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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1. 2019

톨스토이도 그저 인연의 하나일 뿐이었어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16

도난 사고가 있던 그날, 경찰에게는 말 안 했지만 사실 형도 돈을 잃어버렸어. 때 밀고 받은 돈 중 일부를 비상금으로 옷장에 넣고 잠갔는데 없어진 거야. 그 뒤로 형은 내게 돈을 맡겼어. 옷장에는 더 이상 못 넣겠고, 별 수 있나 내 바지 주머니에 넣었지. 그런데 오후가 되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일하기가 불편한 거야. 그렇다고 옷장에 넣자니 지난번 그 도둑이 언제 와서 또 털어갈지 알 수가 없잖아. 고민하다가 은행에 예금하면 어떻겠냐고 형에게 물어봤어. 형도 좋대. 난 형 도장을 받아 목욕탕에서 제일 가까운 은행에 가 통장을 개설했어. 그리고 매일 마감 직전에 은행으로 달려갔어. 그 시간은 하루 중 손님이 가장 많을 때야. 일수 찍듯 매일 오는 상인들이 많았거든. 어떤 날은 삼십 분 이상 기다려야 해. 그래서 책을 갖고 다녔어. 일부러 맨 뒷줄에 서서 읽었지. 다른 손님 순서가 다 지나갈 때까지. 에어컨이 있어서 시원한 데다 형 심부름이니라 늦어도 뭐라고 안 했거든. 그때 내가 한참 읽던 책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는데 마침 통장을 책갈피로 쓰고 있었어. 그런데 이 책 때문에 은행원 아가씨를 사귀게 되었단다. 지하다방의 그녀를 짝사랑하다 제대로 말도 못 나눠보고 땡삐에게 뺏긴 뒤 알게 된 두 번째 여자. 비참과 탄식이 만연하던 내 삶을 오렌지 빛 싱그러움으로 채워 준 그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금할 때마다 책에서 통장을 꺼내 돈이랑 접수용 접시에 올려놓으면 은행원이 돈을 센 뒤 통장에 얼마가 들어왔다고 쓰고 콩알만 한 도장을 찍어 주었어. 그러면 난 통장에 적힌 금액을 확인한 다음 인사를 꾸벅하고 바로 목욕탕으로 뛰어 가지. 때를 미는 일은 손님의 수에 따라 수입이 들쭉날쭉 이어서 수입이 얼마 안 되는 날은 은행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대략 이틀 건너 하루 꼴은 은행에 갔던 것 같아. 형은 꽤 실력 있는 때밀이였기 때문에 수입이 좋은 편이었거든.


은행에는 창구가 여럿 있는데 그중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앳된 아가씨가 앉아 있었어. 급한 손님들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창구로 가게 마련이잖아. 그래서 그런지 갈 때마다 그 줄엔 사람이 많았어. 앳된 걸 보면 경력도 적겠지. 그래서 힘든 자리에 앉혔나? 은행이나 목욕탕이나 신참들에게 힘든 걸 시키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야. 신참에겐 일을 더 시킬 게 아니라 부담을 줄여주면서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나? 도대체 이 놈의 사회는 왜 약자들에게 가혹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가 가여워 보이기 시작했어. 나라도 그녀의 일을 덜어줘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일부러 그 줄에는 서지 않았어. 


마감시간이 되고 셔터가 내려가면 다른 창구 직원들은 죄다 나가 은행 뒷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폈어. 하지만 줄이 긴 그 창구의 신참 행원은 여전히 앉아서 남은 손님을 응대하는 거야. 목욕탕 일이 바빠 마감시간 직전에야 겨우 달려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 줄에 서야 했지. 그런 식으로 몇 번 마주쳤나? 하루는 그 아가씨가 불쑥 묻는 거야.


"아저씨, 그 책 재밌어요?"


은행을 왔어도 예금 관련 질문 외에 들어 본 적이 없던 나는 방금 이 분이 뭐라고 했는지 몰라 그냥 멍하게 쳐다봤지. 늘 고개 숙이고 주판을 놓거나 뭔가를 쓰던 모습만 건성으로 보다가 모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아주 깔끔한 인상이야.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빈틈없이 빗어 넘긴 매무새 하며 한 듯 안 한 듯 화사한 화장까지. 뭔가 세련되었으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지는 글씨체나 톤이 살짝 높은 목소리도.


"재밌음 빌려 줘요."


아하, 책 빌려달라는 얘기구나. 뭐, 못 할 거 뭐 있나, 빌려드렸지. 그렇게 일단 빌려주고 나니 다음에 은행 갈 때는 그 아가씨 줄에 서게 되는 거야. 그래야 책을 돌려받으니까. 근데 이 아가씨가 며칠이 지나도 책 돌려줄 생각을 안 해. 그렇다고 다 읽었냐고 물어보자니 또 보채는 것 같잖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며 처분만 바라는 수밖에. 근데 예금 처리만 해주고 더 말을 안 해. 빨리 받아야 마저 읽을 텐데 말이지. 두껍지도 않은 그 책 읽는데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도 않을 텐데 이상했어. 책을 못 돌려받으면 큰일이야. 때밀이 형이야 책장에 관심이 없으니 있으나 없으나 상관 안 하지만 사장님이 알면 큰일이거든. 그는 가끔 책장 앞에서 빼돌린 책이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거든. 중고 서적으로라도 팔면 돈이 되니까. 결국 일주일쯤 지나 조급해진 내가 먼저 물었지. 그녀는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서랍에서 책을 꺼내더니 내게 툭 던졌어.


"궁물 까요?"


"네?"


"궁물...까냐고요."


"무슨 궁물..말씀하십니까?"


"궁물 까요 궁물 까. 나도 1학년인데. 야간대 다녀요."


"아, 국문과 말씀이십니까?


"네, 몇 학번이세요? 1학년 같은데?"


"아, 저는... 아닙니다."


"그럼 무슨 과에요?"


내가 대학생인 줄 아나 보네. 고등학교도 못 간 사람한테 대학생이라니. 은행의 소음 때문이었을까,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책 표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탁탁 짚으며 나무라듯 말했어.


"아저씨, 이런 책 읽지 마요. 칙칙해."


"...네?"


"뭐 이런 걸 읽어요. 국문과도 아니라면서. 수용소 이야기인 줄 모르고 읽다가 토하는 줄 알았네."


"네... 뭐 다른 거 읽을 게 없어서..."


“읽을 게 없어도 그렇지, 이런 걸...? 취향 독특하시네.”


하지만 내게 그 책은 나름 정신승리의 도구였어. 소설 속 수용소에 갇힌 인물들의 비참한 생활을 읽으면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거든.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난 돈이라도 벌잖아.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히게 된 이유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이는 행태들은 부조리의 극치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권모술수의 다양한 예들이 모여 있지.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선입견을 주잖아. 그런데 책을 보다 보면 그 안 누구도 죄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그게 묘하게 나를 위로했어. 고등학교 못 가고 목욕탕 뽀이로 사는 나도 남들에겐 죄인과 다름없는 인간 취급이거든. 사회 하층민에게 함부로 덧씌워지는 부정적인 선입견에 대해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 반말을 하거나 심지어 욕을 해도 덜 불쌍해 보이는 존재가 나였어. 심지어 경찰도 아무 근거 없이 도둑이라고 생각했잖아. 설사 내가 도둑이 아니라 해도 뺨 몇 대 후려친 걸 굳이 미안해하지도 않아. 난 그래도 되는 만만한 대상인 거야. 수용소에 갇힌 사람처럼 타인의 기준에 따라 존재 가치가 규정되고 함부로 해석되는 건 기분 나쁜 일이지만, 절망하지 말고 나도 귀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솔제니친은 말하고 있었어. 투쟁. 그렇다면 난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할까. 투쟁이라는 단어를 쓴 걸 보면 아주 강하게 맞서야 한다는 건데. 때밀이 형에게 발길질당하는 삶이 나아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장의 비아냥거림에는 또 어떻게 맞서? 그들에게 똑같이 욕을 하고 발길질이라도 해? 차라리 이놈의 더러운 목욕탕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터로 가는 게 투쟁은 아닐까? 아니면 언젠가 형과 사장이 스스로 반성하고 나에게 대한 폭력을 멈출 때까지 지금처럼 납작 엎드려 참는 게 투쟁일까. 솔제니친이라면 그에 대한 답도 책에 써놓았겠지 싶어서 더 악착같이 읽고 싶었는지 몰라. 근데 그녀는 내가 그 책을 들고 가기만 하면 아직도 칙칙한 책 읽는다고 핀잔을 줬어. 간섭 같기도 하고 훈수 같기도 한 말투였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어. 네까짓 게 이런 걸 읽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이런 것도 읽느냐는 칭찬같이 들렸거든. 난 그녀의 타박을 들을 때마다 시익 웃었어.


솔제니친 다음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어. 그 책에도 입에 잘 붙지 않는 러시아 이름이 엄청 나와. 난 지난번 안나 카레니나 읽을 때처럼 일기장을 찢어 인물 관계도를 그려 책 사이에 끼웠지. 내가 그렇게까지 하며 읽는 게 그녀에게 인상적이었을까, 그녀는 그 책도 빌려가 읽고 돌려주면서 책 사이에 작은 쪽지를 남겼어. 이름 외우는 게 지겨워 러시아 소설은 안 읽었는데 내가 만든 관계도를 보며 읽으니 편하더라는 내용. '만든'이라는 말엔 빨간색으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었지. 아,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매혹적인 칭찬을 할 수 있겠니.



그녀의 편지를 받고 보니 관계도를 더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 그래서 인물의 이름을 다시 쓰고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간단히 요약해 적었어.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옆에 덧붙이고 줄로 이었지. 그냥 찌익 긋는 게 아니라 자를 대고 그었어. 사건이 길어지면 별도로 종이를 덧붙였어. 책 읽는 시간보다 더 오랜 작업이었지만 그녀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니 또 그것도 좋은 거야. 빨강, 파랑, 녹색 펜으로 글씨도 반듯하게 쓰려고 애썼어. 어떤 책이든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었어.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 같은 사람. 마찬가지로 전쟁과 평화에서 내가 특별히 좋아한 인물은 피에르였어. 그가 프랑스혁명을 통해 느낀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도 멋있고 포로가 되었을 때 만난 늙은 농부로부터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는 장면은 레빈이 농노로부터 배우는 모습과 겹쳐 보여  여러 번 읽도록 좋았어. 그가 나타샤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야. 사랑이 어떻게 성숙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 지금의 나는 피에로만큼 멋진 신분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도 사랑을 하게 된다면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의 대화를 읽다 보면 비참한 현실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그 삶 자체를 이어가는 게 결국은 위대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뭐랄까, 인간이 삶의 고비들을 지나다 보면 점점 망가지기가 쉽잖아. 쉬워서라기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피에로는 달라. 피폐해질 만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식을 고양된 상태로 유지하려고 애써.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난 잘 알아. 목욕탕에서 늘 경험하고 있으니까. 형에게 욕을 먹거나 맞으면 우선 화가 나. 그런데 화를 표현할 수 없잖아? 속으로 참고 눌러야 해. 그러다 보면 나의 무력함이 슬퍼져. 바로 긴 우울이 찾아오지. 시간이 지나 다시 일을 좀 하려고 하면 또 욕먹을 일이 생겨. 또 슬퍼지지. 그게 내 감정의 패턴이었어.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난 그게 안 됐어. 근데 피에로는 자기가 왜 절망하는지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거야. 어떤 부분이 화가 나고 어떤 부분이 슬픈지. 일단 무작정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와 다르지. 그렇게 끝없이 성찰해가며 하며 성숙한 인간으로 익어가는 과정이 멋져 보였어. 그래서였을까, 읽는 속도는 느렸지만 그만큼 재미있었어.



그때 그녀는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사랑과 진실>이라는 드라마에 빠져 있었어. 그 드라마가 나오는 날의 편지 내용은 주연 배우인 원미경, 정애리 이야기였어. 그리고 자기도 김수현 같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어. 나도 답장을 썼어. 꼭 드라마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작가가 되면 내 이야기도 써 달라고. 그녀의 편지는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어. 희망과 좋은 기대가 가득했거든. 나에겐 일상이었던 우울과 좌절, 불길함 같은 것들이 그녀의 글에서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어. 단란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 한 점의 그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화사한 문장들이 그녀의 편지에는 있었어.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더 이상 추위 걱정 없이 마음껏 잎을 틔우는 봄 새싹처럼 들뜬 향기가 났어.


그런 편지에 답장을 못 쓰겠는 거야. 뭔가 밝고 즐거운 걸 써야겠는데 내 현실에 그럴만한 게 있어야 말이지. 있는 그대로 쓰면 그녀가 놀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 쓰자니 왠지 그녀에게만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 결국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어. 자연히 내 이야기보다는 책 이야기가 많아지지. 그녀를 이게 서운한 것 같았어. 근데 별 수 있나. 거짓으로 쓸 수는 없고 감추면 안 될 것 같으니 화제라도 바꿀 수밖에. 내가 편지를 통장 사이에 끼워 창구의 접시에 올려놓으면 그녀에게 주면 그녀는 보조개가 파이도록 웃으며 주변을 슬쩍 본 뒤 서랍에 쏙 넣었어. 그리고 통장 정리가 끝나면 서랍에서 자기가 쓴 편지를 꺼내 살짝 통장에 끼워 주었지. 어떤 날은 몇 장, 어떤 날은 작은 메모지에. 편지를 받으면 목욕탕에 돌아오는 길에 읽었어.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도. 다 읽으면 봉투에 잘 넣어 옷장에 깊숙이 넣었어.


오가는 편지가 늘수록 그녀에 대해 알게 됐어. 아버지가 은행에 다니신 걸 봐서 여유 있는 집 같았어. 서울에서도 꽤 알려진 상고를 졸업했대. 은행에 취직한 걸 보면 공부도 잘했겠지. 신입사원 연수에서 1등이었대. 하긴, 주산 놓는 손을 보면 과연 저게 사람의 손인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란해 보이긴 했어. 게다가 은행원은 월급이 또박또박 나오는 직업이잖아. 그것만 해도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수준 차이가 나는데 대학까지 다닌다는 그녀...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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