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21
은행 아가씨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사실은 통장의 주인이 아니며 대학생도 아니라고 실토한 건 결국 잘 한 셈이었어. 그녀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거든. 다행이었어. 한편 잠시나마 그녀를 속일까 생각했던 게 후회됐어.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면 안 되지. 진짜 이야기를 감추고 가식으로 편지를 채우는 남자가 연인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난 왜 거짓말할 생각을 했을까. 그녀 마음을 얻으려면 내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어. 나에 대해 알고 나서 그녀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통장과 대학생이라는 포장이 없는 나를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이런 걱정은 나만의 걱정이었어. 그녀의 답장 속에 일말의 실망도 드러나 있지 않았으니까. 난 그게 문제야. 걱정이 앞서가거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상정해 놓고 미리 전전긍긍하잖아. 나의 실체를 알면 그녀가 싫어할 거라고 결론 지어 놓고 감출 거짓말이나 하려 하지. 거짓말 한 걸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해. 그러니 머리가 복잡하지. 아예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거야. 가난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감추는 일이 내겐 더 쉬웠던 거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어? 더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녀를 위해서라도.
편지에서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 딱 하나였어. 편지를 우표 붙여 보내고 싶다는 것. 은행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한 소리 들었나 봐. 고객에게 불필요한 응대를 하는 건 금지랬어. 돈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행원과 사사롭게 나눈 말을 구두계약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다툼이 있다는 거야. 또 은행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아는 것도 싫댔어. 난 목욕탕 주소를 알려줬고, 자연스레 목욕탕에서 일하는 것도 그녀가 알게 되었어. 다음날부터 목욕탕 카운터 이모에게 편지가 오는지 물었지.
“근데... 네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목욕탕 사람들 중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어. 다들 나를 남탕 뽀이라고 불렀거든. 목욕탕에서 내 존재감은 그런 거였어. 마당을 쓰는 마당쇠나 땅을 일구는 돌쇠처럼 고유한 이름 대신 기능에 따라 호칭이 정해지는 존재. 카스트제도로 치면 수드라에 해당하려나. 아냐, 수드라는 숫자라도 많잖아. 우리나라에 나 같은 목욕탕 뽀이로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젠장, 난 그럼 불가촉천민이겠네.
“병신아. 생각 많은 것도 병이다. 이름 물어보면 알려주면 되지, 새꺄. 수드라가 뭐? 이 새낀 툭하면 신세타령이야. 근데 니들 그러다 연애하겠다? 목욕탕 뽀이랑 은행 아가씨라... 햐, 삼삼한데?”
장깨 말대로 난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인지도 몰라. 생각이 많다는 건 궁상스럽고 질척거린다는 말 같았어.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 내 현실이 그랬거든. 개선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실. 여기에서 내가 마음껏 징징대지도 못한다면 이 피곤한 삶을 어떻게 견딜까 싶었어. 어떤 삶이든 비극의 틀 안에서 해석하면 신기하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잖아. 세상엔 온통 비극 투성이일 거니까. 내 삶도 비극이지만 더 비극적인 삶을 보면 위안이 되지. 소설 <가난한 사람들>도 그랬어. 은행원 부모에게 태어나 안정적으로 자란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가난해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소설에 빠진 건 위로를 찾고 싶어서였어. 비극의 한가운데에 나를 고정하고 내 주변 인물을 소설에서 찾아 대입해 보았어. 의외로 위안이 되었어. 고등학교를 못 간 현실, 겨우 쌀 한 가마 반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월급. 이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작가들이 목욕탕 책장 속엔 꽤 있었어. 부자 애인 옆에서 가난한 연인이 기가 죽는 건 결국 돈의 문제일 텐데 나보다 더 가난한 그들도 사랑을 한다는 걸 안 순간, 그 문장들이 얼마나 우아하게 보이던지! 주인공도 죽기는 하지만 굶어서가 아니었어. 사랑 때문에 기꺼이 선택한 죽음이었지. 그래, 가난해도 사랑은 할 수 있어. 묘하게 위안되는 순간이었어. 다만 안타까운 건 그 위안이 정작 그녀를 떠올리면 사라진다는 거. 그녀를 떠올리면서 불우한 현실을 잊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한숨이 나오는 거야.
그래도 난 그녀와 연애를 하고 싶었어. 얼굴에 비극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와. 불우한 나와 그렇지 않은 그녀는 대등한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관계로 느껴졌어. 그래서 불편했어. 지난번 지하다방의 그녀와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거든.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차이가 많았어. 가난한 데다 부모의 보살핌으로부터 차단된 채 마담에게 학대를 받은 여자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능력도 있는 여자. 박복과 축복의 차이가 사람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을까. 그래서 지하다방의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땡삐를 무작정 따라 간 건 아닐까. 땡삐의 돈과 보살핌이 좋아서. 은행의 그녀였대도 땡삐를 따라갔을까. 그럴 것 같지 않았어. 그녀는 사랑받고 자랐기 때문에 보살핌이나 돈이 선택을 바꿀 만큼 절실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의 결핍도 그녀에겐 별 문제 아닐 수 있는지 몰라. 그녀를 만날 땐 나도 나의 불우라는 가면을 벗자고 생각했어.
과연 며칠이 지나 그녀의 편지가 왔어. 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어. 몇 달 전 지하다방의 그녀에게 보냈던 그런 편지들이 다시 이어졌어. 내가 혹시라도, 국문과 대학생이 된다면 어떻게 편지를 쓸지 생각해 봤어. 그런 상상은 씁쓸했지만 한편 들뜨는 일이었어. 나는 한껏 과잉된 감성으로 편지를 썼어.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를 원망하며 뛰어들었던 기차역에 가 보고 싶다. 혹시 인희씨도 함께 할 의향이 있으신지 같은 내용과 러셀이나 니체라는 작가는 언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든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테레자 같은 여자가 정말 있을지 모르겠다든지. 이런 나와 달리 그녀의 편지는 주로 드라마, 특히 <사랑과 진실>에 집중됐어. 배우 원미경은 예쁘고 이덕화는 멋있다는 내용. 그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인용. 과연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다웠어.
편지지가 한 장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어떤 날은 편지지가 다 떨어져 가계부를 찢어서 쓰기도 했어. 마치 그녀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고개만 돌려도 말이 줄줄 나왔어.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혹은 안 와도. 편지를 다 쓰면 어김없이 P. S.라고 적은 뒤 몇 줄 더 넣었어. 편지도 막 접지 않았어. 마름모나 넥타이 모양으로 접고 접히는 면에는 꽃이나 나비 그림도 그려 넣었어. 봉투에 넣고 풀로 붙이고 돌아서면 또 못 쓴 내용이 생각나기도 했어. 그러면 바로 편지지를 꺼내 다음 편지를 쓰는 거야. 그래도 더 쓰고 싶어 안달이 났어. 일방적으로 편지가 갈 뿐 답장을 못 받던 지하다방 그녀와 달리 그녀의 문장을 읽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일었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전에 없던 습관을 만드는 일이기도 한가 봐.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 거야. 관찰한 걸 문장으로 구상했다가 한가할 때 탈의실 평상에 배 깔고 엎드려 편지를 썼어. 예를 들어 어느 노인의 때를 밀면서 만약 이 장면을 편지로 쓴다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멋있을까, 생각해 보는 식이지. 전 같으면 숨기고 싶었을 목욕탕 일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됐어. 치욕들을 그녀에게 드러내는 순간 그녀의 면죄부를 받는 기분이었거든. 또 그녀는 어떤 작가 스타일을 좋아할지 짐작해보는 것도 즐거웠어. 도스토옙스키를 흉내 내서 <오늘 제가 때 민 노파의 주름진 피부에 계급에 있다면. 그의 겨드랑이야 말로 황제일 겁니다.>라고 낭만을 부려볼까, 아니면 밀란 쿤데라 식으로 <죽어가는 노파의 삶이 주름진 피부 아래에 숨겨져 있다.> 고 염세적인 척해볼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즐겁기까지 했어. 그녀에게 써먹을 문장을 고르기 위해 더 열심히 책을 읽었어. 그녀 덕분이야. 그녀가 아니면, 장깨 녀석 말대로 연애편지가 아니라면 도저히 날 리 없는 기운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
편지를 통해 그녀의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 대학에 다니는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고 마당 감나무에 벌레가 생겨 아빠가 약을 쳤다는 것, 엄마가 두 해 전 천만 원 주고 산 아파트가 그 사이에 두 배로 올랐는데 그걸 팔아 새 아파트 두 채를 사서 일단은 전세를 줬지만 그중 한 채는 언니, 다른 한 채는 자기의 시집 밑천으로 주시기로 했다는 것과 그녀 가족이 나가는 교회와 자주 가는 갈빗집이 어딘지도.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의 집은 드라마 <사랑과 진실>에 나오는 부잣집과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파가 있는 넓은 응접실이 있고 벽난로 옆에는 TV가 있지 않을까. 책장엔 책이 가득하고 LP가 가득한 방에는 멋진 오디오도 있어서 기분에 따라 음악을 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을이면 가지가 휘도록 달린 감을 따서 마당에 있는 유럽풍의 하얀 식탁에 둘러앉아 웃으며 먹는 집. 주말엔 갈비를 먹으러 가고 일요일엔 성장을 하고 교회에 가는 집. 그렇게 단란한 가정의 그녀가 이 세상 어딘가 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까. 그 집엔 남편을 잃은 여자가 있는데 집이 좁아 다섯 아이 중 세 아이만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세 아이 중 큰 아이는 결국 고등학교에 못 가고 목욕탕 뽀이가 됐다는 걸. 뽀이 주제에 은행 다니는 아가씨와 연애할 꿈을 꾼다는 걸 그녀는, 알까.
아이코, 어느새 난 또 장깨가 놀려먹던 생각 병이 도진 걸 깨달았어. 무슨 생각을 하면 꼭 비관의 결말을 향한단 말야. 진짜 난 왜 이 모양일까. 틈만 나면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불러내 우울 드라마를 연출하잖아. 금세라도 장깨가 욕을 해 줄 것만 같았어. 병신아. 어지간히 해라, 새꺄. 으이구. 피식 웃음이 나왔어. 그래, 그녀의 유복함이 그녀가 운 좋게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결과인 것처럼 나의 불우도 죄의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하자. 불우한 팔자에 대해 탓할 사람은 정작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 아닌가. 시골에서 태어나 교육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시집 가 다섯 아이를 낳고 과부가 되어 서울로 이사 온 엄마와 원래 서울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어 중산층이 된 그녀 어머니의 삶은 다르잖아. 그걸 굳이 비교하며 좌절하는 아들을 본다면 우리 엄마 심정은 어떨까. 그녀의 결혼 몫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아파트를 생각하면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안 자랑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은 아니고, 가난은 내 사정일 뿐이잖아. 오히려 나의 자격지심을 들키면 그녀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그녀에 대해 좋은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녀는 가끔 은행이 늦게 끝나면 목욕탕 주변에서 기다렸다가 나를 만나고 가곤 했어. 난 덤으로 받은 딸기 우유며 베지밀을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가 버스 타는 그녀 손에 쥐어주곤 했지. 그 시각에 다방을 가자니 돈이 없고 또 다방 아니면 갈만한 곳도 딱히 없는 동네여서 주로 버스 정류장 근처 골목을 한 바퀴 돌거나 놀이터 벤치에 앉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녀와 데이트할 일이 생겼어. 추석이 온 거야. 추석날과 다음 날 오전은 목욕탕이 쉬거든. 며칠 전부터 우린 그날을 기다렸어.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어린이 대공원을 가기로 했거든. 내 일기장에 빨간 볼펜으로 크게 별을 그려 놓았던 날, 1984년 9월 10일 월요일. 그 날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추석 임박하니 목욕탕이 터져나갈 듯 손님이 몰려왔어. 팔이 빠지고 허리가 몇 번은 끊어질 만큼 때를 밀었지. 손님들이 마시고 평상에 아무렇게나 두고 간 음료수 캔이며 요구르트 병을 미처 못 치울 만큼 장사도 잘 됐어. 그리고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오후 4시가 되자 손님이 뚝 끊겼어. 귀향이 시작된 거야. 대목은 대목이라서 평소 한 달 동안 벌 돈이 며칠 사이에 들어왔어. 명절이라고 카운터 이모와 보일러실 형들에게는 떡값이 돌아갔다는 말이 돌았어. 그렇다면 때밀이 형도 나에게 얼마 주려나?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어. 명절 끝나면 새꺄, 딴 데로 새지 말고 잽싸게 와서 문 열어. 똑바로 안 하면 죽는다, 는 말뿐. 뭐, 그래도 좋았어. 난 그녀를 만날 거니까! 형이 퇴근하고 난 서둘러 수건을 모아 지하 세탁기에 돌리고 후다닥 뛰어 올라와 목욕탕과 탈의실 청소를 시작했어. 일찍 끝나면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거든. 만나서 내일 있을 첫 데이트 이야기를 하려고. 처음으로 내가 저녁도 사 줄 거였어.
손님들이 많아 청소가 길어졌어. 하지만 잠시 후 그녀를 만날 일을 생각하니 힘이 나더라. 그런데 청소가 끝날 무렵 카운터에서 인터폰이 오는 거야. 사장 심부름이 있으니 빨리 내려오래. 내려가니 현관에 설탕, 기름, 과자 선물세트가 쌓여 있었어. 그것들을 사장 차로 나르래. 선물에 따라 트렁크에 실을 것과 뒷좌석에 실을 걸 구분해줬어. 비싸 보이는 건 뒷좌석에 싣는 거야. 선물을 다 싣고 올라가려는데 차에 타래. 그의 추석 인사 길에 데려갈 건가 봐. 나 잠시 후 그녀를 만나야 하는데...? 설마...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겠지?
사장은 경찰서로 가 차를 세우더니 나 더러 트렁크에서 선물세트 다섯 개를 들고 따라오랬어. 파출소 안에 들어간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나왔어. 사장이 그에게 선물 세트를 건네자 몇 번 사양하는 흉내를 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받아서 이미 몇 개의 선물세트가 즐비한 책상 아래에 놓았어. 사장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는 또 굳이 붙잡으면서 다방에 전화를 걸어 커피를 두 잔 시켰어. 사장은 나더러 들고 온 선물을 파출소 안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리라고 시켰어. 다 돌리고 나니 밖에 나가서 기다리래. 밖에 나와 사장 차 옆에 서 있는데 잠시 뒤 목욕탕 지하 다방 마담이 커피를 들고 들어갔어. 저 커피 마시고 늦게 나오면 어쩌지. 난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섯 시 반쯤 그녀를 만나려면 지금쯤 은행 앞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커피 마시고 나온 사장에게 조심스럽게 여기서 먼저 가도 되겠느냐고 말해 보았어.
“왜? 너도 시골 내려가냐?”
“아,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지금 갈 데가 있...”
“알았어, 인마. 금방 끝나.”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사장 표정이 일그러졌어. 참을 걸 괜히 얘기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럼 남은 선물이라도 하나 줄지도 모르잖아. 면박당한 티를 최대한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를 따라나섰어. 경찰서 다음으로 간 곳은 라이온스 클럽이었어. 거기를 들렀다가 또 어느 사무실로. 거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갔어. 무겁지도 않은 선물이라 양손에 들으면 한 번에 열 개도 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장은 언제나 비싼 선물 한 두 개만 들고 나머지는 나에게 들렸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두 손을 움켜잡고 느끼한 악수를 하고 형식적인 덕담을 한 다음 굳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야 밖으로 나왔어. 그러다 보니 일곱 시가 넘었어. 더구나 마지막에 들른 곳은 목욕탕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는데 사장은 나더러 버스 타고 들어가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버스를 탈 수가 있나,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은행 앞으로 갔지. 그녀는 화가 많이 나 있었어.
"아,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그만... “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요?”
“아, 저...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님이 심부름을...”
“그럼 말을 해 줘야죠. 내게 그럴 요구 할 권리가 있죠?”
“아, 그게... 전화드릴 틈도 없이 심부름을 가느라...”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요?”
“...”
어쩌면 저렇게 드라마 대사 같은 말만 골라서 똑똑하게 말을 잘할까.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배우 같았어. 도도한 원미경을 연기하듯 그녀는 벌떡 일어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 같이 밥을 먹기로 했는데. 그냥 갈 건가? 따라가서 한 번 더 미안하다고 할까? 드라마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하던데. 아냐,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좋을까? 이게 드라마 속 한 장면이라면 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게 서 있는데 몇 발짝 걷던 그녀가 확 돌아보며 소리쳤어.
“어떡할 거냐고요.”
“네? 뭐를...”
“내일 말이에요. 내일도 이렇게 늦게 나올 건가요?”
“아, 내일은...”
그 순간 때밀이 형이 떠올랐어. 똑바로 해 새꺄, 똑바로! 형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뒤통수도 한 대 쳤겠지.
“그러니까... 내일은 똑바로 할 거죠?”
“아, 네...”
그녀가 혼자 어둠 속으로 걸어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