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22
갑작스러운 심부름을 따라가느라 그녀와 저녁도 못 먹고 터덜터덜 목욕탕으로 돌아왔어. 그녀가 화가 난 채 돌아간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신경 쓸 정신도 없었어. 나도 빨리 집에 가야 했거든. 내일 그녀를 만날 거니까. 사과는 내일 다시 제대로 하자고 생각하고 가방을 챙겼어. 봄에 가져와 지금까지 입은 여름 티셔츠 몇 개와 쓰레기통에서 주워 빨아 놓은 속옷, 바지 몇 개. 그리고 세탁소 아저씨가 손님이 안 찾아간 거라며 동생들 입히라고 주신 옷 몇 개, 그리고 덤으로 받았지만 역시 엄마랑 동생들 주려고 팔지 않고 아껴 놓았던 베지밀과 초코우유를 가방에 몰아넣고 집 가는 버스를 탔어. 명절 전날이어서 도로가 한산했어. 아홉 시 좀 넘어 집에 도착해보니 옷 공장 실밥뜯이 일을 다니는 엄마는 오늘도 야근이신지 퇴근 전이었어. 간단히 세수를 하고 동생들 데리고 엄마 마중도 할 겸 집 밖으로 나갔어. 지상에 사는 집주인들과 공통으로 쓰는 중앙현관을 나가 오른쪽으로 돌아 빌라 뒤편에 가면 네 칸짜리 야외 화장실이 있었어. 그건 지하방에 사는 사람들 용이야. 화장실이 네 칸인 건 사연이 있어. 빌라에는 여덟 가구가 사는데 각각 연탄 광으로 쓸 지하창고가 하나씩 배정되어있었지. 근데 지하를 굳이 연탄광으로 쓸 필요가 있나? 연탄을 세대 현관 옆 계단에 쌓아놓으면 되잖아. 그럼 지하를 방으로 꾸며 세를 줄 수도 있거든. 근데 지하방에 화장실을 만들 공간이 없는 거야. 결국 건물 뒤에 야외 화장실을 만든 거지.
아침이면 화장실이 전쟁이었어. 휴지를 들고 줄 서는 풍경이 매일 반복되었지. 내게는 좋은 점도 있었어. 휴지가 필요 없는 거야. 다른 사람이 닦고 버린 휴지를 요령 있게 접으면 한 번 더 닦을 수 있거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 식구는 그렇게 했어. 우리 집은 화장실에서 가장 멀었어. 그게 고역이야. 겨울밤에 오줌이라도 누려면 옷을 다 입고 종종걸음으로 뛰어가야 하거든. 그래서 화장실 가까운 출구에 사는 집은 그걸 나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어. 그런데 며칠 전 태풍으로 큰 비가 온 거야.(84년 한강 홍수) 그때 화장실이 넘쳤대. 그 바람에 가까운 집에 똥물이 들어간 거야. 동생들 말 들어보니 아주 난리였대. 홍수가 끝났는데도 화장실 출입문이며 벽은 아직 누런 똥물의 흔적이 남아있었어. 화장실 옆에는 남루한 비닐에 덮인 채 쇠기둥에 묶여 있는 리어카가 하나 있었어. 비닐을 살짝 벗겨 잘 있는지 확인했어. 우리 꺼 거든.
작년, 어머니는 이삿짐을 풀자마자 중고 호떡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시작하셨어. 설이 지난 뒤였지만 아직은 한 겨울이라 처음엔 그럭저럭 되는 듯했어. 어떤 날은 만 오천 원어치를 팔기도 했어. 그러면 오천 원이 순수입으로 남는 거야. 하루에 오천 원이면 한 달이면 십오만 원이잖아. 당시 고향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께 내가 썼던 편지를 보면 <어머니는 호떡 파시고 제가 신문 배달을 하게 되었으니 한 달에 쌀 네 가마 값을 벌 수 있다>고 쓰여 있어. 그 편지를 보시고 외할아버지는 일 년이면 쌀 오십 가마를 버는데, 우리가 곧 부자가 될 거라고 안심하셨대.
그런데 따뜻해지면 호떡이 안 팔린다는 걸 몰랐네? 호떡을 반도 못 팔고 반죽이 시큼하게 쉬어 버리는 날이 잦았어. 결국 어머닌 호떡을 포기하셨어. 문제는 그 무렵에는 호떡 리어카를 누구도 사지 않는다는 거야. 나중에 계산해 보니 리어카 구입비용도 못 건진 상태였어. 결국 지물포에 가서 비닐을 끊어다 꽁꽁 싸 묶어 놓고 겨울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어. 집주인 표정이 안 좋았지만 할 수 있나? 엄마가 사정을 했지. 살려달라고.
지하 방이다 보니 주소를 쓸 때는 방 호수 앞에 B를 붙여야 해. ㅇㅇ연립 B203호라고 써야 하는 거지. B는 지하를 의미하는 거야. 당시엔 학교에 가정환경조사서를 냈잖아. 주소에 지하 방이라고 표시하는 게 싫은 거야. 지하에 산다는 건 가난하다는 거니까. 같은 반 아이들 주소록을 보니 B가 들어가는 아이는 나뿐이더라고. 내 형편을 친구들이 아는 게 부끄러웠어. 그래서 B를 빼놓고 적었지. 같은 서울 변두리여도 빈부의 차이는 커서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살림살이를 보고 놀라곤 했어. 전축, 칼라 TV는 물론이고 어떤 친구 집에는 자가용도 있었거든. 난 특히 친구들 집에 초인종 달린 대문이 부러웠어. 지하방 출입문은 잠금장치도 없이 그냥 보통 집 방문처럼 생겼거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한 평 남짓한 부엌이 있었어. 거기엔 연탄 두 장이 들어가는 아궁이가 있고 석유곤로와 몇 개의 그릇과 냄비가 전부야.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 평 정도의 방이 나오는데 장롱이 하나 있고 시골에서 싣고 온 쌀가마니가 쌓여있었어. 그렇다 보니 방은 엄마와 나, 두 동생이 누우면 꽉 찼어. 그런 집을 보여주기 싫었어. 바로 옆 골목에서 호떡을 파는 엄마도, 연탄을 갈고 연탄재를 빌라 길 건너 쓰레기통에 버리러 가는 길도 들키기 싫었어. 학교 친구들은 내가 사는 곳을 꽤나 궁금해했지만 그냥 어디 멀리 사는 척 거짓말을 했어. 그러나 그런 속임은 오래 못 가게 마련이지? 어느 날, 내가 지하에 사는 걸 들키는 일이 일어났거든.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지하에 살던 집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어. 지하방은 좁고 습해서 더위도 일찍 오잖아. 그래서 다들 출입문을 반 씩 열어놓고 살았거든. 어느 날 내가 세수를 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컸는지 다른 방에 들렸나 봐. 옆 집 아저씨가 엄마에게 화를 냈어. 연탄창고를 개조한 방이라 방음도 안 되는 데다 내가 어푸어푸 요란한 세수를 한 게 원인이었어. 그 상황에서 엄마는 내 편을 드느라 조금은 무리한 언쟁을 했지. 목소리가 커졌고 급기야는 지상층에 살던 집주인들까지 내려올 정도로 다툼이 확대되었어. 그때 어른들을 따라온 아이 중 우리 반 아이가 있었던 거야. 그 아이는 옆방 주인집 아이였어. 아이고, 이걸 어째! 난감하더라.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더니 금세 언 것처럼 굳어지는 거야. 우리 방의 주인아주머니는 상황을 대충 듣더니 낮은 목소리로 엄마를 나무랐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집에서 세를 얻어 살려면 애들을 조심시켜야지 이런 일이 생기면 앞으로는 세를 못 준다는 내용이었어. 그런데 집주인 아주머니의 그 위엄 있는 말투가 내가 듣기에는 돈 많은 집 사모님이 식모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어. 그 집 아이들이 나보다 어렸으니 그 아주머니도 엄마보다 아래였을 텐데 반말 투의 훈계였거든. 주인아주머니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세를 여럿 줘 봤는데 특히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 이번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사정이 딱해 방을 준 거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일으키면 되겠느냐'고 했어.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하셨어. 방 안에서 그 대화를 듣던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어. 특히 '시골에서 온'이라는 표현 때문에. 지금도 그 아주머니의 말투가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상처가 되었나 봐. 소음을 일으킨 당사자였으면서도 난 정작 밖으로 못 나갔어. 죄송하다고,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하면 상황이 쉬워질 텐데. 밖에 우리 반 아이가 있어서였을까, 아주머니 말대로 시골에서 온 게 부끄러워서였을까. 중3이었으니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난 왜 숨어만 있었을까. 그 뒤로 어머니는 내가 세수를 할 때마다 조용히 씻으라고 잔소리를 하셨어. 엄마 목소리에는 약간의 신경질이 포함되어 있었어. 나 때문에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들으셔서 그랬겠지. 이번 일로 밉보였으니 계약이 끝나면 이사 가라고 할까 봐 걱정되셨을 거야. 주인아주머니가 더 싫어졌어. 주인집 아이는 나보다 몇 살 어린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어. 그 아이는 나를 잘 따랐어. 그런데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아이와 맞닥뜨려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안 줬어. 한 번은 그 집 아이가 과자를 준 적이 있어. 그걸 먹기는커녕 밟아버리고 욕이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하지만 그랬다간 큰일 나잖아.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괜찮다, 형은 과자 안 먹는다고 말하고 안 받았어. 아이에게 화를 내면 그 아이 엄마가 어머니에게 또 뭐라 할까 봐. 그런데 아이가 자꾸 권하는 거야. 심지어 입에 넣어주려고 하더라고. 혀끝에 달콤한 과자 맛이 느껴졌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안 먹었어. 그러자 내 동생에게 과자를 주더라? 난 동생에게도 못 먹게 했어. 주인집 아이는 실망한 표정을 했고 그 뒤로 서먹해졌어.
주소를 쓸 때 지하를 의미하는 'B'를 빼놓고 썼다고 했지? 그렇다 보니 학교에서 보내오는 우편물들이 지하방 우편함으로 안 오고 주인집 우편함으로 배달된 거야. 그땐 성적표를 우편으로 보냈잖아. 집주인 아주머니가 하필이면 그걸 보셨나 봐.
“그래, 지금은 비록 지하방에 살더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담에 느이 엄마 잘 모셔라.”
그 말을 듣는데 괜히 뜻 모를 저항감이 벌떡 일어나는 거야. 아주머니가 울 엄마에게 했던 말투가 다시 떠올라서.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덕담도 고마운 거고. 그런데 내 마음이 그렇게 옹졸해지더라니까? 내가 그때 얼마나 조잔했는지 몰라. 왜 그랬을까? 주인집 아이가 날 생각해서 건네는 맛있는 과자를 그냥 받아먹어도 되잖아. 내가 안 먹더라도 받아서 동생을 줘도 되고. 그런데 차갑게 거절을 했어. 덕담을 고마운 마음으로 들었으면 예의 바른 학생이라는 칭찬이라도 들었을 거야. 근데 난 참 미숙했어. 그저 뻣뻣하게 나가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은행의 그녀가 나보다 좋은 집에 사는 걸 비교하면서 초라하게 느끼는 마음도 마찬가지야. 나 보다 잘 사는 그녀를 통해 나의 가난한 현재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운 거지. 그래서 아예 그 상황을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려는 마음. 그게 가난인 걸 목욕탕에 와서야 얼핏 알 거 같았어.
목욕탕에 가기 전 내 일상은 4시에 일어나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한 아름 받아 배달하고 아침 먹고 중학교에 가는 거야. 갔다 오면 저녁 해 먹고 엄마의 호떡 장사를 도우러 나가지. 양말을 두 개 신어도 발이 시렸어. 그렇게 동동거리다 장사가 끝나면 리어카를 끌어다 반지하방 입구에 묶어 놓았지. 리어카 끌고 가다 보면 또래 아이들을 만나게 되잖아. 그냥 고개 숙이고 못 본 척하는 거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욕탕에서 몇 달 일하고 온 지금은 굳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어. 목욕탕 일도 하는데 그깟 호떡 파는 일은 아무렇지 않은 거야. 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미움도 별로 안 남았어.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집주인 아주머니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우스워졌어. 돈 버는 이유가 한낱 복수심 때문이라니. 부모님 원수를 갚으려고 평생 무술 연마하는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거야. 복수만 꿈꾸는 사람에게 자기 삶이 있겠어? 그렇게 우스운 삶을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변화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서 온 거야.
퇴근하는 엄마를 만나 돌아오는 길에 계란과 돼지고기를 사 왔어. 푹 잤고 다음 날 모처럼 가족이 모여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어. 엄마에게 드린 그 달 월급은 다른 달과 달리 만원이 모자랐어. 죄송하지만, 오늘 데이트에 써야 하거든. 두 사람 버스비와 입장료도 내야 하고 솜사탕도 하나는 먹어야지. 점심으로 돈가스, 저녁으로 자장이라도 먹어야 해. 혹시 서점에 가게 되면 시집도 한 권 사 주고 싶었어. 그럼 만 원은 필요할 것 같았어. 그렇다고 만 원만 가져갈 수는 없지. 오천 원을 더 넣었어. 그래, 만 오천 원이면 좀 든든할 것 같았어. 택시를 탈지도 모르니까. 엄마가 왜 만 윈이 적냐고 물었어. 용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어.
“너 혹시 돈 쓰고 돌아댕기는 거 아니지? 니가 돈 번다고 사달라고 쫓아오는 친구 조심해라.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돈 모을 생각을 해.”
“아냐. 내 친구는 그런 사람 아냐. 내가 더 얻어먹는걸.”
“친구? 햐, 서울 놈들이 어떤 줄 알어? 다 니 돈 빼먹을라고 덤벼들지. 친구 쫓아댕기지 말구 착실히 돈 모을 생각을 해야지.”
오늘 내가 그녀를 만나 돈을 쓸 거라는 걸 엄마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잠시 아득했어. 엄마 보시기에 나는 위태롭고 철없는 아이였어. 그래도 오늘은 할 수 없어. 월급을 다 못 드린 건 아쉽지만, 오늘만 눈 딱 감고 엄마를 속이기로 했어. 어쩌면 나에게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일 수도 있거든. 그녀에게 확실한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어.
목욕탕으로 돌아와 세탁소 아저씨에게 얻은 기지 바지와 셔츠를 갈아입었어. 처음 받을 땐 딱 맞았는데 그 사이 살이 빠졌는지 헐렁해서 허리띠를 맸어. 거울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게 지금 뭐야. 추석이라 엄마도 쉬는데 집에 안 있고 여자나 만나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라니. 내가 오늘도 일하는 줄 알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배웅하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어. 아냐, 오늘만은. 그녀를 만나야겠어. 엄마, 죄송해요. 안 잘라서 덥수룩해진 머리를 대충 빗고 나가려다 잠시 멈칫했어.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불량배를 만나면 어떡하지? 뒷골목 쏘다닐 때 보니 불량배들은 어디에나 있던데. 아무 여자나 희롱하고 기분 나쁜 추파도 보내잖아.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희롱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나 혼자라면 맞거나 뺏기거나 도망이라도 가겠지만 그녀는... 난 사물함을 뒤적거려 잭나이프를 챙겼어. 접으면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지만 손목을 살짝 튕기면 날카로운 날이 펴지는 칼. 언젠가 깡패들이 흘리고 간 거야. 주머니에 넣고 나니 안심이 되었어. 데이트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어떤 일을 앞두고 생각이 너무 많아져 피곤해지는 게 내 문제였어. 전 같으면 데이트고 뭐고 도망쳐버렸겠지만 오늘은 아냐. 사뭇 비장한 마음까지 들었어.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시익 웃어 보았어. 오늘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야지. 통통 뛰는 마음으로 은행 앞에 갔어. 심장이 빨리 뛰었어. 잠시 뒤 그녀도 버스에서 내렸어. 짧게 자른 머리에 푸른색이 있는 듯 없는 듯 연한 셔츠에 밑으로 갈수록 통이 좁아지는, 요즘 유행한다는 디스코 바지를 입은 모습이 대학생 같았어. 그녀는 옷에 뭐라도 묻었는지 매무새를 살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표정을 지었어. 귀여워라. 나는 아까 연습한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그녀 쪽으로 갔어. 그녀도 웃고는 있지만 긴장한 듯, 또 새 머리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그러는 자신을 들킨 게 낭패라는 듯 입술을 쪽 내밀었어.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하게 표정을 바꾸며 내 쪽으로 걸어왔어. 또박또박. 자로 재듯 일정한 걸음걸이. 아, 지금 나만 떨고 있는 거 아니구나. 그녀도 긴장을 했다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어. 볼터치를 하고 눈화장까지 한 모습이 은행에서 보던 그녀와는 달라 보였어. 예뻤어.
“어? 일찍 왔네요? 어제 반성 많이 했구나?”
반성? 약간은 도발적인 말투가 상큼하게 느껴졌어. 그래, 그녀를 위해서라면 백 년이라도 반성하지 뭐.
“아, 네... 반성했습니다. 아주 많이. 헤헤.”
“당연히 해야죠, 숙녀를 그렇게 기다리게 했잖아요.”
흠, 숙녀라...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네, 어제는 제가 죄송했...”
“알아요. 그러니까 오늘 똑바로 하는지 볼게요. 잘 안 하기만 해 봐요. 화낼 테니까요.”
그녀는 입술을 뾰족하게 하며 노려보는 척하다 너무 심했다 싶은지 내 눈치를 슬쩍 봤어. 난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어.
“네, 잘할게요. 정말요. 저 인희씨에게 오늘 정말 잘하고 싶어요.”
“아, 좋아라. 기대해 봐야지? 근데 왜 오늘 잘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되죠?”
“제가... 오늘을 너무 기다렸거든요. 지금까지 뭔가를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없어요.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를 정도로요.”
“흠... 그래요?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근데 오늘은 책을 안 들었네요?”
“네, 책은... 지루함을 이기려고 보는 거니까요. 오늘은 인희씨가 있으니 책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호호. 마음에 드네요. 주현씨 반성 진짜 많이 하셨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톤이 높으면서도 가늘어. 그게 귀여우면서도 성숙한 느낌을 줬어. 금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면 정말 저런 소리가 날 것 같았어. 아냐, 그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없어. 상큼, 청초, 귀여움, 성숙, 농밀, 애수가 조화를 이루는 목소리랄까.
“인희씨, 예뻐요. 머리도 목소리도. 아까부터 이 말 먼저 하고 싶었어요.”
“아, 제 이모가 미장원 하시거든요. 조카의 첫 데이트 선물로 해주셨죠. 호호.”
“아, 그래서 어제저녁 못 드시고 일찍 가셨군요?”
“땡! 아니거든요. 어젠 정말 기다렸다고요. 같이 영화 보려고 그랬는데.”
“영화요?”
“네, 플래시 댄스. 전 작년에 봤는데. 또 보려고요. 주현씨는요?”
“아, 전 아직 극장에 한 번도 못 가봐서...”
“정말요? 원시인이시네요. 오늘 가요, 그럼. 제가 안내하죠. 경험자로써. 호호.”
그녀는 말끝마다 성조를 위로 올리는 습관이 있었어. 말끝마다 살짝 웃음이 섞이는 억양도 중독성이 있지. 평소 그녀 말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뭐더라? 맞아. 그거였어. <사랑과 진실>에서 원미경이 이덕화에게 하는 말투. 상대에게 우월감을 유지하려는 말투. 자길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말투. 당시 유행하던 ‘똑바로’하라는 말투였어. 때밀이 형에게 들을 땐 오금이 저리면서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 들었는데 그녀에게 들으니 낭랑한 카나리아 목소리처럼 귀엽게 들렸어. 어두운 회색조였던 내 세상이 갑자기 천연색으로 바뀌는 기분.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어.
“네, 인희씨. 저 오늘 똑바로 할게요!”
난 그녀의 팔짱을 꼈어. 그녀는 조금 놀란 듯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내 팔을 밀어냈어. 내가 너무 나갔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 명절 아침이라 인적은 뜸하지만 여긴 그녀가 근무하는 은행 앞이잖아. 내가 실수한 거야. 아, 시작부터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