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욕탕 뽀이 이야기 -25
내가 노래하는 동안 칵테일을 여러 잔 마셔서일까, 그녀가 내게 쏟아지듯 얹혔어. 아무 대비 없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그녀를 받쳐내지 못하고 휘청, 계단 아래로 뒷걸음질 치며 벽에 부딪혔지. 이런 숙맥 좀 봐. 이런 순간에야말로 든든하게 그녀를 지탱해야 하잖아. 근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꼴이라니. 아, 오늘 참 안 된다. 이런 나를 무엇에 쓸까. 그녀도 놀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어. 술냄새가 훅 끼쳤어.
“아오, 뭐예요. 지금? 분위기 깨지게! 남자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 죄송해요.... 갑자기... 그래서... 그럼 다시 한번... 헤헤.”
“다시 한번? 완전 선수네. 선수 맞죠?”
그녀는 입술 끝을 동그랗게 말며 째려봤어. 귀여웠어. 어둠 속에서도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어. 자기가 취했다는 생각을 아직 못하는 것 같았어.
“주현씨가 물어내요. 이게 뭐야. 난 진짜 처음이었다구요.”
“엥? 그럼 전 뭐... 처, 처음 아닌 줄... 아십니..?”
“처음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요. 중국집 배달하는 그 친구도 연애한다면서요.”
“그, 그래도 전...”
“허이구,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시네. 편지 쓰는 거 보면 모를 줄 알고? 그리고 아까 그 노래들, 도대체 몇 명한테 불러줬어요? 다리를 척 꼬고...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던데.”
“그게... 원래 기타 칠 땐 그래야 되거든요. 인희씨한테 불러드리려고 전부터...”
“그래요? 나 위해서 그 많은 노랠 연습 했다? 요 며칠 사이에? 그걸 믿으라고요? 점점 수상하네. 내 눈 똑바로 봐요.”
"작년에 밴드 한답시고 친구들이랑..."
그녀는 결정적 증거라도 잡은 양 눈에 힘을 주고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어. 취했네, 취했어. 집에 데려다줘야겠다. 계단을 다 올라오자 그녀가 갑자기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어.
“암튼 우리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알았죠? 다시 할래. 따라와요.”
“우리? 아니, 인희씨 혼자 해놓고... 우리라뇨?"
“어쭈? 그럼 주현씨는 싫었나 보네. 그런 거예요? 내가 실수했네. 죄송합니다아아아아!”
"제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리고 지금 시간도 늦고 취하셨는데 또 어딜...”
어떻게 보면 아이의 투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순한 엄마가 말썽쟁이 아들 야단치는 것처럼 들렸어. 이 여자, 알면 알수록 달달하다고 생각했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가 누군 줄 아니? 키스, 그것도 뜨거운 키스를 예고하며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여자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누구겠니. 그런 여자의 말에 복종하듯 따라가는 사람이지. 그곳이 지옥이라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난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골목길을 두어 구비 돌아가더니 어느 집 앞에서 멈췄어.
“우리 집이에요. 들어가요.”
“헉. 지금요?”
“왜요, 떨려요? 하하! 저 무서워하는 것 좀 봐. 왜요? 여자는 많이 꼬셔도 이런 경험은 아직 없었나 보네? 누굴 속이려 하시나? 내가 은행원인 거 알죠?”
“그게 아니라 지금... 어른들 계실 텐데... 그리고 제가 무슨 경험을 했다고 자꾸 그러십니까? 은행원 씩이나 되시는 분이”
“겁나죠? 울 아빠한테 인사도 하고 좋죠. 싫음 관두시고요.”
“싫긴요. 하지만 오늘은 인희씨도 좀 취했고...”
“어쭈? 누가 취했다고 그래요? 나를 아예 술 취한 여자로 몰아가시겠다? 안 되겠네. 따라와요. 우리 아빠한테 확 일러버릴 거야!”
정말 취한 걸까, 취한 척하는 걸까. 저렇게 사랑스럽게 취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그나저나 명절날 딸아이가 잔뜩 취해서 어떤 남자를 데려오는 걸 보고 가만있을 아버지가 있을까? 잠시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그녀는 내 쪽을 향해 거 보라는 듯 실망의 눈치를 보내더니 상황이 재미있는지 야릇한 웃음을 지었어. 그래도 내가 멍하게 있자 대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 버렸어. 당돌하게까지 느껴지는 저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비싼 함박스테이크를 자주 먹으면 생겨나나? 들어가기 힘들다는 은행에 1등으로 붙으면 저렇게 되나. 그녀의 정신세계는 내가 범접은커녕 흉내도 힘든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어.
따라오라니 들어는 가야겠는데 이 꼴로 어른들을 뵙는다는 게 영 낯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고 못 들어가는 건 더 바보스러운 것 같은 거야. 얼른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셔츠 매무새를 정리하고 들어갔지. 집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어. 벽돌로 야무지게 쌓은 담장과 연결된 튼튼한 대문 왼 편으로 제법 자란 나무들이 담 쪽으로 경계를 지은 정원이 있었어. 그녀의 편지에 언급된 감나무에도 감이 제법 많이 매달려 있었지. 잔디밭에 깔린 디딤돌 대여섯 개를 밟고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계단이 나오는데 작은 화분이 양 끝에 줄지어있었어. 계단을 올라가니 현관문이 나왔어. 그 앞에서 둘러보는 정원은 더 보기가 좋았어. 고색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창연하다고 할 정도였어. 가지를 단정하게 친 소나무들과 향나무, 담장을 따라 깔끔하게 식재된 화살나무와 목련, 그리고 구석의 조팝나무와 경사면의 회양목이 적당히 드리운 어둠을 배경으로 아늑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어. 깔끔하고 아늑한 정원. 이런 정원을 가꾸는 그녀의 부모님이 어떤 분이실지 짐작이 되었어. 나도 모르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우리 집이 떠올랐어.
거실로 들어가 보니 막상 그녀 말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잘 정리된 소파 앞에 응접테이블이 있고 정원이 보이는 넓은 창 앞에는 난 화분이 늘어서 있었어. 그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피아노가 있고 그 옆엔 제법 큰 스피커와 오디오가 있었어. 부럽고 신기한 마음에 빙 둘러보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어.
“속았죠? 아유, 주현씨도 속는구나? 순진하네. 약오르지롱.”
그녀의 가족은 명절 쇠러 시골에 가셨대. 원래는 그녀도 함께 갔다가 내일 출근을 핑계로 오늘 밤에 오려고 했는데 나를 만나기로 한 그녀는 취직 후 처음 맞는 명절이니 친구들도 만나 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지. 은행에 취직한 걸 자랑하시고 싶어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 하신 부모님도 결국 대학생인 언니만 데리고 가서 내일 오신다는 거야.
“빈 집에 혼자 잘 일이 좀 걱정이었거든요. 주현씨가 오늘 밤새 놀아줘야 해요. 똑바로 할 거죠?”
‘똑바로 할 거죠?’ 하면서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곧게 펴 나를 가리키며 눈에 힘을 줬어. 눈에 힘준다는 건 졸리다는 뜻인데... 그녀의 엄포를 들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어.
“아, 진짜... 걱정 많이 했거든요. 두고 봐요. 인희씨.”
“두고 봐? 주현씨가 뭐 어쩌게요? 아이고, 무서워라.”
그녀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밥공기를 감싸듯 내 양 볼을 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었어. 그러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췄어.
너희들의 첫 키스는 어땠니. 너희들도 잊을 수 없는 첫 키스가 있겠지? 나의 첫 키스는 말야... 시간으로 치면 약 일 분 정도 됐을까? 일 분이라니. 나 좀 봐. 세상에 어떤 남자가 키스를 시간으로 계량화 한다니? 하지만 모르겠어. 그날의 키스를 어떤 낱말로 여기에 기록해야 할지. 어떤 낱말이든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 낱말을 쓰는 순간, 내 첫 키스의 의미는 그 낱말의 의미 안에 오롯이 갇히고 말 거야. 그해 9월 10일 월요일 저녁 여덟 시 무렵의 일이 내 기억엔 불과 며칠 전 일 같구나.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 있었을 때 내 손은 어정쩡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어. 아니, 그랬나? 그랬을 거야.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 필요가 없게 적당히 등도 구부렸겠지. 그리고 눈을 감고 이번엔 휘청거리지 않게 가만히 버티고 있었어. 눈을 감으니 그녀의 입술이 막 피어난 진달래처럼 느껴졌어. 어릴 적 봄이 막 오고 뒷산이 벌겋게 진달래가 피면 한 아름 꺾어다 꽃을 뜯어먹곤 했어. 진달래가 분홍색인 건 다들 알지만 막상 산에 가 보면 진달래마다 분홍의 정도가 다 제각각인 걸 모를 거야. 분홍이 짙어 농염한 꽃이 있고 빛을 덜 받아 묽은 분홍꽃도 있었어. 그녀의 입술은 짙은 분홍꽃이었어. 다른 건 잘 모르겠어. 모든 느낌이 예상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 밖에는. 막상 그 순간이 지나고 나니 머리가 그냥 하얘. 오랜 시간이 지나서가 잊힌 게 아니야. 당시에도 그랬어. 그녀의 입술이 닿았을 때 시간이 정지되었나? 그래서 기억이 휘발되었을까? 그랬을지도 몰라. 뭔가 아득했어. 내일 오후엔 다시 목욕탕 뽀이로 돌아갈 일을 걱정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어. 잘 모르겠어. 그날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떠올려보려고 애써 봤지만 통 살아나지 않았어.
그녀와의 첫 키스의 정황 중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그녀의 술 냄새와 내가 운 거야. 내가 운 건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냥 눈물이 주르르 나왔거든. 내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렸지. 눈을 뜬 그녀가 깜짝 놀랐어.
“뭐야, 울어? 아오... 그래... 내가 키스 좀 했어요. 그렇다고... 울 일이야? 누가 보면 내가 남자 하나 끌어다 잡아먹는 줄 알겠네. 나 지금 나쁜 년 되는 설정인 거 맞아요?”
이번엔 진짜 화난 것 같아 보였어. 마치 연기를 하듯 말하는 그녀 말에 나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이 터졌어. 그 바람에 콧물이 픽, 나왔어. 난 민망해서 그녀가 내 얼굴을 못 보게 잡아당겨 꼭 안았어. 그녀가 귀엽게 버둥대며 말했어.
“어허, 죄인은 어서 놓지 못할까? 이 남자 이거 진짜 은행 금고에 가둬놓고 분석 좀 해야 돼. 뭘 잘했다고 운대? 하긴, 아까 지은 죄를 생각하니 울긴 울어야겠네. 맞죠?”
“인희씨...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그래요. 우리 이대로 조금만 있어요.”
이 말을 하고 나니 뭔가 제대로 복받쳐 올랐어. 눈물이 훌쩍거림으로 바뀌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경이 됐어. 일부러 멈추고 싶지는 않았어. 이 세상 누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줄까, 누가 나의 눈물을 이렇게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줄까. 그녀는 나의 구원자, 나의 베아트리체였어. 불도 안 켠 거실에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세수를 했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내가 쓴 세면대며 변기와 수도꼭지를 비누 묻혀 싹 닦았어. 목욕탕에서 하던 것처럼. 수건도 말끔하게 펴서 보기 좋게 널어놓았어.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그녀가 잘 쓰게. 다시 거실로 밖으로 나오니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 아까 불렀던 그 노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