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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8. 2019

첫 데이트를 대하는 남자의 자세

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22

     

갑작스러운 심부름을 따라가느라 그녀와 저녁도 못 먹고 터덜터덜 목욕탕으로 돌아왔어그녀가 화가 난 채 돌아간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신경 쓸 정신도 없었어나도 빨리 집에 가야 했거든내일 그녀를 만날 거니까사과는 내일 다시 제대로 하자고 생각하고 가방을 챙겼어봄에 가져와 지금까지 입은 여름 티셔츠 몇 개와 쓰레기통에서 주워 빨아 놓은 속옷바지 몇 개그리고 세탁소 아저씨가 손님이 안 찾아간 거라며 동생들 입히라고 주신 옷 몇 개그리고 덤으로 받았지만 역시 엄마랑 동생들 주려고 팔지 않고 아껴 놓았던 베지밀과 초코우유를 가방에 몰아넣고 집 가는 버스를 탔어명절 전날이어서 도로가 한산했어아홉 시 좀 넘어 집에 도착해보니 옷 공장 실밥뜯이 일을 다니는 엄마는 오늘도 야근이신지 퇴근 전이었어간단히 세수를 하고 동생들 데리고 엄마 마중도 할 겸 집 밖으로 나갔어지상에 사는 집주인들과 공통으로 쓰는 중앙현관을 나가 오른쪽으로 돌아 빌라 뒤편에 가면 네 칸짜리 야외 화장실이 있었어그건 지하방에 사는 사람들 용이야화장실이 네 칸인 건 사연이 있어빌라에는 여덟 가구가 사는데 각각 연탄 광으로 쓸 지하창고가 하나씩 배정되어있었지근데 지하를 굳이 연탄광으로 쓸 필요가 있나연탄을 세대 현관 옆 계단에 쌓아놓으면 되잖아그럼 지하를 방으로 꾸며 세를 줄 수도 있거든근데 지하방에 화장실을 만들 공간이 없는 거야결국 건물 뒤에 야외 화장실을 만든 거지. 

아침이면 화장실이 전쟁이었어휴지를 들고 줄 서는 풍경이 매일 반복되었지내게는 좋은 점도 있었어휴지가 필요 없는 거야다른 사람이 닦고 버린 휴지를 요령 있게 접으면 한 번 더 닦을 수 있거든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 식구는 그렇게 했어우리 집은 화장실에서 가장 멀었어그게 고역이야겨울밤에 오줌이라도 누려면 옷을 다 입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가야 하거든그래서 화장실 가까운 출구에 사는 집은 그걸 나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어그런데 며칠 전 태풍으로 큰 비가 온 거야.(84년 한강 홍수그때 화장실이 넘쳤대그 바람에 가까운 집에 똥물이 들어간 거야동생들 말 들어보니 아주 난리였대홍수가 끝났는데도 화장실 출입문이며 벽은 아직 누런 똥물의 흔적이 남아있었어화장실 옆에는 남루한 비닐에 덮인 채 쇠기둥에 묶여 있는 리어카가 하나 있었어비닐을 살짝 벗겨 잘 있는지 확인했어우리 꺼 거든. 

작년어머니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중고 호떡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시작하셨어설이 지난 뒤였지만 아직은 한 겨울이라 처음엔 그럭저럭 되는 듯했어어떤 날은 만 오천 원어치를 팔기도 했어그러면 오천 원이 순수입으로 남는 거야하루에 오천 원이면 한 달이면 십오만 원이잖아당시 고향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께 내가 썼던 편지를 보면 <어머니는 호떡 파시고 제가 신문 배달을 하게 되었으니 한 달에 쌀 네 가마 값을 벌 수 있다>고 쓰여 있어그 편지를 보시고 외할아버지는 일 년이면 쌀 오십 가마를 버는데우리가 곧 부자가 될 거라고 안심하셨대. 

그런데 따뜻해지면 호떡이 안 팔린다는 걸 몰랐네호떡을 반도 못 팔고 반죽이 시큼하게 쉬어 버리는 날이 잦았어결국 어머닌 호떡을 포기하셨어문제는 그 무렵에는 호떡 리어카를 누구도 사지 않는다는 거야나중에 계산해 보니 리어카 구입비용도 못 건진 상태였어결국 지물포에 가서 비닐을 끊어다 꽁꽁 싸 묶어 놓고 겨울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어집주인 표정이 안 좋았지만 할 수 있나엄마가 사정을 했지살려달라고. 

지하 방이다 보니 주소를 쓸 때는 방 호수 앞에 B를 붙여야 해ㅇㅇ연립 B203호라고 써야 하는 거지. B는 지하를 의미하는 거야당시엔 학교에 가정환경조사서를 냈잖아주소에 지하 방이라고 표시하는 게 싫은 거야지하에 산다는 건 가난하다는 거니까같은 반 아이들 주소록을 보니 B가 들어가는 아이는 나뿐이더라고내 형편을 친구들이 아는 게 부끄러웠어그래서 B를 빼놓고 적었지같은 서울 변두리여도 빈부의 차이는 커서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살림살이를 보고 놀라곤 했어전축칼라 TV는 물론이고 어떤 친구 집에는 자가용도 있었거든난 특히 친구들 집에 초인종 달린 대문이 부러웠어지하방 출입문은 잠금장치도 없이 그냥 보통 집 방문처럼 생겼거든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한 평 남짓한 부엌이 있었어거기엔 연탄 두 장이 들어가는 아궁이가 있고 석유곤로와 몇 개의 그릇과 냄비가 전부야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 평 정도의 방이 나오는데 장롱이 하나 있고 시골에서 싣고 온 쌀가마니가 쌓여있었어그렇다 보니 방은 엄마와 나두 동생이 누우면 꽉 찼어그런 집을 보여주기 싫었어바로 옆 골목에서 호떡을 파는 엄마도연탄을 갈고 연탄재를 빌라 길 건너 쓰레기통에 버리러 가는 길도 들키기 싫었어학교 친구들은 내가 사는 곳을 꽤나 궁금해했지만 그냥 어디 멀리 사는 척 거짓말을 했어그러나 그런 속임은 오래 못 가게 마련이지어느 날내가 지하에 사는 걸 들키는 일이 일어났거든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지하에 살던 집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어지하방은 좁고 습해서 더위도 일찍 오잖아그래서 다들 출입문을 반 씩 열어놓고 살았거든어느 날 내가 세수를 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컸는지 다른 방에 들렸나 봐옆 집 아저씨가 엄마에게 화를 냈어연탄창고를 개조한 방이라 방음도 안 되는 데다 내가 어푸어푸 요란한 세수를 한 게 원인이었어그 상황에서 엄마는 내 편을 드느라 조금은 무리한 언쟁을 했지목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지상층에 살던 집주인들까지 내려올 정도로 다툼이 확대되었어그때 어른들을 따라온 아이 중 우리 반 아이가 있었던 거야그 아이는 옆방 주인집 아이였어아이고이걸 어째난감하더라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더니 금세 언 것처럼 굳어지는 거야우리 방의 주인아주머니는 상황을 대충 듣더니 낮은 목소리로 엄마를 나무랐어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이런 집에서 세를 얻어 살려면 애들을 조심시켜야지 이런 일이 생기면 앞으로는 세를 못 준다는 내용이었어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의 그 위엄 있는 말투가 내가 듣기에는 돈 많은 집 사모님이 식모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어그 집 아이들이 나보다 어렸으니 그 아주머니도 엄마보다 아래였을 텐데 반말 투의 훈계였거든주인아주머니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세를 여럿 줘 봤는데 특히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 이번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사정이 딱해 방을 준 거다그런데 이런 문제를 일으키면 되겠느냐'고 했어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셨어방 안에서 그 대화를 듣던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특히 '시골에서 온'이라는 표현 때문에지금도 그 아주머니의 말투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상처가 되었나 봐소음을 일으킨 당사자였으면서도 난 정작 밖으로 못 나갔어죄송하다고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하면 상황이 쉬워질 텐데밖에 우리 반 아이가 있어서였을까아주머니 말대로 시골에서 온 게 부끄러워서였을까3이었으니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난 왜 숨어만 있었을까그 뒤로 어머니는 내가 세수를 할 때마다 조용히 씻으라고 잔소리를 하셨어엄마 목소리에는 약간의 신경질이 포함되어 있었어나 때문에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들으셔서 그랬겠지이번 일로 밉보였으니 계약이 끝나면 이사 가라고 할까 봐 걱정되셨을 거야주인아주머니가 더 싫어졌어주인집 아이는 나보다 몇 살 어린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어그 아이는 나를 잘 따랐어그런데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기 시작했어그래서 아이와 맞닥뜨려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안 줬어한 번은 그 집 아이가 과자를 준 적이 있어그걸 먹기는커녕 밟아버리고 욕이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하지만 그랬다간 큰일 나잖아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괜찮다형은 과자 안 먹는다고 말하고 안 받았어아이에게 화를 내면 그 아이 엄마가 어머니에게 또 뭐라 할까 봐그런데 아이가 자꾸 권하는 거야심지어 입에 넣어주려고 하더라고혀끝에 달콤한 과자 맛이 느껴졌지만끝내 입을 다물고 안 먹었어그러자 내 동생에게 과자를 주더라난 동생에게도 못 먹게 했어주인집 아이는 실망한 표정을 했고 그 뒤로 서먹해졌어 

주소를 쓸 때 지하를 의미하는 'B'를 빼놓고 썼다고 했지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보내오는 우편물들이 지하방 우편함으로 안 오고 주인집 우편함으로 배달된 거야그땐 성적표를 우편으로 보냈잖아집주인 아주머니가 하필이면 그걸 보셨나 봐.

그래지금은 비록 지하방에 살더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담에 느이 엄마 잘 모셔라.” 

그 말을 듣는데 괜히 뜻 모를 저항감이 벌떡 일어나는 거야아주머니가 울 엄마에게 했던 말투가 다시 떠올라서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덕담도 고마운 거고그런데 내 마음이 그렇게 옹졸해지더라니까내가 그때 얼마나 조잔했는지 몰라왜 그랬을까주인집 아이가 날 생각해서 건네는 맛있는 과자를 그냥 받아먹어도 되잖아내가 안 먹더라도 받아서 동생을 줘도 되고그런데 차갑게 거절을 했어덕담을 고마운 마음으로 들었으면 예의 바른 학생이라는 칭찬이라도 들었을 거야근데 난 참 미숙했어그저 뻣뻣하게 나가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은행의 그녀가 나보다 좋은 집에 사는 걸 비교하면서 초라하게 느끼는 마음도 마찬가지야나 보다 잘 사는 그녀를 통해 나의 가난한 현재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거지그래서 아예 그 상황을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려는 마음그게 가난인 걸 목욕탕에 와서야 얼핏 알 거 같았어. 

목욕탕에 가기 전 내 일상은 4시에 일어나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한 아름 받아 배달하고 아침 먹고 중학교에 가는 거야갔다 오면 저녁 해 먹고 엄마의 호떡 장사를 도우러 나가지양말을 두 개 신어도 발이 시렸어그렇게 동동거리다 장사가 끝나면 리어카를 끌어다 반지하방 입구에 묶어 놓았지리어카 끌고 가다 보면 또래 아이들을 만나게 되잖아그냥 고개 숙이고 못 본 척하는 거지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욕탕에서 몇 달 일하고 온 지금은 굳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어목욕탕 일도 하는데 그깟 호떡 파는 일은 아무렇지 않은 거야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미움도 별로 안 남았어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집주인 아주머니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우스워졌어돈 버는 이유가 한낱 복수심 때문이라니부모님 원수를 갚으려고 평생 무술 연마하는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거야복수만 꿈꾸는 사람에게 자기 삶이 있겠어그렇게 우스운 삶을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이런 변화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온 거야. 

퇴근하는 엄마를 만나 돌아오는 길에 계란과 돼지고기를 사 왔어푹 잤고 다음 날 모처럼 가족이 모여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어엄마에게 드린 그 달 월급은 다른 달과 달리 만원이 모자랐어죄송하지만오늘 데이트에 써야 하거든두 사람 버스비와 입장료도 내야 하고 솜사탕도 하나는 먹어야지점심으로 돈가스저녁으로 자장이라도 먹어야 해혹시 서점에 가게 되면 시집도 한 권 사 주고 싶었어그럼 만 원은 필요할 것 같았어그렇다고 만 원만 가져갈 수는 없지오천 원을 더 넣었어그래만 오천 원이면 좀 든든할 것 같았어택시를 탈지도 모르니까엄마가 왜 만 윈이 적냐고 물었어용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어. 

너 혹시 돈 쓰고 돌아댕기는 거 아니지니가 돈 번다고 사달라고 쫓아오는 친구 조심해라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돈 모을 생각을 해.” 

아냐내 친구는 그런 사람 아냐내가 더 얻어먹는걸.” 

친구서울 놈들이 어떤 줄 알어다 니 돈 빼먹을라고 덤벼들지친구 쫓아댕기지 말구 착실히 돈 모을 생각을 해야지.” 

오늘 내가 그녀를 만나 돈을 쓸 거라는 걸 엄마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잠시 아득했어엄마 보시기에 나는 위태롭고 철없는 아이였어그래도 오늘은 할 수 없어월급을 다 못 드린 건 아쉽지만오늘만 눈 딱 감고 엄마를 속이기로 했어어쩌면 나에게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일 수도 있거든그녀에게 확실한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어. 

목욕탕으로 돌아와 세탁소 아저씨에게 얻은 기지 바지와 셔츠를 갈아입었어처음 받을 땐 딱 맞았는데 그 사이 살이 빠졌는지 헐렁해서 허리띠를 맸어거울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어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이게 지금 뭐야추석이라 엄마도 쉬는데 집에 안 있고 여자나 만나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라니내가 오늘도 일하는 줄 알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배웅하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어아냐오늘만은그녀를 만나야겠어엄마죄송해요안 잘라서 덥수룩해진 머리를 대충 빗고 나가려다 잠시 멈칫했어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불량배를 만나면 어떡하지뒷골목 쏘다닐 때 보니 불량배들은 어디에나 있던데아무 여자나 희롱하고 기분 나쁜 추파도 보내잖아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희롱한다면난 어떻게 해야 하나나 혼자라면 맞거나 뺏기거나 도망이라도 가겠지만 그녀는... 난 사물함을 뒤적거려 잭나이프를 챙겼어접으면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지만 손목을 살짝 튕기면 날카로운 날이 펴지는 칼언젠가 깡패들이 흘리고 간 거야주머니에 넣고 나니 안심이 되었어데이트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어떤 일을 앞두고 생각이 너무 많아져 피곤해지는 게 내 문제였어전 같으면 데이트고 뭐고 도망쳐버렸겠지만 오늘은 아냐사뭇 비장한 마음까지 들었어.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시익 웃어 보았어오늘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야지통통 뛰는 마음으로 은행 앞에 갔어심장이 빨리 뛰었어잠시 뒤 그녀도 버스에서 내렸어짧게 자른 머리에 푸른색이 있는 듯 없는 듯 연한 셔츠에 밑으로 갈수록 통이 좁아지는요즘 유행한다는 디스코 바지를 입은 모습이 대학생 같았어그녀는 옷에 뭐라도 묻었는지 매무새를 살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표정을 지었어귀여워라나는 아까 연습한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그녀 쪽으로 갔어그녀도 웃고는 있지만 긴장한 듯또 새 머리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그러는 자신을 들킨 게 낭패라는 듯 입술을 쪽 내밀었어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하게 표정을 바꾸며 내 쪽으로 걸어왔어또박또박자로 재듯 일정한 걸음걸이지금 나만 떨고 있는 거 아니구나그녀도 긴장을 했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어볼터치를 하고 눈화장까지 한 모습이 은행에서 보던 그녀와는 달라 보였어예뻤어. 

일찍 왔네요어제 반성 많이 했구나?” 

반성약간은 도발적인 말투가 상큼하게 느껴졌어그래그녀를 위해서라면 백 년이라도 반성하지 뭐. 

... 반성했습니다아주 많이헤헤.” 

당연히 해야죠숙녀를 그렇게 기다리게 했잖아요.” 

숙녀라...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어제는 제가 죄송했...” 

알아요그러니까 오늘 똑바로 하는지 볼게요잘 안 하기만 해 봐요화낼 테니까요.” 

그녀는 입술을 뾰족하게 하며 노려보는 척하다 너무 심했다 싶은지 내 눈치를 슬쩍 봤어난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어. 

잘할게요정말요저 인희씨에게 오늘 정말 잘하고 싶어요.” 

좋아라기대해 봐야지근데 왜 오늘 잘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되죠?” 

제가... 오늘을 너무 기다렸거든요지금까지 뭔가를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없어요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를 정도로요.” 

... 그래요사실은 저도 그랬어요근데 오늘은 책을 안 들었네요?” 

책은... 지루함을 이기려고 보는 거니까요오늘은 인희씨가 있으니 책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호호마음에 드네요주현씨 반성 진짜 많이 하셨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톤이 높으면서도 가늘어그게 귀여우면서도 성숙한 느낌을 줬어금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면 정말 저런 소리가 날 것 같았어아냐그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없어상큼청초귀여움성숙농밀애수가 조화를 이루는 목소리랄까. 

인희씨예뻐요머리도 목소리도아까부터 이 말 먼저 하고 싶었어요.” 

제 이모가 미장원 하시거든요조카의 첫 데이트 선물로 해주셨죠호호.” 

그래서 어제저녁 못 드시고 일찍 가셨군요?” 

아니거든요어젠 정말 기다렸다고요같이 영화 보려고 그랬는데.” 

영화요?” 

플래시 댄스전 작년에 봤는데또 보려고요주현씨는요?” 

전 아직 극장에 한 번도 못 가봐서...” 

정말요원시인이시네요오늘 가요그럼제가 안내하죠경험자로써호호.” 

그녀는 말끝마다 성조를 위로 올리는 습관이 있었어말끝마다 살짝 웃음이 섞이는 억양도 중독성이 있지평소 그녀 말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뭐더라맞아그거였어. <사랑과 진실>에서 원미경이 이덕화에게 하는 말투상대에게 우월감을 유지하려는 말투자길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말투당시 유행하던 똑바로하라는 말투였어때밀이 형에게 들을 땐 오금이 저리면서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 들었는데 그녀에게 들으니 낭랑한 카나리아 목소리처럼 귀엽게 들렸어어두운 회색조였던 내 세상이 갑자기 천연색으로 바뀌는 기분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어. 

인희씨저 오늘 똑바로 할게요!” 

난 그녀의 팔짱을 꼈어그녀는 조금 놀란 듯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내 팔을 밀어냈어내가 너무 나갔나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명절 아침이라 인적은 뜸하지만 여긴 그녀가 근무하는 은행 앞이잖아내가 실수한 거야시작부터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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