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23
버스를 타고 반시간쯤 달려 도착한 어린이 공원엔 이미 젊은이들이 많았어. 여자들은 그녀보다 예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남자들은 하나같이 멋있어 보였어. 유행하는 옷에 깔끔한 신발을 보자 난 또 기가 죽었어. 그걸 그녀가 알아채면 안 돼. 난 일부러 가슴을 내밀고 어깨를 세워 뽐내듯 걸었어. 아침부터 햇살이 강했어. 양산이 없으니 공원 입구 노점상에게 부채를 사서 그녀에게 건넸어. 어린이 대공원은 작년 중3 때 소풍을 왔던 곳이라서 대충 눈에 익었어. 우린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숲 근처 산책길을 따라 걸었어. 아직 신록이 찬란했어. 누군가가 어젯밤에 세상의 멋진 나무와 꽃들을 모아다 우리가 걷는 길목에 늘어놓은 건 아닐까. 걷다가 벤치를 만나면 앉아서 얘기를 하다가, 또 걸으며 얘기하기를 얼마쯤 했을까, 날이 더워지고 그녀 이마에 땀이 맺혔어. 그녀가 핸드백에서 우윳빛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어. 그때 얼핏 보니 가방에 부채가 들어 있는 거야. 더울 줄 알고 미리 챙겼나 봐. 근데 난 그것도 모르고 싸구려 부채를 사줬으니.
“부채 있네? 전 그것도 모르고. 이건 저 주시고 저거 쓰시죠? 더 좋은 거 같은데...”
“싫어요. 주현씨가 사 준 걸 쓸래요. 이건 특별한 거니까.”
아, 어쩌면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그녀의 모든 말들이 꿀에 절인 듯 달달했어.
“고마워요. 좋은 말만 해 주셔서. 이상해요. 인희씨는 저로 하여금 멋진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후훗. 그럼 멋진 남자가 되세요. 기대해야지.”
“네, 그래 보려고요. 그러면 절 좋아해 줄 거죠?”
점심때가 지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책과 이야기를 나눴어. 드라마 이야기, 책 이야기, 그녀의 친구들 이야기. 배고픈 줄도 몰랐어. 하지만 내 생각만 할 수 있나? 그녀가 몇 번 가 본 빵집이 근처에 있다고 했어. 빵? 그게 밥이 되나.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날이니까. 난 제과점이라는 곳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 슈퍼에서 파는 빵과는 뭔가 다른 걸 팔 거라고는 생각했지. 고급스러움으로 부러움을 자극해 사람을 유혹하는 곳 말야. 비쌀 것 같아 엄두를 못 내던 곳인데. 그녀 덕분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어.
“제가 맛있는 걸 골라 사드리고 싶은데 제과점이 처음이에요. 이번만 인희씨가 도와주세요.”
“아, 주현씨, 빵 싫어하는구나. 그럼 다른 데 갈 걸.”
그녀는 마치 실수라도 한 양 미안해했어.
“아뇨, 저도 빵 좋아해요. 좋아할 거예요.”
그럼. 좋아하고말고. 단지 빵은 밥처럼 집에서 만들 수 없어서 못 먹었을 뿐이야. 내가 돈을 벌면 빵이며 과일을 바구니 가득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오가며 맘껏 먹는 풍경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우리는 곰보빵과 채소 넣은 튀김 빵, 밀크셰이크, 슈크림 케이크를 먹었어. 고작 빵 몇 개와 우유 두 잔 값이 어지간한 식당보다 비쌌어.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 어떻게 빵 값이 이렇게 비쌀 수 있지? 쌀 한 말이면 밀가루를 몇 부대를 살 수 있는데... 도대체 서울이란 곳은 싼 것과 비싼 것의 경계를 종잡을 수가 없었어. 한 방 맞은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제과점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는데 그녀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어. 그걸 타고 그녀 동네 근처 극장으로 갔어. 플래시 댄스와 고래사냥이 동시 상영되고 있었어. 명절이라서 사람이 많은지 줄을 서 있었어. 플래시 댄스? 그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으면 두 번이나 볼까. 그런 것도 난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어. 두 번 보면 돈을 두 번 내야 하잖아. 그 돈이면 버스 토큰이 몇 개야? 영화가 한 차례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갔어. 이제 우리 차례가 되어 극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인희야!”
두 명의 아가씨가 다가왔어.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 잠시만요, 하고 그녀들에게 갔어. 그녀들은 나를 흘깃거리며 그녀에게 뭔가를 따져 묻는 것 같았고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열심히 부인하는 것 같았어. 중간중간 그녀도 내 쪽을 보며 무안한 표정이고. 나와 같이 있는 걸 친구들에게 들켜서 민망한 상황은 아닌지 걱정됐어.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차례가 되었어. 그녀가 안 오면 다음 회 상영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재촉하지 않았어. 오늘은 그녀의 날이니까. 그녀가 내 쪽으로 오려고 몸을 돌렸어. 그러자 친구들이 그녀를 붙잡으며 뭐라고 말하면서 까르르 웃었어.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뭐라고 대꾸를 하더니 내 쪽으로 왔어. 다행히 맨 뒤에 들어간 우린 뒷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 곧바로 불이 꺼지더니 애국가가 나오고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어.
“인희씨 친구들이세요?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
“동네 친구들이에요. 딱 걸렸죠, 뭐.”
“괜찮아요? 혹시 곤란해지는 거...”
“못 본 척해줄 테니 이따 저녁 사라고 협박하잖아요. 근데 주현씨 오늘 늦게 가도 돼요?”
“그럼요. 오늘 아예 안 가도 됩니다. 헤헤.”
“진짜죠? 그럼 잠깐만요.”
그녀는 핸드백을 던지듯 맡기더니 후다닥 나갔다 잠시 뒤 들어왔어.
“이따 저녁 먹자고 했어요. 주현씨도 같이 와야 한다고 난린데, 괜찮죠?”
나도 그녀 친구들이 궁금했어.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또 얼마나 빛날까. 애국가가 끝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어. 그녀가 내 손을 슬쩍 잡더니 끌어다 자기 무릎에 올려놓더니 자기 손을 포갰어. 그 뒤로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 안 나. 손을 잡아서였나? 그렇기도 해. 영화를 보면서 그녀 무릎이 움직일 때마다 그 진동이 내게는 파도로 몰려왔어. 갓 핀 수국이 떠올랐어. 고향집 장독대 앞에 무더기로 피던 수국. 봉오리로 한참을 버티며 필 듯 말 듯 애 태우다 어느 날 아침에 가 보면 환하게 피어 놀라게 하던 수국. 그 꽃을 잘라 사이다 병에 꽂으면 어머니가 한 마디 하셨지. 사내 새끼가 뭔 꽃을 그렇게 좋아하냐고. 그녀 손 아래에 있던 내 손을 살짝 뺐어. 그리고 그녀 손이 너무 덥지 않게 조심해서 잡았어. 내 손이 놓여있던 그녀의 무릎 느낌도 기억 나. 그녀의 피가 내 손을 타고 넘어와 온몸을 빠르게 휘몰아치는 것 같았거든.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그녀를 향해 넘실거렸어. 조용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옅은 숨소리가 백만 배 확대되어 들렸던가. 뭔가 은밀하고 농염한 느낌이었어. 나는 가만있고 싶은데 자꾸 달떴어. 아, 이 뜨거움을 어쩌지. 북극의 얼음을 모두 가져와도 식을 것 같지 않은 이 욕정을. 연출된 영화 속 사랑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그날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어. 이래서 안나 까레니나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제 몸을 산산조각 냈을까. 그렇게라도 식혀 보려고. 그래서 또 테레자는, 쏘냐는 또 그렇게 울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