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17
<전쟁과 평화> 다음에 읽게 된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었어. 그날도 겨우 마감시간에 맞춰 은행에 들이닥쳤지. 책을 보자 그녀가 어이없게 웃었어.
"가난한 사람들? 아우, 왜 칙칙한 걸 자꾸 읽고 그래요. 나까지 따운 되게."
"이게 그중 얇은 책이라서요. 무거운 건 들고 다니기가 좀... 헤헤."
“이런 책 말고 다른 책들은 없어요? 요즘 소설들 같은 거...”
“네... 헤헤.”
그녀는 묻지도 않고 빼앗듯 낚아채더니 휘리릭 몇 장을 넘겼어. 그러다 나를 흘깃 보더니 작가 이름을 보고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몇 번 삐죽거렸어.
"도스또옙스키가 이런 것도 썼어요? 근데 이런 책들은 어디서 구해요? 학교 도서관 마크도 없네? 그럼 이거 다 그쪽이 샀어요?"
"아뇨, 제 껀 아니고... 잠깐잠깐 빌려 읽는..."
"도서관에서 대출하면 되잖아요. 우리 학교도 다섯 권씩 해주던데?"
"아, 근데 저는..."
"근데 그건 좀 읽을 만해요? 재미있냐고요."
"네, 뭐 재미있는 거 같기는 한데... 저도 잘은 모르겠..."
"뭐, 재미없겠죠. 그쪽 안목은 지난번에 알아봤으니까... 일단 줘 봐요. 집에 가서 읽게."
"아니, 이 책은 좀... 왜냐하면 그게... 제 꺼가 아니... 그래서 지난번처럼... 오래 빌려드리면 좀..."
"빌려주기 싫어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금방 읽고 돌려주셔야... 제가... 또... 갖다 놓아야 되는..."
"책이 뭐 닳아 없어져요? 알았어요. 바로 주면 될 거 아녜요. 치사하네. 책 가지고."
내가 일부러 안 빌려준다고 생각했나 봐. 바로 다음 날 책을 돌려주는 거야. 그것도 아무 말 없이. 화났나? 책 한 권 가지고 유세를 떤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어. 그렇다고 물어볼 수가 있나. 차라리 화를 내주면 내가 적당히 미안한 표정 짓는 걸로 어떻게 무마라도 해 볼 텐데. 느낌이 안 좋았어. 다음 날 내가 은행에 갔을 때, 그녀는 정색을 하고 나를 다른 손님 대하듯 했어. 마치 '내가 네 책 얻어 읽나 봐라', 그런 오기마저 느껴졌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차가운 반응에 무안해진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돌아왔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목욕탕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탈의실 평상에 풀린 눈으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어. 그녀는 나름 호감을 갖고 내 책에 관심을 가져 준 거였는데. 난 책을 못 돌려받을까 봐 걱정이나 한 거야. 내가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었나?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어.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어. 그녀는 책에 관심을 보이는 걸로 호감을 드러냈잖아. 나도 그녀 때문에 가슴이 뛰었고. 그런데 난 왜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지? 아니, 그전에 난 왜 그녀와 더 가까워지려고 안 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려고 할까?
생각해 볼 것도 없었어. 이미 답을 아니까. 그녀가 부담스러웠던 거야. 은행원에 대학까지 다니는 그녀가. 만약 내 처지를 안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고등학교도 못 간 목욕탕 뽀이 주제에 잘난 척은 하고 싶어서 이해도 못할 톨스토이를 들고 다닌다고 생각할 거야. 에이, 좆됐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어. 이젠 착잡한 상황이 되면 험한 상소리가 툭. 아, 난 왜 이럴까. 들통 나서 제대로 망신당하기 전에 여기서 끝내자, 마음먹었지.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거야. 내 눈이 자꾸 그녀를 찾아. 그녀도 나를 의식하는지 눈을 마주치곤 했어. 그럴 때마다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 미안한 표정을 했어. 나를 차갑게 대한 게 마음에 걸렸나 봐. 그녀가 계속 화를 내면 좋겠는데 오히려 미안해하니 불편했어. 미안한 건 오히려 나잖아. 은행 갈 때마다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심정이었어. 차라리 은행 심부름이 없어지면 좋겠다. 근데 형 심부름은 해야 하고. 아, 나는 어쩌자고 은행에 예금을 하자는 오지랖을 떨어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하다 하다 소용도 없는 후회까지 하는 지경이 됐지 뭐야. 사람이 이렇게까지 멍청해질 수 있을까. 부끄러웠어. 대학생인 줄 아는 그녀에게 고등학교 못 간 걸 숨기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 대학생이 아닌 건 바꿀 수 없는 진실이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책을 빌려주는 일은 대학생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잖아. 옹졸한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어. 그런데 어쩌나. 이미 상황은 지나갔으니. 그나저나 이젠 은행에 어떻게 가나.
차라리 내일이라도 가서 말을 해 볼까? 내가 이러이러한 상황이라서 당신에게 책을 빌려줄 수가 없었다. 진짜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내가 원래 책 아까워서 남 안 빌려주는 그런 쩨쩨한 새끼가 아니다. 비록 대학생도 아니고 고등학교도 못 갔지만 책 한 권으로 쪽팔리는 짓 안 한다고 말야. 아니지. 그건 안 돼.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내가 대학생인 줄 알아서일 걸? 근데 고등학교도 못 간 걸 알면 까무러칠 거야. 대놓고 싫은 내색은 안 하겠지만 서서히 정을 떼겠지. 소설 속 배운 사람들도 다들 그랬잖아. 무식하게 돌아서기보다 은근히 멀어지는 방법. 괜히 솔직한 척하다 그녀가 떠나는 걸 지켜봐야 할지도 몰라. 지하 다방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 이제 어떡하지? 차라리 대학생인 척해버릴까? 아주 그쪽으로 나가보는 거야. 그럴듯한 거짓말 몇 개만 만들지 뭐. 그녀가 어떻게 알겠어? 러시아 문학 연구를 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어. 거짓말을 하면 어디까지 하나. 결국 그녀를 속이는 거잖아. 죄 없는 그녀에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녀는 잘못도 없어. 그냥 사실대로 말하자. 내가 대학생인 줄 아는 건 그녀 스스로 자초한 착각이니까 내 잘못은 아니야. 적어도 내가 속인 건 아니니까. 혹시 봐줄지도 몰라. 내가 불쌍해서. 에라, 씨발, 뭐 안 봐주면 어때? 아님 말고지. 내가 일부러 고등학교 안 갔어? 집이 못 사는데 어쩌라고. 씨팔, 그게 내 잘못이야? 아버지가 암 걸려 죽는 걸 여덟 살짜리가 어떻게 막아? 이렇게 마음을 정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어. 휴, 다행이다. 그때, 때밀이 형이 욕탕 문을 확 열어젖히며 소리 질렀어.
"야, 이 십쉐애꺄! 저 시애끼가 빨리 라면 안 끓이고 농땡이 까고 있어. 좆만 한 새끼, 요즘 완전히 풀어져서 개판이야. 한 따까리 돌려야 정신 차리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로맨스를 꿈꾸던 대학생에서 목욕탕 뽀이로 순식간에 돌아왔지. 그래, 내 주제에 지금 책이고 뭐고 신경 쓸 때냐. 다 필요 없어. 시팔. 나도 모르겠다. 은행에 어떻게 가긴 뭐 어떻게 가. 그냥 고개 존나 뻗쳐 들고 가면 되지. 그녀를 아예 몰랐던 것처럼 하지 뭐. 젠장.
그녀를 포기하는 것에 대한 대가였을까, 그날따라 형에게 욕먹을 일이 많았어. 남탕 한증막 말린 쑥이 떨어져 보충하라는 지시도 까먹었고 납품 온 베지밀을 냉장고에 바로 안 넣은 거야. 어지간하면 퇴근할 땐 욕을 안 하는 형이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어. 그 바람에 현실로 재빨리 돌아올 수 있었어. 여자에게 쪽팔리게 매달리느니 뒷골목 쏘다닐 때처럼 담배 물고 침 뱉는 자세로 나가자고 결론 내려버렸어.
열일곱의 난 그렇게 망친 일을 다시 풀 용기도 지혜도 없었어. 부끄러운 짓을 하면 잘못을 시인하고 고칠 생각 대신 바짝 고개를 숙인 채 그 일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는 습관이 진하게 배어있었어. 잘못이 분명해서 부인하거나 숨지도 못하는 상황이면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듯 아예 고개를 더 빳빳이 쳐들고 버티는 거야. 그러면 마음속 부끄러움이 묽어지는 기분이 들었어. 상대는 잠시 뜨악해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가 버려. 그렇다고 내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어. 바로 이어서 방금 내가 보였던 천박함에 대한 수치심이 흉한 모습으로 한 겹 더 올라오곤 했어. 그럴 때마다 우울했어.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싶어서. 남들에겐 뻔뻔하게 버티고, 나 자신에겐 부끄러워하고. 이걸 반복하다 보니 저 아래 마음 깊은 곳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이게 뭐냐. 너 정신병자 다 됐구나...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를 못 냈어. 그저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침을 뱉을 뿐. 근데 아무리 그래 봐야 위로가 될 리 없잖아. 갈수록 지질한 애벌레가 되는 기분이지. 보다 못한 장깨가 한 마디 했어.
"병신아, 걔가 좋으면 좋다 그래, 새꺄. 너 그러다 또 뺏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