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 24
하지만 손을 잡아서 좋은 건 잠시. 그녀 친구들과 저녁 먹을 생각을 하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친구로 선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야. 그녀 친구들이 앞으로 두고두고 내 이야기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그녀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그녀들은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로 괜찮다고 생각해줄까? 혹시 내 싼 옷차림과 고등학교도 못 간 교양 수준을 흉보지는 않을까...
그런데 진짜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어. 아침에 만 오천 원을 준비해 왔는데 제과점과 극장에서 쓰고 나니 그녀와 돈가스를 먹으면 딱 맞을 돈밖에 안 남았어. 버스비가 안 남으면 걸어가면 되지만 그녀 친구들의 저녁까지 살 돈은 안 되는데 어쩌지? 오천 원, 아니 만원은 더 가져왔어야 하는데 이거 큰일이네. 그녀에게 말을 해 볼까. 아냐, 첫 데이트인데 남자가 돈 떨어졌다는 말을 어떻게 해? 아니지. 왜 말 못 해? 말할 수 있지. 오늘 쓴 돈만 해도 내 월급의 사분의 일이야. 그걸로 쌀을 사면 몇 말을 살 수 있다고. 나로선 이미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고를 했어. 당당해도 돼. 아냐, 아냐... 그래도 남자가 돈 없단 말을 어떻게 해? 그래도 해야 해. 나중에 진짜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을 하자. 창피하더라도 지금은 그게 최선이야. 아, 내가 만원만 더 가져왔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난 왜 이렇게 조잔한 인간일까. 정해진 테두리를 못 넘어. 영화 보는 내내 참담했지만 어쩔 수 있나, 사실대로 말하자고 결론 내렸어. 인희씨... 죄송하지만 친구 분들에게 저녁 살 돈이 지금은 없어요... 인희씨가 대신 내주신다면 다음에 더 훌륭한 저녁으로 보답하고 싶은데 한번 만 봐주시겠...
하지만 막상 그 말은 못 했어.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고 있었거든. 얼결에 우리도 인파에 휩쓸려 나오자마자 바로 입구에서 기다리던 그녀 친구들과 맞닥뜨린 거야. 나와 그녀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그녀는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몇 발짝 앞서 횡단보도를 건너더니 바로 지하로 들어가는 거야. 목신의 오후라는 경양식집이었어. 나는 한 번도 못 가 본 곳. 함박스테이크, 비후가스 같이 비싼 걸 파는 곳. 이거 큰일 났네. 그녀에게 돈 없단 말을 아직 못 했는데.
하지만 그녀들은 이곳이 익숙한 것 같았어. 그녀와 친구들은 양장본 표지를 한 메뉴판을 받자마자 익숙한 듯 휘리릭 넘기더니 하나같이 함박스테이크를 시켰어. 난 그녀들의 눈을 피해 가격을 재빨리 살폈어. 돈가스와 오므라이스가 그중 싸 보였어. 그녀들과 너무 다른 걸 시키면 이상할 것 같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없었어. 제일 싼 오므라이스를 주문했어. 웨이터가 음료나 칵테일은 안 하시겠냐고 물었어. 그녀들은 그것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블루스카이, 키스 오브 파이어 같은 말이 나왔어. 난 그중 싼 맥주를 시켰어. 그녀의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나와 그녀를 두고 적당히 놀리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말을 했어. 잠시 뒤 오묵한 접시에 수프가 나왔어. 그런데 세 개뿐이야. 그녀들이 후추와 소금을 뿌려 호로록 다 먹도록 난 안 줘. 그래서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물었어. 그랬더니 웨이터 대신 그녀 친구 중 하나가 말했어.
“수프 안 나오는데...?”
“네?”
“오므라이스 시키셨잖아요.”
친구가 피식 웃는 것 같았어. 그녀도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어. 내가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몰라. 뭔지 모를 굴욕감 같은 게 휙 지나갔어. 면박당하는 기분이었어. 촌스러움과 무식이 탄로 난 기분이었어.
“아하, 오므라이스는 수프를 안 주는구나. 몰랐네요. 어쩐지 싸더라...헤헤.”
민망함을 감춰보려고 억지로 웃어보았어. 이러면 상황이 유머로 바뀔까. 그럴 거 같지 않았어. 아, 난감하네. 그녀가 나 대신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나섰어.
“주현씨, 레스토랑도 처음이에요? 얘들아, 우리 주현씨가 오늘 처음 하는 게 많단다.”
그녀가 나를 변명해주듯 웃었어.
“네, TV에서만... 봤습니다. 헤헤.”
“얘들아, 봤지? 주현씨는 극장도 오늘 처음 간 거래.”
친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어.
“사실은 점심 먹은 제과점도요. 헤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러자 친구들도 살짝 웃음을 뗬어.
"주현씨, 산속에서 도 닦다 오셨죠? 아니면 절에서 탈출?"
“주현씨가 강원도 사람이거든. 서울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자 친구가 그녀 말을 가로막았어.
“강원도에도 레스토랑 있을 거 아냐. 그렇죠, 주현씨?”
“네, 원주에 나가면 있을 겁니다. 근데 제가 못 나가봐서...”
“정말요? 졸업식이나 생일 그럴 때는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집에서 미역국에 밥 먹을 때도 있고...”
“아, 그게 더 맛있겠네요. 이깟 함박스테이크보다 엄마 정성 들어간 미역국이 진짜죠.”
그녀들이 급하게 내 편들어주려고 애썼어. 그런데 묘하게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어. 위로의 색깔은 분명해 보이는데 위로로 들리지 않는 기분. 나는 잘 모르지만 그녀들은 분명히 느끼는, 중산층들만의 공감대가 이 함박스테이크와 칵테일에는 있는 것 같았어. 풍요를 경험한 사람들만의 공감대랄까. 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비싼 걸 먹어 본 사람들만 느끼는 여유로움. 나처럼 상상만 하던 사람에겐 평생 목표인 이런 레스토랑을 저들은 생일이나 졸업식이면 쉽게 이용할 수 있잖아. 이런 걸 일상으로 향유하면서도 이 정도 쓰는 건 별 거 아니라는 자신감. 자연스레 풍기는 만만함. 인희씨도 그 정서에 익숙하겠지. 부럽다. 이런 곳을 얼마나 많이 다니면 나도 그녀만큼 적응이 될까. 돈은 어디서 나지? 설령 많이 다닌다고 해도 내가 적응할 수는 있을까. 안 돼도 어쩌겠어. 그렇다고 뛰쳐나갈 수는 없잖아. 그녀는 어쩌고? 오늘은 여기 있으니까 이 상황에 충실하자 생각했어. 내가 더 이상 말을 못 하자 그녀도 친구들도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기 뭣 했는지 그 이야기는 유야무야 되었어. 대화 주제는 이내 그녀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 현재 만나는 남자, 교회 오빠들 주제로 바뀌어갔어. 나는 알 수도 없고 짐작하기도 어려운 내용들. 말을 섞어서 친근함을 키워보고 싶었지만 모르니 끼어들 수가 있나.
가만 앉아 대화를 들으며 웃긴 내용이면 같이 웃는 척이나 하고 있는데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화장실이 가고 싶었어.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보니 그 레스토랑은 보통 경양식집이 아니라. 꽤 고급스러운 곳이야. 넓은 공간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는데 옆 칸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살짝 보일 정도의 높이였어. 테이블도 수십 개나 있고 홀 정면에는 LP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DJ 박스도 있었어. 그 구석에 통기타도 있는 걸 보니 노래도 하는 모양이었어. 기타를 보니 작년에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던 생각이 났어. 맥주도 한 잔 했겠다,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 손님도 우리 밖에 없겠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저 기타 좀 쳐도 되냐고 물어봤어. 웨이터는 나를 슬쩍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장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어. 손님 오기 전에 한 곡만 하래. F.R. 데이비드의 WORDS를 불러야지. 웨이터가 마이크를 켜고 아아, 테스트를 했어. 그 소리를 들은 그녀와 친구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어. 내가 기타를 들고 튜닝을 했어. 그녀 눈이 동그래졌어. 난 마이크에 대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어.
“저... 인희씨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내가 기타를 친다는 걸 몰랐던 그녀는 잠시 놀라는 것 같더니 이내 양손을 깍지 껴 턱을 괴고 웃으며 끄덕였어. 친구들도 의외라는 반응이었어.
"오늘... 인희씨와 친구분들 덕분에 좋은 경험 했어요.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불러주려고 목욕탕 청소할 때마다 연습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기타까지 치면서 부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 터라 첫 음 잡는데 시간이 걸렸어. 원래 F.R. David는 D코드로 부르거든. 팝송 책에도 그렇게 나와. 그래서 나도 D코드로 시작하려고 보니 첫음이 너무 높은 거야. 그래서 이리저리 바꾸다가 F로 조를 바꿔 불렀어. 원곡은 약간 빠른 리듬인데 원곡처럼 경쾌할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조금 느린 블루스 풍으로 했어. 전주가 시작되자 그녀 친구 중 한 사람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고 다른 친구는 오빠!라고 외쳐주었어. 그러자 인희씨가 그녀들에게 니들 조용히 하라고, 주먹을 쥐어 보였어. 어쩜 저렇게 귀엽게 주먹을 쥘까.
Well I'm just a music man
Melodies are so far my best friend
But my words are coming out wrong then I
I reveal my heart to you and
Hope that you believe it's true cause words...
멜로디는 잘 떠오르는데 사랑을 표현할 노랫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야말로. 내 마음과 같았어. 책을 봐도 내가 좋아하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제대로 묘사하는 문장을 찾을 수 없었어. 톨스토이도 밀란 쿤데라도 그녀를 위한 문장은 남겨놓지 못했어. 내가 지금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다면. 그걸 안다면, 영혼이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데.
노래가 끝나자 그녀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며 앙코르를 외쳤어. 그녀는 친구들의 호들갑을 막느라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나를 향해 웃었어. 웨이터는 한 곡만 하라고 했으니까 내려가려는데 옆에서 노래를 듣던 사람이 와서 오늘 추석이라 DJ가 안 나오니까 나더러 더 하고 싶으면 해도 된대. 못할 거 있나? 두 번째로 한 노래는 당시 라디오에서도 자주 나오고 작년에 친구들과 자주 부르던 리처드 샌더슨의 ‘리얼리티’였어.
Met you by surprise,
I didn't realize
that my life would change forever
Saw you standing there,
I didn't know I cared
there was something special in the air
노래를 하면서 그녀를 봤어. 그녀는 이 노랫말 의미를 알겠지. 그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을 만나서 내 삶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이토록 특별한 사람일 줄 몰랐어요... 그 노래 말고도 몇 곡 더 했어. 다행히 그녀는 싫지 않아 했어.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어. 난 기타를 내려놓고 사장에게 가서, 사실 내가 친구들에게 갑자기 저녁을 사야 했는데 돈이 모자란다... 한번만 믿어주시고 보내주시면 내일 점심 전에 돈을 가져와 갚겠다고 진지하게 부탁을 드렸어. 사장은 의외로 선뜻 알겠다며 대신 전화번호를 적게 했어. 다행이었어. 그 사이에 친구들은 먼저들 가고 그녀가 출입문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을 잡았어.
"고마워요, 주현씨."
지하 계단을 두 세 개쯤 올라왔을까. 앞서 올라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며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