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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7. 2019

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20




목욕탕에서 일하던 때, 어떤 사람이 때밀이 십수 년 만에 일하던 목욕탕을 인수했다는 이야기가 TV에 나왔어. 사람들이 놀랐지. 때밀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목욕탕을 인수하냐고. 그것도 서울에서. 요즘은 목욕 도우미, 또는 세신사라고 불러주지만 그때만 해도 나가시라고 낮춰 부르던 때밀이가 말야. 때를 밀어보지 않은 사람은 하루 종일 어두컴컴하고 습한 탕 안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오가는 그들을 의식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들은 항상 손님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뭔가를 하고 있단다. 사실 때밀이는 어떤 직업보다 곡절과 부침이 많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몰라. 나를 고용한 형도 그랬어.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척이 운영하는 목욕탕에 나처럼 뽀이로 취직했어. 나처럼 음료를 팔고 청소와 심부름을 했을 거야. 그리고 틈나는 대로 때 미는 걸 배웠겠지. 나처럼 욕도 먹고 맞기도 했을까? 그랬을 거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았을 거야. 때밀이가 돈이 된다는 걸. 그러다 군대 제대하고 서울 변두리에 단칸방 얻어 살면서 당시 건축 노동현장에 뛰어들었어.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이 목욕탕에 때밀이 계약을 하고 들어 온 거야. 소문에 천만 원 넣었다던데. 천만 원이면 당시 주택복권 1등에 당첨되어야 생기는 돈이야. 서민에게는 하늘의 별처럼 요원하던 그 돈을 형이 얼마나 독하게 모았을까. 당시 내가 살던 지하 단칸방 전세가 140만 원이었어. 우리 아버지 산소가 있던 오천 평짜리 산을 팔아 마련한 돈과 같은 금액이지. 


형이 그 목욕탕을 선택한 건 계산에 의한 것이었어. 장안평 중고차 시장 근처라는 점 말야. 손님으로 일반 주민보다 상사 직원들이 많이 왔거든. 형 말대로라면 이런 목욕탕이 알짜배기야. 


때밀이 손님은 안 오고 어디서 추접스러운 좆빠리들만 꾸역꾸역 밀려와서 때 존나 밀면서 물 다 퍼 쓰는 목욕탕엔 들어가지 마라. 그런데 가면 굶어 뒤져, 새꺄. 


형 말대로 이 목욕탕엔 일반 손님은 별로 없어. 옛날에 처음 생겼을 때에는 주택가가 많아 주민들이 주로 왔다는데 중고차 시장이 생기면서 유흥가가 함께 들어오니 주민들은 떠나는 거야. 자동차 매매상이나 유흥가 손님 중엔 깡패들이 많았어. 일반 손님은 무서워서 못 오지. 일반 손님이 줄면 목욕탕 사장은 불만이지만 때밀이 형에겐 호재야. 중고차 시장이나 유흥가엔 현금이 많이 돌잖아. 그들은 어지간하면 때를 밀거든. 전날 술 마시고 사우나하러 오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때를 밀지는 않을 거 아냐? 그 사람들은 면도기나 칫솔도 안 들고 와. 다 사서 쓰지. 음료도 쉽게 마셔. 형은 이 점을 이용했어. 다른 목욕탕보다 품질이 좋은 걸 파는 거야. 물론 가격도 비싸게 받지. 형은 납품업자를 물리치고 직접 동대문 목욕용품 상가에 가서 떼어 왔어. 일회용 칫솔이나 면도기는 보통은 백 원이지만 여기에 품질이 더 좋은 삼백 원짜리를 추가하는 거야. 상사 사람들은 다들 삼백 원짜리를 샀어. 이게 다가 아니야. 음료수만 파는 것보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면 돈이 된다는 걸 형은 알고 있었어. 라면이었어. 단무지만 있으면 되니까. 


밤새 술을 마시고 사우나 와서 한 숨 자고 나면 누구든 속을 달래고 싶을 거야. 사람들이 라면을 찾기 시작했어. 그걸 끓이고, 서빙하고 치우고 설거지는 내 몫이야. 이상하게 사람들은 라면을 혼자 시키는 법이 없더라. 다들 같이 먹어. 배가 불러도 그냥 먹어. 그러니 내 일이 많을 수밖에. 여기가 목욕탕인지 라면 가게인지 모를 정도였어. 라면 한 그릇은 천 원이야. 라면을 팔면서도 형은 머리를 썼어. 매운 고추를 썰어 넣었지. 국물이 매우면 음료를 마셔야 하잖아. 그런 손님들이 여러 팀 오는 날이면 칫솔, 면도기 같은 일회용품과 때밀이, 라면에 음료까지 꽤 큰돈이 들어왔어. 그렇게 해서 형이 한 달 동안 예금하는 돈이 사오십만 원이었어. 두 해만 그렇게 모으면 목욕탕 보증금이 나오는 거야. 당시 내 월급은 6만 원, 옷 공장 실밥뜯이로 들어간 어머니 월급이 9만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형의 수입이 대단한 거야. 


문제는 라면을 항상 팔 수 없다는 거였어. 사장이 와서 보고 길길이 화를 낸 거야. 도떼기 시장이냐고. 그깟 라면 팔아 얼마나 벌어 처먹겠다고 냄새 풍기는 라면을 내 목욕탕에서 끓여대냐고. 결국 형이 라면을 포기했을까? 그럴 형이 아니야. 사장이 올 것 같은 날은 라면을 싹 치웠어. 라면을 찾는 손님에겐 구청에서 단속이 떠서 오늘은 못 판다고 거짓말하라고 시켰어. 사장이 어디 가서 안 올 게 확실한 날은 꺼내 놓고 팔았지. 사장은 안 오는 날이 더 많으니 라면을 파는데 문제가 없었어. 형은 또 출근길에 계란을 두 판씩 사들고 와서는 지하 보일러실에 가서 삶아 오라고 시켰어. 카운터 이모가 보면 사장 마누라에게 일러바칠지 모르니 계란은 반드시 수건 담는 바구니에만 담으래. 형의 장사 수완은 내가 따라갈 수 없었어. 그가 파는 건 뭐든 잘 팔렸어. 매출액이 늘었고 은행에 저금하는 액수도 점점 늘어갔어. 나도 형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돈을 벌어 지하방을 나와 빌라 지상층으로 이사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럼 은행의 그녀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때밀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가능하면 빨리. 그러려면 형이 가르쳐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면서 심부름을 잘해야 해. 형이 내게 때밀이를 가르쳐 준다는 보장은 없어. 일부러 가르쳐 줄 리도 없고. 그럴 땐 형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야 해. 내가 불쌍해서라도 가르쳐 주게끔. 욕하면 욕먹고 때리면 맞더라도.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운다는 건 그런 설움을 감수한다는 걸 의미하던 때였어. 다행히 오전에 손님들이 밀리는 바람에 일찍부터 때밀이를 배울 수 있었어. 대강 철저. 빨리빨리 때를 밀라는 말이야. 시간이 돈이니까. 단골마다 세게 미는 걸 좋아하는지, 그 반대인지를 기억해야 해. 손님들 눈에 잘 띄어야 한다며 밝은  형광색 수영복 팬티를 입었어. 어두컴컴한 탕 안에서  형광색 엉덩이 둘이 씰룩거리며 잰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상상을 해보렴. 때밀이인 것도 민망한데 팬티 색까지... 창피했어. 그런데 어쩔 수 있나. 입으라면 입어야지. 때 미는 손님이 없을 땐 탕 안을 마구 돌아다녀야 해. 손님들에 대한 시위랄까, 나 여기 있으니 때를 미시오, 뭐 그런 거. 근데 그러다 보면 진짜 때를 밀겠다는 손님이 나와. 손님의 마음을 낚아채는 형. 그는 이런 세밀함을 어떻게 알까. 나도 저런 걸 배워야 하는데. 처음 때 밀 땐 서툴러서 힘만 들었어. 한 사람 때 밀고 나면 기운이 쪽 빠지고 팔이 너덜너덜 감각이 없었어. 손님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불평을 했어. 형에게 욕먹고 등짝을 맞으면서 몇 달을 배우고 여름이 되자 나도 얼치기 때밀이가 되어갔어. 양팔을 쓰니 저절로 팔뚝과 어깨에 힘이 생기고 근육이 잡혔어.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결정적으로 안 되는 게 있었어. 팔 힘을 적당히 배분하는 기술. 내가 밀면 손님들이 하나같이 너무 간지럽거나 반대로 너무 아프대. 그런데 형이 밀면 가려운 곳은 어떻게 알고 시원하게 긁어주고 아플 것 같은 곳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지나가는데도 막상 때는 하나도 안 남는다는 거야. 그 비법이 뭘까, 아무리 형을 관찰해도 형은 손놀림은 그냥 대충대충 썩썩 미는 거 이상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데. 그런 섬세한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그래야 돈을 벌든가 뭐든 할 거 아냐. 형을 볼 때마다 부러운 한편,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나를 자책했어. 


오전 손님들이 한 차례 빠지면 목욕탕이 한산해져. 그럼 형은 담배를 하나 물고 지하 보일러실에 놀러 가. 난 오전 내내 손님들이 먹은 라면 그릇을 설거지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빈 사물함에 차곡차곡 쌓았어. 그런 다음 보일러 실로 인터폰을 해서 형에게 지금 점심 라면 끓일까요? 여쭤 봐. 그러라고 하면 2개 끓이고 너나 먹으라고 하면 1개를 끓여. 하루 세끼가 거의 라면이었어. 어쩌다 질리면 짜장면.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라면은 항상 2개를 끓여야 해. 근데 청년 두 명에게 라면 두 개는 너무 적잖아. 그래서 내가 목욕탕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세 개를 끓인 적이 있었어. 형이 화가 많이 났지. 


내가 너한테, 새캬. 육만 원을 주잖아, 새캬. 배고프면 니 돈으로 나가 사 처먹든지 새캬. 내 라면을 날로 처먹어? 엎드려뻗쳐, 새캬. 


하나에 양심, 둘에 불량. 형이 시키는 대로 난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양심불량을 외쳤어. 몇 번 하다가 힘이 빠져 낑낑대자 라면이 끓을 때까지 탈의실 바닥에 머리를 박았어. 그 뒤로는 항상 2개를 끓였어. 형이 시키는 대로. 그게 다가 아니었어. 라면을 그릇에 떠먹으면 좋잖아? 그러면 뜰 때 적당히 반을 나눠서 뜰 수가 있으니 분배도 어느 정도 되고. 근데 형은 어떤 이유에선지 그걸 못하게 했어. 라면이 다 끓으면 냄비 뚜껑을 차지하고 크게 한 젓가락 떠서 후루룩 먹기 시작해. 형이 이미 절반 넘게 떠 간 다음이야. 나도 먹어야 하니 빈 그릇 대고 소심하게 한 젓가락 뜨지. 그 양이 얼마나 되겠어? 더구나 금방 끓인 라면은 뜨겁잖아. 난 뜨거운 걸 잘 못 먹어. 결국 라면 두 개 대부분은 형이 먹고 난 면 조금과 국물이나 마시는 거야. 형은 짜장면을 시킬 때에도 두 그릇을 시키지 않고 곱빼기 하나와 물만두를 시켜. 그러면서 빈 그릇 하나를 갖다 달라고 하지. 장깨가 짜장면을 가져오면 내가 빈 그릇에 삼분의 일쯤을 덜고 형에게 그릇째 드려. 늦게 먹으면 혼나니까 허겁지겁 씹지도 못하고 막 삼키는데 형은 벌써 물만두까지 다 먹고 앉아있어. 성질 급한 형보다 늦게 먹으면 또 욕을 먹지. 


햐, 그 새끼. 너, 종일 처먹느라 돈 벌겠냐? 답답한 새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데다 양이 충분하지 않으니 늘 배가 고팠어. 그렇다고 내 월급으로 사 먹으면 엄마 드릴 돈이 모자라니 그냥 참는 수밖에. 하지만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늘 불안했어.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을 거야. 열일곱 살이면 잘 먹는 건 포기하더라도 배는 안 고파야 하잖아.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이런 내 사정을 잘 아는 장깨가 가끔 남은 음식을 가져다줬거든. 밤에 목욕탕 문을 닫고 기다리면 가끔 장깨가 부를 때가 있었어. 늦은 배달이 있는 거지. 그 시간에 시키는 음식들은 남기는 경우가 많거든. 


밤에 고스톱 치면서 빼갈이랑 양장피, 탕수육 시키는 새끼들은 백 프로 남긴다고 봐야 돼. 씨발. 땡잡는 거지, 뭐. 한 시간쯤 뒤에 한 잔 빨자. 킬킬. 


그러면 난 목욕탕 테이블에 신문을 쫙 깔지. 한 시간쯤 지나 장깨가 자전거 타고 그릇 걷으러 나가는 게 보여. 그럼 난 그릇 두 개를 들고 중국집 옆 골목에서 기다리는 거야. 장깨가 남은 음식을 내 그릇에 쏟지. 남긴 음식이다 보니 이쑤시개가 들어있을 때가 많았어. 어떤 때는 담배꽁초도. 아, 저런 걸 먹어야 하다니. 


먹어 둬, 새꺄. 먹으라고 만든 걸 왜 못 처먹냐, 병신아. 니가 더 굶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정말 내가 굶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시골 살 땐 감자에 옥수수밥이라도 굶지는 않았는데. 저런 것까지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머뭇거리자 장깨가 사물함을 열더니 때밀이 형이 쓰는 깨끗한 접시를 가져왔어. 


하이고, 네, 네. 처먹기 싫으세요? 그럼 굶어 뒤지세요. 난 먹을 테니까. 


그가 이쑤시개며 담배꽁초 같은 걸 적당히 걷어내고 씻을 건 씻은 다음 새 접시에 옮겨 담았어. 그러고 나니 뭔가 좀 달라 보이데. 막상 먹어보니 맛도 좋았어. 태어나서 탕수육과 양장피, 팔보채를 그때 처음 먹었어. 어떤 날은 운이 좋게 고량주가 남기도 해. 그런 날은 소주를 몇 병 사다가 목욕탕에서 술판을 벌였어. 장깨가 큰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들이키더니 말했어. 


야, 너도 조심해라. 


뭘? 


니네 때밀이 그 새키 말야. 씨발. 누가 때밀이 아니랄까 봐. 전에 일하던 애 존나 패서 짭새 출동했잖아. 


애를 패? 왜? 


음료수 삥땅 치다가 걸렸대. 얼마나 팼는지 장 파열 나서 입원했었잖아. 깬값 존나 물었을 걸. 


음료수가 얼마짜리였는데? 


이백 원. 그 새끼가 원래 돈돈 하잖냐. 


하... 그렇다고 이백 원에 장 파열이 나도록 사람을... 


병신아, 그 때밀이 새끼한테 천 원만 줘 봐라. 살인도 해, 그 새끼는. 파출소 잡혀가서도 지는 죄 없다고 지랄 떨다가 존나 터졌대. 완전 또라이 새끼야. 


... 


때를 그렇게 잘 밀면서. 돈을 그렇게 잘 벌면서 이백 원에 사람을 죽도록 패다니. 소름이 끼쳤어. 내가 그동안 형에게 몇 차례 맞은 건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난 그것도 무섭던데. 장깨 말대로라면 나도 언젠가 비슷하게 당할지 몰라. 그 많은 음료를 팔다 보면 착오가 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심부름에 라면 서빙까지 하면서 무슨 재주로 그걸 맞춰. 


며칠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게 어디다 적어 두는 거였어. 내가 삥땅 안 친 걸 증명하려면 기록밖에 없잖아. 목욕탕 카운터 이모님께 여쭤보니 서랍을 한참 뒤져 연도가 훨씬 지난 가계부를 꺼내 주셨어. 날짜 별 수입, 지출 적요, 비고가 칸칸이 구분되어 있는. 매 쪽 윗부분에는 오늘의 역사라고 해서 과거의 사건 사고가 적혀 있고 아랫부분에는 지혜의 명언으로 유명한 사상가들의 명문장이 한글과 영어로 적혀 있었어. 그 양식을 반으로 나눠서 내가 파는 열 가지 음료와 다섯가지 일회용품 별 판매량, 판매금액, 재고를 적었어. 또 반대쪽에는 각 음료 납품업자에게 그때그때 지급해야 할 물건 값과 받아야 할 외상값을 적었어. 그리고 은행 가기 전마다 형에게 보여드렸어. 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일일이 냉장고 속 음료를 세고 거스름돈과 장부를 확인하더니 한 달쯤 지나니까 냉장고 안은 확인하지 않고 장부의 판매금액만 봤어. 다른 건 몰라도 형은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어했어. 


저 새끼 말야. 일은 존나 느리고 답답한 새끼가 꼴에 중학교 나왔다고 장부 정리는 빠꼼이야. 


휴, 적어도 맞아 죽지는 않겠네. 내가 이렇게 하면 형이 때밀이를 좀 빨리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형은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어.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나 은행에 통장을 만들 무렵엔 매일 확인하던 장부도 안 보는 날이 더 많아졌어. 심지어 납품업자에게 물건 값 지불하는 것까지 나더러 은행에서 꺼내 직접 주라고 도장까지 맡겼어. 그래도 난 매일 그 앞에 장부를 내밀면서 오늘은 얼마나 팔렸고 납품업자 누구에게 얼마를 주겠습니다, 일일이 보고했어. 그럼 형은 알아서 해, 새꺄. 그러면서 더는 장부를 보지 않았어. 대신 가끔 뱀눈을 하고 노려보며 짧게 한 마디 했어. 


똑바로 해, 새꺄. 나 속이면 뒤진다, 너. 


형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에게 맞아 장이 터졌다는 아이가 떠올랐어. 장이 터진 그 아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주억거렸어. 형이 원하는 게 그거 같았어. 무서워서 감히 자기를 속이지 못하게 만드는 거. 장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각인. 감히 형 돈을 십 원짜리 하나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믿게 하면 형도 안심을 할 거잖아. 그럼 나를 안 때릴 거고... 내가 불쌍해서 때밀이 기술을 더 알려주지 않을까. 


장부를 정리하는 시간은 빨라도 삼십 분은 걸렸어. 음료와 일회용품 재고 확인하는 건 십 분이면 되는데 문제는 꼭 뭐가 한두 개 빠져. 그걸 찾느라 시간이 걸려. 아주 미친다니까. 간혹 쉽게 찾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못 찾았어. 어제 남은 재고와 오늘 팔린 수의 차를 계산하면 오늘의 재고와 맞아야 하는데 안 맞는 거야. 남는 경우는 없고 항상 모자라. 팔고 나서 돈을 안 받았거나 누가 몰래 집어 간 경우야. 형이 알면 난리 날 거잖아. 이것 때문에 따귀도 맞았거든. 내가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걸 형에게 증명할 방법은 없어. 그냥 욕을 먹거나 얻어맞는 거야. 그래도 어떡하겠어? 형에게 그날그날 보고하는 수밖에. 처음엔 나더러 물건 관리 개판으로 한다고 욕을 하더니 그런 일이 잦자 똑바로 해, 새꺄,만 할 뿐 그냥 넘어갔어. 사람들 북적이는 상황에서 나 혼자 탈의실 지키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다행히 매출은 계속 오르고 있었거든.  


어떤 직업이든 내부 사정을 알게 되면 빈틈을 이용한 부정을 저지르기가 쉽지? 목욕탕에서 파는 음료가 그래. 하나에 몇 백 원짜리가 하루에도 수십 개, 많이 팔리는 날은 백 개 넘게 팔리기 때문에 언제나 돈이 있게 마련이거든. 매일 도매납품 업자가 오토바이로 음료를 박스째 실어왔어.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 매출을 따져보면 상당한 금액이야. 구멍가게와 다르게 목욕탕은 이문을 많이 남겼으니 손에 들어오는 돈이 꽤 됐지. 당시 인기 있던 헬스 펀치라는 음료는 200원에 떼어 와서 500원을 받았어. 두 배가 넘게 남잖아. 요구르트나 베지밀, 딸기, 쵸코, 바나나 우유, 영지 음료도 마찬가지였어. 목욕탕에 들어오는 음료는 도매가가 제일 싼 것만 받았어. 왜 있잖아. 겉포장은 천연음료 느낌인데 내용물은 향신료와 설탕, 색소로 만든 음료들. 금액이 커지고 팔리는 종류가 많을수록 중간에 떼어먹을 빈틈도 많게 마련이잖아. 형은 목욕탕 뽀이로 있어 봤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빼돌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어. 적어도 형이 아는 범위에서는 절대 하면 안 돼. 맞아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어. 때밀이를, 어떻게든 때밀이를 배워야 하니까. 그러려면 형에게 잘 보여야 해. 내 목표는 오로지 그것이었어. 


그런데 그 목욕탕에는 형이 모르는 빈틈 하나가 있었어. 음료를 납품하는 업자들끼리 공유하는 틈. 그들은 유통 생태계를 잘 알고 있어.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지. 음료를 파는 사람은 형이 아니라 나잖아. 그들은 내게 잘 보이려고 애써. 그렇다고 내게 돈을 줄 수는 없잖아. 대신 물건으로 주는 거야. 헬스펀치 40개 박스가 들어오면 10개를 그냥 주는 거지. 근데 한 번에 주면 티가 나잖아. 그러니까 물건 가져다줄 때 몇 개, 수금하러 올 때 또 몇 개를 주는 거야. 헬스펀치가 그러니까 베지밀도 그러고 우유회사, 영지 회사도 그래. 형은 냉장고에 남은 재고는 가끔 꼼꼼하게 셌지만 지하 보일러실에 쌓인 재고와 합산해서 따질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의 성격상 귀찮아서 안 할 사람은 아니야. 그 정도로 셈에 밝지 못했어. 숫자를 말해줘도 잘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어. 자기 통장에 얼마가 입출금 되었는지 내게 물어보고서야 알 곤 했으니까. 복잡한 내용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대신 나더러 속이면 죽이겠다고 엄포만 놓는 거야. 죽어라 일하고 돈 버는 재주는 있는데 돈의 실마리를 조이는 재주가 모자란 거지. 게다가 납품업자들도 나를 부추겼어. 


이건 나가시 말고 니 먹으라꼬 주는 기다. 나가시 절대 모른다. 걱정 말고 팔아서 니 어매 갖다 디리라. 


물건 값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오백 원짜리를 팔면 오백 원이 그냥 내 돈이었어. 장부에 적힌 재고는 형에게 입금하고 덤은 사물함에 고이 숨겼어. 덤으로 오는 것과 월급을 합하면 많을 땐 엄마 월급보다 많이 벌 때도 있었어. 그래 봐야 장깨 월급보다 적고 은행의 그녀 월급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어. 때밀이 기술을 배우려면 적은 월급을 견뎌야 하니 별 수 없었어. 


장부 메뉴 중에서 <오늘의 중요한 일>이라는 빈칸이 있었어. 처음엔 그냥 넘어가다가 어느 날부터 그날그날의 내 삶을 상징하는 낱말 몇 개씩을 채워 넣어 보았어. 은행의 그녀에 관한 게 가장 많고, 읽은 책에 관한 것, 엄마와 동생들, 장깨와 구두 공장, 청바지 공장 친구들 이야기였어. 또 자연스럽게 내가 쓴 돈도 기록하게 되더라. 장깨랑 포장마차에서 먹은 참새구이, 오뎅탕, 쉬는 날 집에 갈 때 탔던 버스요금, 꽃 편지지 값, 그녀에게 F.R. 데이비드의 노래 WORDS를 불러주려고 산 팝송 책값... 내가 목욕탕 이야기를 소상히 되살릴 수 있는 건 그때 적어 놓은 <오늘의 중요한 일> 칸 덕분이야. 그 가계부를 디자인한 사람은 그 칸이 그렇게 쓰일 걸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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