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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8. 2019

소년의 정욕은 어떤 색일까?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14


그녀가 떠난 뒤 한동안 얼빠진 채 지내야 했어. 힘들게 번 등록금을 쓰리꾼에게 잃어버린 고학생처럼 회복되지 않는 수렁에 갇힌듯 멍하게 지냈어. 때밀이 손님이 많아 돈을 벌어도 즐거운 걸 몰랐어. 형에게 정신 어따 놓고 일하느냐 야단도 맞았지만 도무지 기운이 나야 말이지. 사방에 그녀에 대한 환청, 환시뿐이었어. 어떻게 나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땡삐한테.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 매일 밤 쓴 연서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없었나? 그러다 정신이 겨우 돌아온 건 쓰레기통을 비우다 장깨가 구겨 던진 꽃 편지지를 보고서야. 짝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거지. 그래도 마음에 살얼음처럼 퍼져나가는 아픔은 어쩔 수 없었어. 그녀를 꽤 좋아했었나 봐. 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나의 실연 감정은 근거가 없는 거야. 그녀는 한 번도 호감을 보인 적이 없었거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현실이 보이자 이번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 졌어. 어떻게 그녀를 상대로 그리 강렬한 연애감정을 유지했을까. 그것도 혼자 일방적으로. 내 속의 무엇이 그렇게 이끌었을까. 그녀의 초승달 같은 얼굴이 떠올랐어. 아하, 외모. 그녀의 예쁜 외모였어. 햇살을 보지 못해 창백하게 야윈 얼굴. 지하계단을 내려갈 때 팔랑거리던 치마 끝으로 보이던 희고 가느다랗던 발목. 양손으로 머리를 묶을 때 핀을 야무지게 물고 있던 입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 뒤로 넘어갈 듯 웃을 때 하얗게 드러나던 목덜미. 마주치면 직접 봐서 좋았고 볼 수 없을 때에는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그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억도 주로 몸에 대한 인상이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그때 내가 경험한 그 일 때문이야. 살아가면서 다들 은밀하고 특별하게 경험한다지만 서로 다른 크기의 놀람과 충격의 무늬로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평생 잊히지 않는 첫 경험. 


그 시작은 때밀이 형에게서 왔어. 변명이 아니야. 형이 아니었다면 그 경험은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을지 몰라. 목욕탕에는 남, 녀 탕 모두에 때밀이가 있었어. 하지만 남탕과 달리 여탕에는 탈의실 뽀이가 없었어.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때를 밀지 않으니까 수입이 나지도 않았겠지. 나를 비롯한 목욕탕 식구들은 때밀이 형을 실장님이라고 불렀어. 탈의실 운영권을 가져서일 거야. 그런데 손님들은 '나가시'라고 부르더라. 형은 그 표현을 싫어했어. 나가시라는 말이 때밀이를 라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비하하는 말 같았어. 장깨라는 말처럼. 형이 사장을 미워하는 것도 사장이 형을 부를 때 굳이 '나가시'라고 해서야. 


"아, 시발. 내가 사장 전담 나가신 줄 아나, 재수 없게." 


사장이 형을 부를 때마다 형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술을 씹곤 했어. 그런데 사장은 형뿐 아니라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여탕 때밀이 누나에게도 똑같이 불렀어. 형이 참다못해 나가시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어. 


"어이! 주접을 떠세요, 아주. 야, 그럼 니들이 나가신데 뭐라고 부를까?" 


저런 사람이 어떻게 목욕탕 주인이 되었겠냐고, 그 깐죽거리는 주둥이를 때수건으로 밀어 소금에 문대버리고 싶다며 날뛰는 형에게 어떤 연대감을 느꼈을까, 여탕 누나는 형을 마음에 들어했어. 어쩌다 일이 일찍 끝나면 목욕탕 앞 포장마차에서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되었지.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포장마차 술값도 아까웠는지 아예 탈의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어. 내가 목욕탕 청소를 다 마치고 나오면 형이 술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그럼 난 재빨리 슈퍼에 가서 소주랑, 오징어를 사 오지. 그리고 지하 보일러실에 가서 오징어를 노릇하게 구워 와. 형 기분을 맞춰드리면 나도 나가서 장깨랑 놀다 오라고 허락을 하거든. 그때가 대략 밤 10시쯤일 거야. 내가 두어 시간 나갔다 오면 형과 누나는 이미 가고 없어. 나는 두 사람의 술자리를 치우고 잤지. 그런데 그런 일이 잦아지니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나는 잠이 모자라 낮에 하품을 하는 거야. 형이 나더러 그럼 탈의실 맨 구석에서 알아서 자래. 맨 구석? 할 수 없이 테이블과 가장 먼 탈의실 맨 구석 창가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잤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여탕 정리를 끝낸 누나가 들어오자 형은 남탕 불을 켜더니 재빨리 탈의실 불을 껐어. 불 꺼진 탈의실에는 탕 안에서 나오는 간접조명 덕분에 보일 건 대충 보이지만 어둑한 분위기가 되었어. 내가 누운 자리는 테이블과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더 어둑했어. 잔이 부딪히는 소리, 꼴꼴 술 따르는 소리, 형과 누나가 얘기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탈의실에 퍼지는 동안 밖으로는 근처 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무지갯빛 네온 그림자들이 일렁여서 잠을 방해했어. 난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누웠어. 내가 자는 곳이 구석이어서 어차피 형에게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네온 불빛을 피하고 싶었거든. 형이 탈의실에서 한 잔 하고 가는 날은 책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대신 평소 못 잔 잠을 일찍 자는 셈이니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어. 문제는 형과 누나가 갈수록 더 친해지는지 술자리가 잦아지는 거였어. 일주일에 한 번쯤 하던 술자리가 어떤 날은 연이어 마실 때도 있었거든. 내가 먼저 형에게 술 사 올까요? 하고 묻는 날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형과 누나는 한잔 했고 난 일찍 잠자리에 누워 바로 잠이 들었지. 그러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나서 살짝 깼어. 밖에서는 흥청거리는 술집 소음들 뿐 별소리는 없는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자려는데 그때였어. 어디서 음산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어떤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가 목이 졸리는지 가늘었다가 또 갑자기 굵어지는 신음 소리가. 그 소리는 나는 듯하다가도 안 나고 또 잠잠한 듯하다가도 돌연 헉, 하고 토해졌어. 잠은 안 깨고 소리는 들리고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꿈인지 아닌지, 여기가 탈의실 맞나? 하며 가늘게 눈을 떴을 때 난 깜짝 놀라고 말았어. 어둑한 테이블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실루엣이 보이는 거야. 물을 잔뜩 머금은 수제비 반죽 덩이 같은 게 느리게, 하지만 부드럽게 꿈틀거렸어. 형과 누나였어. 잠시 뒤 내 눈이 어둠에 적응되어 자세히 보니 테이블 위에 던져진 듯 널브러져 있는 누나의 아랫도리에 머리를 파묻은 형이 물어뜯을 기세로  고개를 휘저어대고 있었어. 형의 고개가 거칠게 움직일수록 누나의 등은 신음과 함께 튕겨져 올라 활처럼 굽어졌다 풀리기를 반복했어. 점점 끊어질 듯 말 듯 당김과 풀림을 반복하더니 칼에 찔리는 듯 깊고 짧은 신음을 연이어 토해내다가 누나의 몸이 털썩, 가라앉았어.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둘은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어. 몸은 천근만근이어서 자고 싶은데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어. 대신 방금 내가 본 장면이 의식 한가운데로 떠올랐어. 바깥에서 들려오던 소음과 네온 불빛은 어디론가 사라졌어. 테이블 위의 실루엣들과 그들이 토해낸 신음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난 처음으로 몽정을 했어. 


말로만 듣던,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는데도 다음날 아침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 형은 출근을 했어. 형을 보자 내가 오히려 뭐라도 들킨 양 부끄러워졌어. 그런데도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어. 여느 날처럼 일을 하고 내게 신경질을 내고 그러다 며칠 뒤 또 내게 술 심부름을 시켰어. 형과 누나가 술을 마시는 날은 나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어. 몸이 피곤하고 눈이 감겨도 내 의식은 귀로 몰리는지 형과 누나가 또 낼 지 모르는 소리가 자꾸 기대되는 거야. 인간사회에서 섹스에 대한 건 당자사들 외엔 아무도 모르거나 모를 것을 전제로 주변과의 관계가 이어지잖아. 그런데 탈의실 구석에서 자야 하는 나는 그게 안 되는 거야. 형과 누나는 술을 마실 테고 흥이 오르면 또 뭘 할지 모르니까.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올리고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어. 두 사람이 잠 시 뒤 낼 소리들이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걸. 몸은 잠에 취해 늘어지는데 의식은 또렷해지는 상황. 하지만 일상의 피로 때문일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 보면 그들은 아직 술을 마시고 있었어. 그렇게 몇 번을 자다 깨다 했을까, 그들의 정사가 또 시작되었어. 스물대여섯쯤 되었을까, 한껏 젊은 그들은 격렬했고 분방했어. 막힘과 뚫림, 머금음과 토함, 고통과 해방의 신음이 탈의실을 채웠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절로 지하다방의 그녀가 떠올랐어. 훗날 나도 그녀와 저렇게 뜨거워질 수 있을까. 그녀도 저 누나처럼 저렇게 허리를 꺾으며 신음을 토할까. 그 생각이 미치자 까닭 모를 죄의식이 몰아쳤어. 그녀를 그렇게 상상하다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느낌이었어. 애써 그녀를 신음소리 가득한 의식에서 밀어냈어. 하지만 어느새 다시 그녀는 다시 의식 한가운데로 떠 올라 허리를 활처럼 꺾었어. 내 몸이 제멋대로 달떴어. 안 그런 척하려 해도 안됐어. 난 그날 또 몽정을 했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만든 건 열일곱 살의 정욕이 아니었을까. 형과 누나의 정사로 시작은 되었지만 내 속에서 꿈틀거리던 욕정이 갈 곳을 몰라 소용돌이치다가 나와 그녀의 정사를 떠올리는 걸로 해소되곤 했어. 그녀를 욕정의 상대로 떠올렸기 때문에, 그녀가 허리를 꺾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그녀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창피해 숨고 싶었어. 그건 아마도 내가 그 답을 알아가는 과정이 비참해서였는지도 몰라. 그녀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상정해놓고 내 마음대로 그녀를 이상화했잖아. 정작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 그녀 또한 나를 좋아할 거라고 아니, 좋아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거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미리 정해놓은 건 나 자신이었어. 스토커. 그것도 유치하고 저열하며 비겁한 스토커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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