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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8. 2020

저 아이들에게 사랑을 허(許) 해야 하는 이유

초딩들도 사랑을 안다



6학년 하교 시간.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으로, 학원으로 빠져나가고 두 남녀 아이가 남아있다. 여자아이가 꽃을 등 뒤로 숨기며 내게 눈짓 신호를 한다. 난 약속한 대로 남자아이에게 가서 첩보 영화 주인공처럼 비장하게 속삭인다.




"복도에 나가 봐. 누가 널 기다리는 것 같더라."




남자아이가 복도로 나간다. 잠시 후 여자아이가 재빨리 남자아이 뒤를 따라나가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쭉 내민다. 손에는 국화가 들려있다. 노랗디 노란 가을국화. 내가 방금 학교 화단에서 꺾어다 준 것이다. 깜짝 이벤트에 놀랐을 법도 한데, 남자아이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다. 다만 꽃을 받을 생각은 없는지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내 쪽을 흘끔거리고 있다. 꽃을 내민 채 고개를 숙인 여자아이 또한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놈들, 뭐지? 싶어 궁금해하려는데 여자아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린다. 아차, 나 때문인가 보다. 내가 눈치 없는 건 불치병인가 보다. 난 화들짝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해 교실로 들어온다. 잠시 뒤, 두 아이도 들어온다. 꽃은 남자아이 손에 옮겨져 있다. 그런데 두 아이의 표정이 좋아 보이면서도 어색해 보인다. 꽃을 주고받는 모습을 나에게 들켜서 쑥스러운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와, 너네 참 좋을 때다,라고 농담을 하려다 참기로 한다. 이번에도 헛짚으면 어떡해.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볼이 발갛게 상기된 여자아이가 먼저 가방을 들고 내빼며 쌤, 감사합니다,라고 외친다. 남자아이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꾸벅 인사하고 교실을 빠져나간다.






이 일이 있기 며칠 전, 여자아이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 : 선생님, 자리 언제 바꿔요?


나 : 음... 자리... 그런데 왜?


아이 : 저 성진이랑 앉고 싶어요. 선생님이 좀 앉혀주세요.


나 : 우리 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바꿔왔는데...


아이 : 아이, 이번엔 선생님이 그냥 정한다고 하시면 되죠. 네?


나 : 음... 성진이랑 같이 앉고 싶니?


아이 : 네. 근데 이번에 걔랑 꼭 앉아야 되거든요.


나 : 그래? 성진이도 물어봐야겠지?


아이 : 성진이도 앉는댔어요. 제가 물어봤어요.




그날 오후, 성진이도 문자를 내게 보냈다.




성진 : 선생님, 내일 자리 바꾸기 하나요?


나 : 응. 그러려고 하는데...


성진 : 근데요... 혹시 이민하가 선생님한테 저랑 앉혀달라 그랬죠? 저... 이민하랑 같이 앉기 싫은데...


나 : 그래? 네가 싫다면 할 수 없지. 알았어.


성진 : 근데요. 이민하가 자꾸 앉자고 그러니까...


나 : 아, 너는 싫은데 민하가 앉고 싶어 하는 거니?


성진 : 네... 그냥 선생님이 남자 여자 짝은 안된다고 말해주시면 안 돼요?


나 : 그건 곤란한데?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성진 :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되는데 같이 앉자고 하니까요.


나 : 민하에게 네 마음을 말해본 적 있니?


성진 : 아뇨... 우리 엄마도 이민하는 좀 아니래요. 집착하는 거래요.


나 :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성진 : 그런 건 아닌데... 이민하가 자꾸 같이 앉자고 그래요... 그것만 아니면 집착 아닐 수도 있는데.


나 : 선생님이 보니까 민하가 좋은 친구 같던데.


성진 : 사실은 저도 좋기는 좋아요. 조금요. 그냥 같이 안 앉으면 되잖아요. 애들도 뭐라 그럴 거잖아요.


나 : 민하는 너랑 앉고 싶은가 봐. 아이고, 선생님은 네가 부럽다.


성신 : 근데요. 제가 선생님한테 말했다고 민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나 : 민하가 알면 기분 나쁠 것 같니?


성신 : 당연하죠.


나 : 알았어. 하지만 민하랑 앉기 싫은 네 마음은 진심이잖아. 네 마음을 민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성신 : 그냥 민하가 저랑 안 앉으면 되는데 걔는...


나 : 민하가 네 마음을 안다면 너와 억지로 앉으려고 안 할 수도 있잖아. 너를 좋아하잖아.


성신 : 제가 앉기 싫다고 하면 이민하가 성질낼 수도 있어요.




다음 날, 자리 바꾸기 시간이 되어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린다. 성진이와 짝이 되지 못한 민하가 문자를 보내온다.




민하 : 선생님이 저랑 성진이 짝 시켜준다 그랬잖아요! 근데 왜 약속을 안 지켜요?


나 : 아, 그게... 선생님이 생각해 보니... 컴퓨터가... 자동으로...


민하 : 약속을 하셨으면 지키셨어야죠. 선생님이 안 지키시면 어떡해요!


나 : 맞아, 선생님이... 약속을... 못 지켜서 많이 실망했니?


민하 : 네, 실망했어요. 오늘 짝하는 기념으로 주려고 커플링 사놨었는데... 못 줬잖아요!




다음 날, 성진이와 대화를 나눈다.




나 : 민하 말로는 성진이가 같이 앉고 싶다고 그랬다던데, 마음이 바뀌었니?


성진 : 아니, 저는... 같이 앉지는 말고 그냥 친구 하면 된다고 그랬는데 이민하가 자꾸 앉고 싶다 그러잖아요.


나 : 민하가 강하게 주장해서 할 수 없이 앉는다고 했니?


성진 : 네.


나 : 민하에게 같이 앉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구나?


성진 : 네. 이민하가 자꾸 물어봐서요. 저 학원 가야 돼서 빨리 가야 되는데 이민하가 제 가방도 안 주면서 빨리 말하라고 해서요.


나 : 아, 억지로 응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니?


성진 : 네. 아휴, 이민하 걔는 한 번 조르면 끝이 없어요. 우리 엄마도 그래서 민하가 싫대요.


나 : 하지만 민하는 네가 억지로 앉겠다고 한 걸로 이해할까, 좋아서 동의했다고 이해할까?


성진 : 좋다고 생각했겠죠. 근데 엄마도 제가 민하랑 같이 앉는 건 좀 아니라 그랬거든요. 아휴, 이민하, 짜증 나요!




그다음 날, 민하와 마주 앉았다.




나 : 성진이와 짝 안 해줘서 선생님한테 화 많이 났니?


민하 : 네... (잠시 머뭇거리며) 아뇨... 괜찮아요.


나 : 성진이도... 서운했을까?


민하 : 당연히 서운하죠... (잠시 고민하더니) 근데... 뭐 아닐 수도 있어요.


나 : 왜 아닐 수도 있을까?


민하 : 제가 먼저 앉자고 했으니까요. 제가 좀 우겼는데...


나 : 성진이는 같이 앉기 싫었을 수도 있을까?


민하 : 걔는 원래 그런 얘기를 안 해요. 근데 저랑 사귀기로 했잖아요. 성진이가 먼저 프러포즈했어요. 커플이면 약속을 지켜야죠.


나 : 성진이에게 화났구나?


민하 : 아뇨... 전 괜찮아요. 차라리 잘 됐죠, 뭐.


나 : 차라리 잘 된 거라... 어떤 부분이 잘 되었을까?


민하 : 짝이 되면 애들이 성진이더러 뭐라 뭐라 놀릴 수도 있으니까요.


나 : 성진이뿐 아니라 너에게 뭐라 뭐라 할 수도 있겠네.


민하 : 전 괜찮아요. 뭐 어때요? 잘못도 아니잖아요. 전 당당해요.


나 : 그럼. 남녀 친구 사귀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당당함 뒤에 느껴지는 기분은 좀 다를 것 같은데?


민하 : 네, 좀 그래요. 성진이는 창피하대요. 사실은 좋을 거면서.


나 : 성진이는 왜 좋을 거면서 피하려고 할까? 민하가 성진이와 좋은 친구가 되려면 그런 속마음을 이해해야 해.


민하 : 걔네 엄마가 앉지 말라 그랬대요. 근데 성진이는 앉고 싶댔어요. 진짜로.


나 : 성진이와 엄마 생각이 서로 다른 모양이구나?


민하 : 네, 근데 걔네 엄마가 앉지 말라 그래도 선생님이 짝으로 정해주시면 앉아야 되는 거잖아요.


나 : 그러면... 성진이 엄마는 뭐라고 생각하실까?


민하 : 아무 말도 안 하시겠죠. 선생님이 앉게 했으니까.




아이들도 사랑을 한다. 다만, 성인처럼 감정을 능숙하지 다루지는 못해 가끔 이렇게 귀여운 상황이 벌어진다.






*


성진이와 민하는 우리 반 대표 커플이다. 성진이는 축구를 잘한다. 잘 생기고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민하는 똑똑하고 예의 바르며 자기주장이 강하다. 성진이가 몇 달 전 그네를 타던 민하에게 먼저 고백을 했다.(성진이를 빼앗긴 여자아이들이 좌절했다.) 민하는 성진이가 다니는 학원으로 옮기면서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사이에 소문은 퍼졌고 성진이 부모님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성진이가 여자애들과 어울리느라 공부를 멀리할까 봐 학원을 옮겼다. 딸을 키워 본 적이 없는 성진이 부모님은 남자아이에게 적극적인 요즘 여자애들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학원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자 두 아이는 주말에 만나 시내 중심가에 가서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방에서 놀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아는 아줌마를 만났다. 소식은 바로 성진이 엄마에게 전해졌고 주말 외출금지가 떨어졌다.




아이들이 서로의 이성을 찾고 고백해서 '커플'이 되지만 이성 교제 또한 인간관계의 확장이다 보니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긴다. 뜨거운 애정을 주체 못 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에너지로 써버리고 뒤늦은 후회를 하거나, 혼자 속으로 좋아하는 아이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해 마음을 앓기도 한다. 한 아이를 두고 여럿이 다투느라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사귀기로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변한 친구 때문에 아파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사랑이 불처럼 뜨거운 건 어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그렇다고 어른의 사랑이 오래 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도 사랑과 배신, 협잡과 연대를 한다. 친구를 꼬여내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고학년 교실은 사랑과 전쟁의 축소판인 셈이다. 사랑에 관해 아직 초보인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애정을 기준으로 상대 아이의 감정을 넘겨짚는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가 충분히 사랑으로 갚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좌절한다. 그러면서 사랑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아간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시행착오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그럴 기회를 충분히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가로막는 것 같다. 이성 교제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성진이 엄마가 민하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이들의 사랑이 공부에 밀려나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몬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 아이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것 같다. 감시를 피해 문자를 하고 학원차를 기다리는 몇 분의 짬을 이용해 고백도 나눈다. 이런 아이를 공부에 묶어 놓으려는 부모의 노력 또한 아이들의 노력만큼 진화한다. 핸드폰에 감시 앱을 설치하고 아이의 동선을 실시간 감시하면서 조금이라도 어색하다 싶으면 아이를 취조한다. 이쯤에서 많은 아이들이 포기한다. 아직까지는 생존을 위한 자원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기이므로. 적어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부모가 이기는 듯 보인다.




민하에게 먼저 고백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진이었지만 결국 엄마 뜻을 따르기로 하면서 민하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민하로선 성진이가 답답하고 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진이에게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는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민하 : 선생님, 성진이가 요즘 이상해요.


나 : 그래?


민하 : 틀림없어요. 어제는 문자도 씹었어요.


나 : 그랬구나. 왜 그랬을까?


민하 : 여친이 생겼을 것 같아요.


나 : 물어봤니?


민하 : 아뇨, 근데 느낌이 그래요.


나 : 느낌이 정확할까, 직접 물어보는 게 정확할까?


민하 : 물어보고 싶은데 쪽팔려서요. 사실이면 어떡해요ㅠ


나 : 그러게... 근데 만약 사실이면 어떤 기분일 것 같니?


민하 : 아, 몰라요.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물어봐 주세요ㅠ


나 : 흐음. 너희 둘 사이에 선생님이 끼어들면 성진이가 좋아할까?


민하 : 한 번만요, 네? 선생님~~ㅠ






좋아하는 상대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걱정은 여자아이들이 주로 한다. 한편 남자 친구에게 직접 확인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거절당한 일이 걱정인가 보다. 대부분의 경우 담임, 또는 친구를 시켜 상대의 마음을 타진한다.




나 : 요즘 민하랑 무슨 일 있니?


성진 : 민하가 뭐라 그러는데요? 문자 씹었다고 그러죠? 걔는 그 얘길 계속해요.


나 : 만약에 네가 엄마 때문에 민하와 그만 친하고 싶다면... 민하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


성진 : 아, 근데요. 이민하는 저한테 자꾸 뭐라 뭐라 그러면서...


나 : 네 엄마 때문에 민하와 그만 친하고 싶어도 되고, 그냥 민하가 싫어서 그만 친해도 돼. 네 마음이야.


성진 : 이민하가 저한테 바람났냐고 문자 보내잖아요. 사실이 아닌데.


나 : 그 이야기를 민하에게 하면 어떨까? 오해가 풀리겠네.


성진 :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학원 가야 해서 만날 시간도 없는데.


나 : 점심시간이나... 시간 날 때 해야지? 근데 민하랑 대화하게 되면 뭐가 걱정될 것 같니?


성진 : 치사하다고 할까 봐요. 엄마가 만나지 말라 그래서 안 만나면 마마보이잖아요.


나 : 네 생각은 어떠니? 민하와 친하고 싶니? 아니면 친하고 싶지만 엄마 말을 더 듣고 싶어?


성진 : 앞으로 제가 공부 열심히 하면 민하랑 만나도 된대요. 그래서 열심히 할 거예요.




여자아이들에 비해 성호르몬 분비가 늦어서인지 이 시기 남자아이들은 이성 교제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다. 엄마가 이성 교제를 그만두라고 하면 큰 저항 없이 따른다. 남자아이 입장에서 여자 친구와 엄마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아직은 엄마가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엄마의 통제에 굴복한다. 아이로선 재미는 있지만 위험한 이성 교제 대신 안전한 엄마를 선택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아이의 이성 교제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본다. 어른 흉내를 내려다 사고라도 치면 어떡하나, 걱정도 한다. 그래서 일단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고 본다. 이는 얼핏 보면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아이도 이성 교제의 경험은 필요하다. 이성 교제는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다. 대상은 누구에게, 아무 때나 원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결국 이성 교제는 성진이나 민하처럼 이성에게 인기가 높은 소수의 아이들에게만 주어진다. 다른 아이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선물 같은 경험인 것이다. 성진이에게 온 민하라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 성진이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다.




나 : 성진이와 민하가 커플이라던데요?


성진 엄마 : 그러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 : 어떤 점이 걱정되세요?


성진 엄마 : 요즘 애들은 저희 때랑 다르잖아요. 저희 때 남녀는 서로 말도 못 했는데...


나 : 그랬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스스럼이 없는 것 같아요.


성진 엄마 : 다른 아이들은 평범하게 크는데... 성진이가 좀 유난하게 크는 건 아닐까요?


나 : 성진이가 축구도 잘하고 잘생겨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성진이가 부럽네요. 하하.


성진 엄마 : 그건 기쁜 일인데... 얘네들이 실수할까 봐 걱정이에요. 아직 철이 없잖아요.


나 : 제 생각엔 성진이에게는 앞으로 민하가 아니더라도 여자아이들은 늘 다가올 것 같아요. 성진이도 여자애들과 사귀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성진 엄마 :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제가 민하랑 안 어울리면 안 되냐고 했더니 막 울면서 대들더라고요.


나 : 아이고, 이 녀석. 은근 순정파네요. 하하.


성진 엄마 : 어쩜 좋아요, 선생님. 이제 겨우 6학년이잖아요.


나 : 앞으로 성진이 주변을 맴도는 여자아이들은 계속 있을 텐데... 성진이가 중고등학교에 가면 더 이상 막을 수도 없을 겁니다. 대신 성진이가 이성 교제를 잘하는 연습을 시키는 게 쉬울 것 같아요.




상담 결과, 두 아이의 이성 교제를 허락하는 대신 약속을 몇 가지 정했다. 성진이 부모님의 걱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 서로 간의 문자, 또는 통화는 토, 일요일에 각각 1시간씩 시간을 정해서 한다.(더 필요한 경우 부모님의 허락을 얻는다)


- 둘이 만날 경우 부모님께 알리고, 시내로 나가지 말고 아파트 근처 상가에서 만나기


- 서로 예의를 지키고 솔직하게 속 마음 표현하기


- 말하기 어려운 건 혼자 고민하지 않고 부모님이나 선생님 도움 요청하기




성진이가 부모님과 정한 약속을 민하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민하는 받아들이기 싫었는지 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민하 : 선생님이 성진이 엄마랑 상담하셨죠? 그리고 약속 정하라고 하신 거 성진이한테 다 들었다구요!


나 : (우물거리면)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


민하 : (칭얼대며) 다른 건 다 지킬게요. 성진이랑 시내 나가도 된다고 걔네 엄마한테 말해주세요. 네?


나 : 시내 나가면 뭐... 하게?


민하 : 노래방도 가고 다이소도 가요. 우리 이상한데 안 가요. 진짜요!


나 : 근데... 시내 나가도 되는지는 성진이 부모님이 정하시는 거야.


민하 :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해주시면 되죠.


나 : 그건 어렵겠는데? 그분들이 정하실 권리가 있어.


민하 : 그럼 어떡해요. 성진이도 시내 가고 싶다는데...


나 : 그럼 성진이가 부모님을 설득해 볼 수는 있겠네. 하지만 결정은 부모님의 권한이야.


민하 : 동네에서 만나면 아이스크림 가게 밖에 못 가요. 거긴 다른 애들도 온단 말이에요.


나 : 아마... 그래서 거기에서 만나라고 하시는 것 같아. 시내 나가면 걱정되시니까.


민하 :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아님 우리 엄마가 데려다줘도 되는데 왜 걱정하실까요?


나 : 어른들마다 각자 너희들에 대해 걱정하는 게 달라. 그걸 너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해.


민하 : 제가 성진이한테 니네 엄마 좀 나쁘다고 했더니 성진이가 그냥 가버렸어요. 걔 화났으면 어떡해요?


나 : 왜 화났을 것 같니?


민하 : 제가 걔네 엄마 흉봐서요.


나 : 그래, 엄마를 흉보면 서운할 것 같아.


민하 : 미안하다고 문자 보냈는데 씹었어요. 엄청 화났나 봐요.


나 : 미안하다고 한 거 잘한 일 같구나. 하지만 성진이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면 좀 기다려줘야 할 것 같아.


민하 : 선생님이 성진이한테 말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나 : 뭐라고 말해줄까?


민하 : 제가 미안해한다고요. 그리고 다음 주 제 생일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도요.


나 : 선생님이 예쁜 편지지 하나 인쇄해 줄 테니 편지로 써 볼래? 선생님이 전해줄게.




사각사각.


민하가 꽃 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야무진 입술을 하고 또박또박. 아이고, 이 녀석, 오늘따라 글씨체도 예쁘네. 세상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시키지 않아도 예쁜 편지를 쓰고 싶게 할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성장시키는 호르몬의 비결이여! 아, 경이롭다.




다음 날, 성진이를 따로 불러 민하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 다 읽기를 기다려 물어보았다.




나 : 기분이 어떠니?


성진 : 잘 모르겠어요. 민하가 좋기도 한데... 또 좀 싫기도 해요.


나 : 민하랑 더 사귈지 그만 사귈지는 네가 결정할 수 있어. 혹시 결정은 이미 했는데 말하기가 어려우면 선생님이 대신 말해줄까?


성진 : 네.


나 : 그럼 내일 아침까지 나에게 말해 줘.




다음 날 아침, 성진이가 교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말한다.




성진 : 선생님, 저 민하랑 더 사귈래요.


나 : 오, 기쁜 소식이구나. 어제와는 생각이 바뀐 것 같은데?


성진 : 엄마가 괜찮다고 해서요. 주말에 시내에도 태워도 준대요. 자주는 아니지만요.


나 : 엄마가 생각이 바뀌셨구나? 무슨 일이 있었니?


성진 : 네, 제가 엄마한테 말했거든요. 시내에 태워다 주라고. 대신 약속도 잘 지키겠다고요.


나 : 이 소식은 성진이가 민하에게 직접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성진 : 네. 그래서 지금 민하 기다리는 거예요.




잠시 후 성진이와 민하가 교실로 들어온다. 민하가 밝은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민하 : 선생님, 저 성진이랑 화해했어요.


나 : 오, 잘 됐네.


민하 : (화단에 핀 국화를 가리키며) 저것 좀 꺾어도 되나요? 성진이한테 선물로 주게요.


나 : 응. 아이고, 성진이는 좋겠네. 민하에게 꽃도 받고.






성호르몬이 왕성한 고학년 아이들은 이성 교제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아 염탐하며 고백할 기회를 엿본다. 그러다 어느 한쪽이 고백을 하고 받아들여지면 커플이 탄생한다. 커플이 되면 선물을 주고받거나 문자를 주고받는다. 중고등학교와 달리 초등학생의 이성 교제는 대부분은 친구들에게 알려진다.(먼저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또 아직 어려서일까, 커플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대부분 3개월 이내). 처음엔 좋은 것 같아 사귀기로 했지만 금세 지루해한다. 그렇게 유야무야 되다가 자연스레 멀어진다. 이 시기 아이들은 '끝내는' 방법은 잘 모른다. 서로 뜸해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바람'피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다. 언제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말 안 하지만 누가 바람을 피웠는지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인에 비해 빠르게 잊힌다. 아직 그런 시기다. 오히려 부모님의 반응에 대해 놀라는 것 같다. 부모가 예민하게 반응하면 아이들은 움츠러들거나 숨기려 한다. 부모 몰래 문자를 보내려고 밤늦게까지 안 자고 기다리다가 수면 문제가 생기거나 집에서 가능한 한 멀리 가서 놀려고 하다가 더 큰 걱정거리는 만들기도 한다. 부모가 과민하게 대응하거나 부정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이성과의 이별 후 겪는 심리적 문제(우울감, 상대에 대한 분노감, 스토킹, 집착, 데이트 폭력 등)는 성인뿐 아니라 6학년 아이들도 겪는다. 내 아이가 사랑에 빠져있다면 금지하거나 방임할 게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며 잘 대응하게 도와야 한다. 출발이 안 좋으면 비정상적인 애정관계가 습관 될 수 있다. 다양한 이성 친구와 만나면서 사랑하고 좌절하고 상처 받는 과정을 건강하게 겪어내야 비로소 제대로 사랑하는 어른이 된다. 그러니 부모들이여, 아이들의 서툰 이성 교제를 금지할 게 아니라 응원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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