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18
장깨 말대로 그러다 정말 그녀를 놓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 그녀와 이미 끝난 건지도 몰라. 그렇게 지질한 태도를 보이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예리한 날이 가슴을 휙 긋고 지나가는 아픔이 느껴졌어. 그래, 난 안되나 보다.
그녀는 내 머리가 덥수룩해서 대학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 당시 모든 고등학생은 스포츠머리여야 하잖아. 또 그녀 주변의 내 또래 남자들은 다들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 인지도 몰라. 하지만 내 주변은 반대였어. 장깨처럼 중국집 배달부거나 스스로를 공돌이 공순이라고 부르는 구두 공장 친구거나, 청바지 공장 누나들이지. 목욕탕 보일러 보조기사로 일하는 형도 대학생 나이지만 대학생은 아니었지. 나와 그녀의 환경 차이가 서러운 벽처럼 느껴졌어. 그래서 내가 그녀와 거리를 두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은행에 갈 때마다 그녀에게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어. 마감시간의 그 분주함 속에서도 그녀만 보면 소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거든.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면서 그녀의 움직임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그녀가 보고 싶지만 맞닥뜨리기는 싫은 이 감정은 뭘까. 난 일부러 그녀가 맡은 창구를 피했어. 그녀 앞에 서면 곤란할 것 같은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었어. 하지만 은행 창구라는 게 작은 책상 단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옆 창구를 이용하는 것도 부담은 마찬 가지야. 도스토옙스키가 신이 되어 내게 자유를 하나 허락하신다면 은행 심부름을 그만 가는 걸 구걸하고 싶었을 만큼. 그러나 그런 신이 있겠니?
결국 그녀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어. 일주일쯤 지나서였나? 그날도 은행 마감시간 임박해서 뛰어갔는데 내가 너무 늦었는지 다른 창구 행원들은 모두 나가고 그녀만 남아 있는 거야. 할 수 없이 난 그 녀 앞 대기자 맨 뒤에 서게 됐어. 좆됐네. 입이 타면서 나도 모르게 또 욕이 나왔어. 이제 어떡하지? 딱 걸렸네. 고개 바짝 쳐들고 양아치처럼 나가볼까? 지가 어쩔 거야? 땡삐를 떠올려 봤어. 상대를 저리게 만드는 서늘한 표정에 피도 눈물도 없는 눈빛의 땡삐.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잘랐다지. 땡삐가 된다고 생각하자.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내 차례가 바로 다음으로 가까워오고 있었어. 난 고개를 쳐들었지. 그런데 맨 정신이라 그런가, 가슴이 콩닥거려 죽겠는 거야. 손도 떨리고 머리에 피도 쏠리는 느낌이었어. 얼굴에 조금만 더 힘을 주고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 껌 씹는 입모양만 하면 돼. 근데 아, 이런. 진짜... 그게 안 되는 거야. 몸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마음대로 안 돼. 참담해서 울고 싶었어. 지금이라도 확 나가버릴까. 그럼 형이 그냥 안 둘 텐데. 어떡하지? 아, 진짜 미치겠네...
“책 다 읽었어요?”
“네... 네?”
“가난한 사람들. 그거 엄청 아끼시더니.”
“아, 그 책... 그거...”
“왜요? 혼자만 읽으려고 안 빌려 줬으면서.”
“...”
“아까워서 자기도 못 읽었나 보네? 그건 그렇고, 돈이랑 통장 빨리 줘요.”
뭐지, 이 분위기는? 그녀는 별로 화 안 난 사람 같았어. 목소리에서 나에 대한 반가움마저 느껴졌다면 착각이었을까. 갑자기 마음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어. 단두대에 묶였다 풀려나는 기분. 신이 있다면 지금 저 여자가 아닐까. 내가 큰 죄를 지어 시치미 떼고 숨어 있어도 야단치지 않고 자비로 용서해 주는 그런 신. 어린아이처럼 뭉클한 생각이 들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어. 동시에 이제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기 싫었어. 무슨 말이든 하자.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 만한 그 어떤 말이라도. 지금 당장.
“저... 근데요. 그 책... 그거요. 네, 가난한 사람들요... 그거 제가 오늘은 못 가져왔지만... 내일 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됐어요. 싫다고 뻥 차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빌려준대, 칫!”
“아, 그땐... 제가 정말 죄송했... 안 빌려드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오래 빌려드릴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드린다는 게 그만... 죄송했습니다. 그게 제 책이 아니라서요...”
“그게 그거죠. 뭐, 이젠 필요 없어요.”
“아, 네...”
“치사해서 나도 샀어요.”
그녀가 서랍에서 책을 꺼냈어. 화사한 들꽃이 그려진 포장지로 겉표지를 싼 책이었어. 그 꽃그림이 너무 보기 좋아서 내가 잠시 멍해있는 동안 그녀는 통장을 자기 책에 척 끼우더니 내 앞에 툭 던졌어.
“이번엔 제가 빌려드릴게요. 그쪽 책 아니라면서요. 읽고 주세요. 대신! 독후감 꼭 써서. 알겠죠?”
오월의 은사시나무 이파리도 그녀처럼 싱그럽진 않을 걸. 책을 받아 들고 돌아서서 세 발짝이나 걸었을까?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는 거야. 다시 뒤 돌아 그녀를 봤지. 그녀는 이미 일어나 후문 쪽으로 가고 있었어. 난 그쪽을 향해 목욕탕 손님께 하듯 허리를 바짝 굽히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어.
“정말 감사합니다!”
막상 그러고 나니 창피해서 후다닥 나왔기 때문에 그녀가 내 인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확인은 못했어. 아무렴 어때. 은행으로 돌아오는 길이 평소보다 더 하늘에 가깝게 느껴졌어. 정말 조금만 뛰어오르면 구름에 닿을 것 같았어. 목욕탕에 돌아와서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어. 술 취한 사람처럼 서성거렸지. 때밀이 형이 때를 밀고 나오다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어.
“어쭈, 쉬애끼 봐라? 뭐야, 동작 그만! 그거. 압수. 빨리 가져와. 인마.”
“네...?”
“손에 든 거 새꺄. 선물 샀냐? 여자 주려고? 요 쉐키, 이거.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게.”
그녀가 빌려 준 책을 말하는 것 같았어.
“아, 선물 아닙니다. 그냥 책입니다. 헤헤...”
“어쭈, 새끼! 빨리 안 가져와?”
아, 통장 달라는 말인가 보다. 난 책 사이에서 통장을 재빨리 빼서 형에게 내밀었어. 근데 그때 책 사이에서 뭐가 하나 툭 떨어지는 거야. 편지봉투였어. 빨간색. 재빨리 주워 다시 책 사이로 감췄어.
“뭐야, 너 연애하냐? 요 새끼가 아주 가지가지해요. 얌마, 애들은 그럼 못 써, 새꺄. 일찍부터 여자랑 존나게 하지? 나중에 피똥 싸, 인마. 햐, 요 새끼 이거...”
형은 책을 뺏을 것처럼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나갔어.
형이 나가자마자 책을 사물함에 넣고 잽싸게 남탕 입구에 널린 수건을 정리했어. 거울 앞 선풍기 주변 머리카락을 쓸고 바닥에 떨어진 면봉을 치우고 머리빗을 모아 비누 묻혀 칫솔로 닦고 드라이기의 검은 때도 휴지로 싹 닦아 나란히 놓았어. 거울에 마구 튄 스킨과 로션 자욱도 닦았지. 냉장고 음료를 채워 손님이 꺼내기 쉽게 앞쪽 열을 맞추고 평상 위 손톱도 쓸었어. 온도가 오락가락하는 사우나 스위치도 확인하고 탕 안에 어지럽게 널린 플라스틱 바가지와 의자들도 샤워기 앞에 줄 맞춰 놓았어. 평소엔 그렇게 지겹던 그 일이 그날따라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 그렇게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탈의실과 욕탕을 청소하고 나서 드디어! 사물함에 고이 넣어둔 그녀의 책을 꺼냈어. 예수의 제자가 성배를 다루듯 엄숙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