나이 땐 더 그랬어. 나도 모르게.

그래서 난 뭔가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의협심으로 정의를 이루어내는 서사구조는 좋아하지 않아.

그건 너무 조작한 느낌이 나잖아. 현실엔 그런 일이 없으니까. 현실은 뭐랄까... 하루키 소설이나 홍상수 영화 같거든.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

그런데 좀 읽다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주인공이 글쎄 '꽃섬'이라는 쓰레기 매립장에 살게 되거든.


꽃섬은 실제 있던 곳이야. 난지도라는. 지금은 월드컵 상암 경기장이 위용을 자랑하는 서울의 강변. 거기가 한때는 서울의 모든 쓰레기가 모였거든.

내가 네 나이 때 친구를 따라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거길 가 본 적이 있어.

고1이었을 거야.. 백일장을 경복궁에서 했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전통이었어. 봄이면 소풍 삼아 하던 백일장.

입구에서 담임에게 원고지를 받고 경복궁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아 뭔가를 끄적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었어.

그리고 조금 더 쓰다가 원고지를 제출하면 그냥 집에 가는 거야.


시골 살다가 서울 변두리 가난한 동네로 전학 간 그다음 해에 처음 가 본 경복궁은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멋있지도 않았어.

궁은 임금이 사는 집이잖아. 임금이 사니 얼마나 잘 지었을까 궁금했지. 근데 막상 가 보니 그냥 큰 절 같은 느낌이랄까.

절 만도 못 해. 절엔 그림도 벽에 그림도 붙어 있고 아기자기한 돌탑과 스님이 계시잖아.

내 고향에도 절이 있었거든.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던. 횡성군 청일면에 있는 봉복사.

그 절과 경복궁이 뭐 그냥 대충 비슷해 보인 거야. 그래도 봉복사에는 돌계단도 있고 마당에 진달래며 철쭉도 있지.

마당 입구에는 산에서 졸졸 내려오는 물을 받아먹는 돌확도 있었어. 근데 경복궁엔 그런 것도 없는 채 미련하게 큰 건물이라니.

나무들은 다 크기만 해서 아예 올려다볼 엄두도 안 났어. 왜 있잖아. 애초에 나와는 관련이 없는 곳인가 보다 싶은 분위기.

그렇게 생각한 결정적 이유는 경복궁에 사람이 안 산다는 거였어. 사람이 안 사는 건물을 집이라 할 수 있니. 그러니 봉복사만도 못하지.


나랑 같이 하던 친구들은 처음부터 백일장엔 관심이 없었어. 대충 빨리 끝내고 가려고 했지.

아이들은 아예 점심도 싸오지 않았어. 적당히 오전을 뭉그적거리다가 대충 원고지 내고 시내로 달아나 떡볶이며 분식을 사 먹으려고.

근데 하필이면 우리 담임이 국어선생이었어. 그분은 자기 반 아이 중에 반드시 장원이 나와야 한다고 믿으셨던 것 같아.

다른 반 애들이 점심을 먹기도 전에 대부분 달아났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오후까지 남아서 쓴 원고를 다 내야만 보내준다는 거야.

아이들이 투덜거렸지만 소용없자 몇 아이들이 그냥 도망갈 궁리를 했어. 그러다 들켰지.


담임은 안 되겠는지 아이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어. 일찍 보내 줄 테니 원고를 손봐서 내일 아침까지 내라고.

너도 알지? 원래 아이들은 뒤를 생각할 줄 모르는 거.. 모두 그러겠다고 환호를 하며 달아났지. 거길 나와서 내 친구를 따라 놀러 간 곳이 난지도였어.

서울에 온 지 겨우 두 해째였던 나는 난지도가 섬인 줄 알았어. 친구들에게 쓰레기 매립장이라는 말을 듣고도 난 영문을 몰랐어.

섬도 아닌 쓰레기 매립장을 놀러 간다는 게 너무 이상했거든. 놀러 간 것도 아니었어.

그저 내 친구 중 한 녀석이 난지도에 아는 사람이 있었고 그게 거기 간 동기였으니까.

아니, 그곳에 내가 봤다기보다는 멀리서 슬쩍 보고만 왔다고 해야 맞아. 굳이 가까지 갈 필요까지 없었거든.

겉모습보다 냄새가 먼저 위협을 해 왔으니까.

분화구에서 먼지를 끝없이 뿜어대는 화산이 허리가 뚝 잘린 형상이 먼 곳에서 보였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쓰레기를 붓고 그 위를 다지는 중장비가 오가고. 그 틈을 비집고 사람들이 쓸만한 재활용 물건을 골라내고.

먼지인지 아지랑이인지 자욱하게 뭔가를 지상으로 뿜어내던 기괴한 모습의 섬(그래, 섬이라고 표현해야 맞아)에 트럭들이 줄줄이 오르내리는 그 길을 시내버스가 따라갔어.

그곳에 가까워지자 냄새는 더 심했고 고물상들이 많아지던 골목 어딘가에서 내 친구가 지인을 만나는 동안

난 그곳 여기저기를 구경했어.

집이라기엔 너무 허술해 보이는 집들(차라리 당시 내가 살던 지하 단칸방이 더 안온해 보였을 만큼),

던져진 듯 널려 있는 빨래들(그래서 뭔가 쓰레기스러운 느낌이 드는)이 묘하게 어울려 보이는 동네를.

방금 내가 다녀온 경복궁 주변과는 너무 다른 표정이었어.

그곳은 왕이 살던 집이라 그런지 주변엔 대기업, 신문사 건물이 즐비했거든.

그곳에서 버스로 불과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동네 풍경이 이 정도인 거야.

빈부격차의 극치. 귀함과 추함의 극치였어.

무서웠어. 불길했어. 이렇게 사람 살이가 차이가 난다는 게.

내가 태어나 자라던 시골마을은 모두 다 가난했지만 차이가 별로 안 났거든.

차라리 모두 다 가난한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내가 본 두 가지의 대비를 내 느낌과 버무려 글을 썼어. 일기처럼.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께 냈어.

며칠 뒤 선생님이 부르셨고, 몇 가지 문장을 고치고 몇 장의 원고지를 다시 쓴 끝에 내 글이 뽑혔어. 그리고 학교 문집에 실렸어.

활자화된 내 글을 내가 읽게 된 게 학년 말쯤이어서였을까, 난 내 글이 내가 썼다고 믿기 어려웠어.

선생님이 손을 보셔서 그런지도 몰라. 내 글은 묘하게 말끔하게 변해 있더라.

왜 있잖아. 막 휘갈겨 그린 그림을 누군가가 매끈하게 고쳐서 멋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준 느낌.

내가 쓴 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묘하게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가득한 글.

난 그때부터 툭하면 일기를 썼던 것 같아. 이왕이면 문집에 실린 내 글처럼 매끈하게 써 보려고 애도 쓴 것 같아.

일기든 편지든 어떤 글을 쓰다 보면 자꾸 내가 그 안에서 정의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가난에 대해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겠다는 결론을 쓰게 되더라.

그건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과정이야. 내가 일기를 쓰고 나면 공부를 더 하고 싶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처럼. 그의 글에 나오는 사람들은 뭔가 공통적으로 어떤 희망을 향해 나가거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종교적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주인공이 나오고(둘째 아들이던가?)

<죄와 벌>에는 사랑의 힘을 해결책으로 내세우지. 톨스토이도(특히 안나 카레니나는 정말 명작인데) 그렇고 헤르만 헤세도 그렇고.

그 무렵 내가 그런 책을 좋아해 그랬나 봐. 나도 내가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았나 봐.

그게 좋아서 그랬을까. 아니야.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궁핍한 현실을 견디고 싶었을 거야.


이 책의 작가 황석영도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자기가 희망으로 여기는 걸 꾸준히 따라가거든.

언젠가 재판도 받았을걸. 어느 소설가가 그런 모험을 하겠어? 난 그래서 이 분이 대단해. 한 가지 방향으로 살아간다는 게.

난 방향이라곤 모르고 살거든. 그때그때 어떤 지조도 없이 쉽게 현혹당하고 어이없게 굽히지.

그러면서 늘 안온한 것만 추구했어. 모험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비겁한 줄도 모르고.

내가 노망이 나서 지금과 다른 인간이 된다 해도 이건 합리화하지 못할 것 같아.

이 소설에는 딱부리 이복동생으로 땜통이 나와. 뭔가 모자라고 약자인 인물로.

난 이상하게 땜통에게 감정이입이 되더라. 그래일까, 뒷부분에 가서 땜통이 화재로 죽는 장면은 읽어내기가 괴로웠어.

소설가들은 왜 이야기를 이렇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꼭 주인공이 좀 살만해지면 슬픈 일이 느닷없이 일어난단 말야.

할 수 없어. 소설이 없는 현실을 미화해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을 가장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거니까.

현실에서 완성된 해피엔딩이란 없으니까. 삶은 늘 굴곡이니까.


특히 황석영의 작품들은 더 그래. 마치 신문기사처럼 담담하게 기술하거든. 작가 김훈처럼. 그래서 더 무겁게 읽혀. 난 그 무거움이 불편해서 이 작가들 작품은 먼저 고르지 않는 편인데도 읽다 보니 자꾸 걸려. 그래도 좋기는 해. 이들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소방관의 세계며(김훈) 난지도 쓰레기 뒤지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황석영의 이 책) 경험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틈만 나면 책을 붙잡고 살았어. 밥 먹고 물 마시면서도 읽고 하다못해 산책을 하면서까지.

그냥 읽었어. 늘 그렇듯이. 책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 내가. 책이란 걸 읽어봐야 내 삶이 뭐가 달라질까 생각하면서도.




책을 읽는 내내 틈만 나면 책을 붙잡고 살았어. 밥 먹고 물 마시면서도 읽고 하다못해 산책을 하면서까지.

그냥 읽었어. 늘 그렇듯이. 책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 내가. 책이란 걸 읽어봐야 내 삶이 뭐가 달라질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한 데는 제목도 한몫했어.. 낯익은 세상이라니. 주인공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남들이 사용하다 버린 것들을 파며 사는 모습이 지금의 내 삶과 낯익다니.

그럴 리가 있나, 생각했어. 난 쓰레기를 파며 살지 않잖아. 적어도 내가 시내 나갈 때 내 옷에 밴 쓰레기 냄새를 신경 쓰지도 않고 말야.

그런데 불과 몇 장 읽기도 전에 난 느끼고 말았어. 낯익음을.

가난과 소외, 어둠과 눈치가 아니라 쓰레기장 속 사람들이 지닌 세속의 욕망이 어쩌면 내 것과 그리도 닮았는지.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 아무하고나 붙어 먹고(정말 이런 표현이 나와) 아무나 배신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연대하거든.

나 역시 그런 인간이고. 내가 일하는 곳은 쓰레기장은 아니지만, 난 이곳에서 얼마든지 그러거든. 비록 마음속에서 일 뿐이라 해도.

이런 욕망은 타고나는 거겠지. 바위도 뚫는 나무 뿌리처럼 강하게. 그래서 누구도 막지 못하게.

아이들이 이런 내게 드러낼 때, 나는 그걸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다듬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아니, 그럴 능력은 될까.


다인.

널 보면 끝도 없이 일기를 쓰던 때가 생각나.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도 모르고 사관이 사초를 기록하듯 아무거나 쓰던 때가.

지금 넌 일기 대신 다른 걸 기록하지. 그래, 그것도 일기야. 페북이든 인스타든 지금 네가 만들어가는 것들을 위해

지금 넌 네 삶을 넌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구. 하지만 한가지 제안하고 싶어.

어떤 걸 올리든 간에 그 안에 희망 한 가지씩은 꼭 넣어 보라고. 도스토옙스키처럼. 

비록 그게 지금으로선 참 요원한 희망이라 해도.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널 좀 더 견디게 해 줄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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