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by 나는일학년담임

21. 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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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일하던 때, 어떤 사람이 때밀이 십수 년 만에 일하던 목욕탕을 인수했다는 이야기가 TV에 나왔어. 사람들이 놀랐지. 때밀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목욕탕을 인수하냐고. 그것도 서울에서. 요즘은 목욕 도우미, 또는 세신사라고 불러주지만 그때만 해도 ‘나가시’라고 낮춰 부르던 때밀이가 말야. 때를 밀어보지 않은 사람은 하루 종일 어두컴컴하고 습한 탕 안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오가는 그들을 의식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들은 항상 손님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뭔가를 하고 있단다. 사실 때밀이는 어떤 직업보다 곡절과 부침이 많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몰라. 나를 고용한 형도 그랬어.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척이 운영하는 목욕탕에 나처럼 뽀이로 취직했어. 나처럼 음료를 팔고 청소와 심부름을 했을 거야. 그리고 틈나는 대로 때 미는 걸 배웠겠지. 나처럼 욕도 먹고 맞기도 했을까? 그랬을 거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았을 거야. 때밀이가 돈이 된다는 걸. 그러다 군대 제대하고 서울 변두리에 단칸방 얻어 살면서 당시 건축 노동현장에 뛰어들었어. 몇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이 목욕탕에 때밀이 계약을 하고 들어 온 거야. 소문에 천만 원 넣었다던데. 천만 원이면 당시 주택복권 1등에 당첨되어야 생기는 돈이야. 서민에게는 하늘의 별처럼 요원하던 그 돈을 형이 얼마나 독하게 모았을까. 당시 내가 살던 지하 단칸방 전세가 140만 원이었어. 우리 아버지 산소가 있던 오천 평짜리 산을 판 돈과 같은 금액이지. 형이 그 목욕탕을 선택한 건 계산에 의한 것이었어. 장안평 중고차 시장 근처라는 점 말야. 손님으로 일반 주민보다 상사 직원들이 많이 왔거든. 형 말대로라면 이런 목욕탕이 알짜배기야.


“때밀이 손님은 안 오고 어디서 추접스러운 좆빠리들만 꾸역꾸역 밀려와서 때 존나 밀면서 물 다 퍼 쓰는 목욕탕엔 들어가지 마라. 그런데 가면 굶어 뒤져, 새꺄.”


형 말대로 이 목욕탕엔 일반 손님은 별로 없어. 옛날에 처음 생겼을 때에는 주택가가 많아 주민들이 주로 왔다는데 중고차 시장이 생기면서 유흥가가 함께 들어오니 주민들은 떠나는 거야. 자동차 매매상이나 유흥가 손님 중엔 깡패들이 많았어. 일반 손님은 무서워서 못 오지. 일반 손님이 줄면 목욕탕 사장은 불만이지만 때밀이 형에겐 호재야. 중고차 시장이나 유흥가엔 현금이 많이 돌잖아. 그들은 어지간하면 때를 밀거든. 전날 술 마시고 사우나하러 오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때를 밀지는 않을 거 아냐? 그 사람들은 면도기나 칫솔도 안 들고 와. 다 사서 쓰지. 음료도 쉽게 마셔. 형은 이 점을 이용했어. 다른 목욕탕보다 품질이 좋은 걸 파는 거야. 물론 가격도 비싸게 받지. 형은 납품업자를 물리치고 직접 동대문 목욕용품 상가에 가서 떼어 왔어. 일회용 칫솔이나 면도기는 보통은 백 원이지만 여기에 품질이 더 좋은 삼백 원짜리를 추가하는 거야. 상사 사람들은 다들 삼백 원짜리를 샀어. 이게 다가 아니야. 음료수만 파는 것보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면 돈이 된다는 걸 형은 알고 있었어. 라면이었어. 단무지만 있으면 되니까. 밤새 술을 마시고 사우나 와서 한 숨 자고 나면 누구든 속을 달래고 싶을 거야. 사람들이 라면을 찾기 시작했어. 그걸 끓이고, 서빙하고 치우고 설거지는 내 몫이야. 이상하게 사람들은 라면을 혼자 시키는 법이 없더라. 다들 같이 먹어. 배가 불러도 그냥 먹어. 그러니 내 일이 많을 수밖에. 여기가 목욕탕인지 라면 가게인지 모를 정도였어. 라면 한 그릇은 천 원이야. 라면을 팔면서도 형은 머리를 썼어. 매운 고추를 썰어 넣었지. 국물이 매우면 음료를 마셔야 하잖아. 그런 손님들이 여러 팀 오는 날이면 칫솔, 면도기 같은 일회용품과 때밀이, 라면에 음료까지 꽤 큰돈이 들어왔어. 그렇게 해서 형이 한 달 동안 예금하는 돈이 사오십만 원이었어. 두 해만 그렇게 모으면 목욕탕 보증금이 나오는 거야. 당시 내 월급은 6만 원, 옷 공장 실밥뜯이로 어머니 월급이 9만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형의 수입이 대단한 거야. 문제는 라면을 항상 팔 수 없다는 거였어. 사장이 와서 보고 길길이 화를 낸 거야. 도떼기 시장이냐고. 그깟 라면 팔아 얼마나 벌어 처먹겠다고 냄새 풍기는 라면을 내 목욕탕에서 끓여대냐고. 결국 형이 라면을 포기했을까? 그럴 형이 아니야. 사장이 올 것 같은 날은 라면을 싹 치웠어. 라면을 찾는 손님에겐 구청에서 단속이 떠서 오늘은 못 판다고 거짓말하라고 시켰어. 사장이 어디 가서 안 올 게 확실한 날은 꺼내 놓고 팔았지. 사장은 안 오는 날이 더 많으니 라면을 파는데 문제가 없었어. 형은 또 출근길에 계란을 두 판씩 사들고 와서는 지하 보일러실에 가서 삶아 오라고 시켰어. 카운터 이모가 보면 사장 마누라에게 일러바칠지 모르니 계란은 반드시 수건 담는 바구니에만 담으래. 형의 장사 수완은 내가 따라갈 수 없었어. 그가 파는 건 뭐든 잘 팔렸어. 매출액이 늘었고 은행에 저금하는 액수도 점점 늘어갔어. 나도 형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돈을 벌어 지하방을 나와 빌라 지상층으로 이사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럼 은행의 그녀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때밀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가능하면 빨리. 그러려면 형이 가르쳐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면서 심부름을 잘해야 해. 형이 내게 때밀이를 가르쳐 준다는 보장은 없어. 일부러 가르쳐 줄 리도 없고. 그럴 땐 형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야 해. 내가 불쌍해서라도 가르쳐 주게끔. 욕하면 욕먹고 때리면 맞더라도.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운다는 건 그런 설움을 감수한다는 걸 의미하던 때였어. 다행히 오전에 손님들이 밀리는 바람에 일찍부터 때밀이를 배울 수 있었어. 대강 철저. 빨리빨리 때를 밀라는 말이야. 시간이 돈이니까. 단골마다 세게 미는 걸 좋아하는지, 그 반대인지를 기억해야 해. 손님들 눈에 잘 띄어야 한다며 밝은 형광색 수영복 팬티를 입었어. 어두컴컴한 탕 안에서 형광색 엉덩이 둘이 씰룩거리며 잰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상상을 해보렴. 때밀이인 것도 민망한데 팬티 색까지. 창피했어. 그런데 어쩔 수 있나. 입으라면 입어야지. 때 미는 손님이 없을 땐 탕 안을 마구 돌아다녀야 해. 손님들에 대한 시위랄까, 나 여기 있으니 때를 미시오, 뭐 그런 거. 근데 그러다 보면 진짜 때를 밀겠다는 손님이 나와. 손님의 마음을 낚아채는 형. 그는 이런 세밀함을 어떻게 알까. 나도 저런 걸 배워야 하는데. 처음 때 밀 땐 서툴러서 힘만 들었어. 한 사람 때 밀고 나면 기운이 쪽 빠지고 팔이 너덜너덜 감각이 없었어. 손님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불평을 했어. 형에게 욕먹고 등짝을 맞으면서 몇 달을 배우고 여름이 되자 나도 얼치기 때밀이가 되어갔어. 양팔을 쓰니 저절로 팔뚝과 어깨에 힘이 생기고 근육이 잡혔어.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결정적으로 안 되는 게 있었어. 팔 힘을 적당히 배분하는 기술. 내가 밀면 손님들이 하나같이 너무 간지럽거나 반대로 너무 아프대. 그런데 형이 밀면 가려운 곳은 어떻게 알고 시원하게 긁어주고 아플 것 같은 곳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지나가는데도 막상 때는 하나도 안 남는다는 거야. 그 비법이 뭘까, 아무리 형을 관찰해도 형은 손놀림은 그냥 대충대충 썩썩 미는 거 이상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데. 그런 섬세한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그래야 돈을 벌든가 뭐든 할 거 아냐. 형을 볼 때마다 부러운 한편,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나를 자책했어.


오전 손님들이 한 차례 빠지면 목욕탕이 한산해져. 그럼 형은 담배를 하나 물고 지하 보일러실에 놀러 가. 난 오전 내내 손님들이 먹은 라면 그릇을 설거지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빈 사물함에 차곡차곡 쌓았어. 그런 다음 보일러 실로 인터폰을 해서 형에게 지금 점심 라면 끓일까요? 여쭤 봐. 그러라고 하면 2개 끓이고 너나 먹으라고 하면 1개를 끓여. 하루 세끼가 거의 라면이었어. 어쩌다 질리면 짜장면.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라면은 항상 2개를 끓여야 해. 근데 청년 두 명에게 라면 두 개는 너무 적잖아. 그래서 내가 목욕탕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세 개를 끓인 적이 있었어. 형이 화가 많이 났지.


“내가 너한테, 새캬. 육만 원을 주잖아, 새캬. 배고프면 니 돈으로 나가 사 처먹든지 새캬. 내 라면을 날로 처먹어? 엎드려뻗쳐, 새캬.”


하나에 양심, 둘에 불량. 형이 시키는 대로 난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양심불량을 외쳤어. 몇 번 하다가 힘이 빠져 낑낑대자 라면이 끓을 때까지 탈의실 바닥에 머리를 박았어. 그 뒤로는 항상 2개를 끓였어. 형이 시키는 대로. 그게 다가 아니었어. 라면을 그릇에 떠먹으면 좋잖아? 그러면 뜰 때 적당히 반을 나눠서 뜰 수가 있으니 분배도 어느 정도 되고. 근데 형은 어떤 이유에선지 그걸 못하게 했어. 라면이 다 끓으면 냄비 뚜껑을 차지하고 크게 한 젓가락 떠서 후루룩 먹기 시작해. 형이 이미 절반 넘게 떠 간 다음이야. 나도 먹어야 하니 빈 그릇 대고 소심하게 한 젓가락 뜨지. 그 양이 얼마나 되겠어? 더구나 금방 끓인 라면은 뜨겁잖아. 난 뜨거운 걸 잘 못 먹어. 결국 라면 두 개 대부분은 형이 먹고 난 면 조금과 국물이나 마시는 거야. 언제부턴가 형은 짜장면을 시킬 때에도 두 그릇을 시키지 않고 곱빼기 하나와 물만두를 시켰어. 그러면서 빈 그릇 하나를 갖다 달라고 하지. 장깨가 짜장면을 가져오면 내가 빈 그릇에 삼분의 일쯤을 덜고 형에게 그릇째 드려. 늦게 먹으면 혼나니까 허겁지겁 씹지도 못하고 막 삼키는데 형은 벌써 물만두까지 다 먹고 앉아있어. 성질 급한 형보다 늦게 먹으면 또 욕을 먹지.


“햐, 그 새끼. 종일 처먹느라 돈 벌겠냐? 답답한 새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데다 양이 충분하지 않으니 늘 배가 고팠어. 그렇다고 내 월급으로 사 먹으면 엄마 드릴 돈이 모자라니 그냥 참는 수밖에. 하지만 이렇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늘 불안했어.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을 거야. 열일곱 살이면 잘 먹는 건 포기하더라도 배는 안 고파야 하잖아.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이런 내 사정을 잘 아는 장깨가 가끔 남은 음식을 가져다줬거든. 밤에 목욕탕 문을 닫고 기다리면 가끔 장깨가 부를 때가 있었어. 늦은 배달이 있는 거지. 그 시간에 시키는 음식들은 남기는 경우가 많거든.


“밤에 고스톱 치면서 빼갈이랑 양장피, 탕수육 시키는 새끼들은 백 프로 남긴다고 봐야 돼. 씨발. 땡잡는 거지, 뭐. 한 시간쯤 뒤에 한 잔 빨자. 킬킬.”


그러면 난 목욕탕 테이블에 신문을 쫙 깔지. 한 시간쯤 지나 장깨가 자전거 타고 그릇 걷으러 나가는 게 보여. 그럼 난 그릇 두 개를 들고 중국집 옆 골목에서 기다리는 거야. 장깨가 남은 음식을 내 그릇에 쏟지. 남긴 음식이다 보니 이쑤시개가 들어있을 때가 많았어. 어떤 때는 담배꽁초도. 아, 저런 걸 먹어야 하다니.


“하이고, 네, 네. 처먹기 싫으세요? 그럼 굶어 뒤지세요. 난 먹을 테니까. 지랄하지 말고 무조건 먹어 둬, 새꺄. 먹으라고 만든 걸 왜 못 처먹냐, 병신아. 니가 더 굶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정말 내가 굶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시골 살 땐 감자에 옥수수밥이라도 굶지는 않았는데. 저런 것까지 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머뭇거리자 장깨가 사물함을 열더니 때밀이 형이 쓰는 깨끗한 접시를 가져왔어. 그가 이쑤시개며 담배꽁초 같은 걸 적당히 걷어내고 씻을 건 씻은 다음 새 접시에 옮겨 담았어. 그러고 나니 뭔가 좀 달라 보이데. 막상 먹어보니 맛도 좋았어. 태어나서 탕수육과 양장피, 팔보채를 그때 처음 먹었어. 어떤 날은 운이 좋게 고량주가 남기도 해. 그런 날은 소주를 몇 병 사다가 목욕탕에서 술판을 벌였어. 장깨가 큰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들이키더니 말했어.


“야, 너도 조심해라.”

“뭘?”

“니네 때밀이 그 새키 말야. 씨발. 누가 때밀이 아니랄까 봐. 전에 일하던 애 존나 패서 짭새 출동했잖아.”

“애를 패? 왜?”

“음료수 삥땅 치다가 걸렸대. 얼마나 팼는지 장 파열 나서 입원했었잖아. 깬값 존나 물었을 걸.”

“음료수가 얼마짜리였는데?”

“이백 원. 그 새끼가 원래 돈돈 하잖냐.”

“하... 그렇다고 이백 원에 장 파열이 나도록 사람을...”

“병신아, 그 때밀이 새끼한테 천 원만 줘 봐라. 살인도 해, 그 새끼는. 파출소 잡혀가서도 지는 죄 없다고 지랄 떨다가 존나 터졌대. 완전 또라이 새끼야.”

“...”


때를 그렇게 잘 밀면서. 돈을 그렇게 잘 벌면서 이백 원에 사람을 죽도록 패다니. 소름이 끼쳤어. 내가 그동안 형에게 몇 차례 맞은 건 그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난 그것도 무섭던데. 장깨 말대로라면 나도 언젠가 비슷하게 당할지 몰라. 그 많은 음료를 팔다 보면 착오가 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심부름에 라면 서빙까지 하면서 무슨 재주로 그걸 맞춰. 며칠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게 어디다 적어 두는 거였어. 내가 삥땅 안 친 걸 증명하려면 기록밖에 없잖아. 목욕탕 카운터 이모님께 여쭤보니 서랍을 한참 뒤져 연도가 훨씬 지난 가계부를 꺼내 주셨어. 날짜 별 수입, 지출 적요, 비고가 칸칸이 구분되어 있는. 매 쪽 윗부분에는 오늘의 역사라고 해서 과거의 사건 사고가 적혀 있고 아랫부분에는 지혜의 명언으로 유명한 사상가들의 명문장이 한글과 영어로 적혀 있었어. 그 양식을 반으로 나눠서 내가 파는 열 가지 음료와 다섯가지 일회용품 별 판매량, 판매금액, 재고를 적었어. 또 반대쪽에는 각 음료 납품업자에게 그때그때 지급해야 할 물건 값과 받아야 할 외상값을 적었어. 그리고 은행 가기 전마다 형에게 보여드렸어. 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일일이 냉장고 속 음료를 세고 거스름돈과 장부를 확인하더니 한 달쯤 지나니까 냉장고 안은 확인하지 않고 장부의 판매금액만 봤어. 다른 건 몰라도 형은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어했어.


“저 새끼 말야. 일은 존나 느리고 답답한 새끼가 꼴에 중학교 나왔다고 장부 정리는 빠꼼이야.”


휴, 적어도 맞아 죽지는 않겠네. 내가 이렇게 하면 형이 때밀이를 좀 빨리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형은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어.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나 은행에 통장을 만들 무렵엔 매일 확인하던 장부도 안 보는 날이 더 많아졌어. 심지어 납품업자에게 물건 값 지불하는 것까지 나더러 은행에서 꺼내 직접 주라고 도장까지 맡겼어. 그래도 난 매일 그 앞에 장부를 내밀면서 오늘은 얼마나 팔렸고 납품업자 누구에게 얼마를 주겠습니다, 일일이 보고했어. 그럼 형은 알아서 해, 새꺄. 그러면서 더는 장부를 보지 않았어. 대신 가끔 뱀눈을 하고 노려보며 짧게 한 마디 했어.


“똑바로 해, 새꺄. 나 속이면 뒤진다, 너.”


형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에게 맞아 장이 터졌다는 아이가 떠올랐어. 장이 터진 그 아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주억거렸어. 형이 원하는 게 그거 같았어. 무서워서 감히 자기를 속이지 못하게 만드는 거. 장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각인. 감히 형 돈을 십 원짜리 하나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믿게 하면 형도 안심을 할 거잖아. 그럼 나를 안 때릴 거고... 내가 불쌍해서 때밀이 기술을 더 알려주지 않을까. 장부를 정리하는 시간은 빨라도 삼십 분은 걸렸어. 음료와 일회용품 재고 확인하는 건 십 분이면 되는데 문제는 꼭 뭐가 한두 개 빠져. 그걸 찾느라 시간이 걸려. 아주 미친다니까. 간혹 쉽게 찾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못 찾았어. 어제 남은 재고와 오늘 팔린 수의 차를 계산하면 오늘의 재고와 맞아야 하는데 안 맞는 거야. 남는 경우는 없고 항상 모자라. 팔고 나서 돈을 안 받았거나 누가 몰래 집어 간 경우야. 형이 알면 난리 날 거잖아. 이것 때문에 따귀도 맞았거든. 내가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걸 형에게 증명할 방법은 없어. 그냥 욕을 먹거나 얻어맞는 거야. 그래도 어떡하겠어? 형에게 그날그날 보고하는 수밖에. 처음엔 나더러 물건 관리 개판으로 한다고 욕을 하더니 그런 일이 잦자 똑바로 해, 새꺄,만 할 뿐 그냥 넘어갔어. 사람들 북적이는 상황에서 나 혼자 탈의실 지키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다행히 매출은 계속 오르고 있었거든.


어떤 직업이든 내부 사정을 알게 되면 빈틈을 이용한 부정을 저지르기가 쉽지? 목욕탕에서 파는 음료가 그래. 하나에 몇 백 원짜리가 하루에도 수십 개, 많이 팔리는 날은 백 개 넘게 팔리기 때문에 언제나 돈이 있게 마련이거든. 매일 도매납품 업자가 오토바이로 음료를 박스째 실어왔어.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 매출을 따져보면 상당한 금액이야. 구멍가게와 다르게 목욕탕은 이문을 많이 남겼으니 손에 들어오는 돈이 꽤 됐지. 당시 인기 있던 헬스펀치는 200원에 떼어 와서 500원을 받았으니 두 배 넘게 남잖아. 요구르트나 베지밀, 딸기, 쵸코, 바나나 우유, 영지 음료도 마찬가지였어. 목욕탕에 들어오는 음료는 도매가가 제일 싼 것만 받았어. 왜 있잖아. 겉포장은 천연음료 느낌인데 내용물은 향신료와 설탕, 색소로 만든 음료들. 금액이 커지고 팔리는 종류가 많을수록 중간에 떼어먹을 빈틈도 많게 마련이잖아. 형은 목욕탕 뽀이로 있어 봤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빼돌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어. 적어도 형이 아는 범위에서는 절대 하면 안 돼. 맞아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어. 때밀이를, 어떻게든 때밀이를 배워야 하니까. 그러려면 형에게 잘 보여야 해. 내 목표는 오로지 그것이었어. 그런데 그 목욕탕에는 형이 모르는 빈틈 하나가 있었어. 음료를 납품하는 업자들끼리 공유하는 틈. 그들은 유통 생태계를 잘 알고 있어.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지. 음료를 파는 사람은 형이 아니라 나잖아. 그들은 내게 잘 보이려고 애써. 그렇다고 내게 돈을 줄 수는 없잖아. 대신 물건으로 주는 거야. 헬스펀치 40개 박스가 들어오면 10개를 그냥 주는 거지. 근데 한 번에 주면 티가 나잖아. 그러니까 물건 가져다줄 때 몇 개, 수금하러 올 때 또 몇 개를 주는 거야. 헬스펀치가 그러니까 베지밀도 그러고 우유회사, 영지 회사도 그래. 형은 냉장고에 남은 재고는 가끔 꼼꼼하게 셌지만 지하 보일러실에 쌓인 재고와 합산해서 따질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의 성격상 귀찮아서 안 할 사람은 아니야. 그 정도로 셈에 밝지 못했어. 숫자를 말해줘도 잘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어. 자기 통장에 얼마가 입출금 되었는지 내게 물어보고서야 알 곤 했으니까. 복잡한 내용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대신 나더러 속이면 죽이겠다고 엄포만 놓는 거야. 죽어라 일하고 돈 버는 재주는 있는데 돈의 실마리를 조이는 재주가 모자란 거지. 게다가 납품업자들도 나를 부추겼어.


“이건 나가시 말고 니 먹으라꼬 주는 기다. 나가시 절대 모른다. 걱정 말고 팔아서 니 어매 갖다 디리라.”


물건 값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오백 원짜리를 팔면 오백 원이 그냥 내 돈이었어. 장부에 적힌 재고는 형에게 입금하고 덤은 사물함에 고이 숨겼어. 덤으로 오는 것과 월급을 합하면 많을 땐 엄마 월급보다 많이 벌 때도 있었어. 그래 봐야 장깨 월급보다 적고 은행의 그녀 월급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어. 때밀이 기술을 배우려면 적은 월급을 견뎌야 하니 별 수 없었어.


장부 메뉴 중에서 <오늘의 중요한 일>이라는 빈칸이 있었어. 처음엔 그냥 넘어가다가 어느 날부터 그날그날의 삶을 상징하는 낱말 몇 개씩을 채워 넣어 보았어. 은행의 그녀에 관한 게 가장 많고, 읽은 책에 관한 것, 엄마와 동생들, 장깨와 구두 공장, 청바지 공장 친구들 이야기였어. 또 자연스럽게 내가 쓴 돈도 기록하게 되더라. 장깨랑 포장마차에서 먹은 참새구이, 오뎅탕, 쉬는 날 집에 갈 때 탔던 버스요금, 꽃 편지지 값, 그녀에게 F.R. 데이비드의 노래 WORDS를 불러주려고 산 팝송 책값... 내가 목욕탕 이야기를 소상히 되살릴 수 있는 건 그때 적어 놓은 <오늘의 중요한 일> 칸 덕분이야. 그 가계부를 디자인한 사람은 그 칸이 그렇게 쓰일 걸 상상이나 했을까.



22. 편지를 쓰면 생기는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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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아가씨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사실은 통장의 주인이 아니며 대학생도 아니라고 실토한 건 결국 잘 한 셈이었어. 그녀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거든. 다행이었어. 한편 잠시나마 그녀를 속일까 생각했던 게 후회됐어. 좋아하는 사람을 속이면 안 되지. 진짜 이야기를 감추고 가식으로 편지를 채우는 남자가 연인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되겠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난 왜 거짓말할 생각을 했을까. 그녀 마음을 얻으려면 내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어. 나에 대해 알고 나서 그녀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통장과 대학생이라는 포장이 없는 나를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거야. 물론 결과적으로 이런 걱정은 나만의 걱정이었어. 그녀의 답장 속에 일말의 실망도 드러나 있지 않았으니까. 난 그게 문제야. 걱정이 앞서가거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상정해 놓고 미리 전전긍긍하잖아. 나의 실체를 알면 그녀가 싫어할 거라고 결론 지어 놓고 감출 거짓말이나 하려 하지. 거짓말 한 걸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해. 그러니 머리가 복잡하지. 아예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거야. 가난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감추는 일이 내겐 더 쉬웠던 거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어? 더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녀를 위해서라도. 편지에서 그녀가 부탁한 건 딱 하나였어. 편지를 우표 붙여 보내고 싶다는 것. 은행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한 소리 들었나 봐. 고객에게 불필요한 응대를 하는 건 금지랬어. 돈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행원과 사사롭게 나눈 말을 구두계약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다툼이 있다는 거야. 또 은행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아는 것도 싫댔어. 난 목욕탕 주소를 알려줬고, 자연스레 목욕탕에서 일하는 것도 그녀가 알게 되었어. 다음날부터 목욕탕 카운터 이모에게 편지가 오는지 물었지.


“근데... 네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목욕탕 사람들 중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어. 다들 나를 남탕 뽀이라고 불렀거든. 목욕탕에서 내 존재감은 그런 거였어. 마당을 쓰는 마당쇠나 땅을 일구는 돌쇠처럼 고유한 이름 대신 기능에 따라 호칭이 정해지는 존재. 카스트제도로 치면 수드라에 해당하려나. 아냐, 수드라는 숫자라도 많잖아. 우리나라에 나 같은 목욕탕 뽀이로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젠장, 난 그럼 불가촉천민이겠네.


“병신아. 생각 많은 것도 병이다. 이름 물어보면 알려주면 되지, 새꺄. 수드라가 뭐? 이 새낀 툭하면 신세타령이야. 근데 니들 그러다 연애하겠다? 목욕탕 뽀이랑 은행 아가씨라... 햐, 삼삼한데?”


장깨 말대로 난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탈인지도 몰라. 생각이 많다는 건 궁상스럽고 질척거린다는 말 같았어.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운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 내 현실이 그랬거든. 개선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실. 여기에서 내가 마음껏 징징대지도 못한다면 이 피곤한 삶을 어떻게 견딜까 싶었어. 어떤 삶이든 비극의 틀 안에서 해석하면 신기하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잖아. 세상엔 온통 비극 투성이일 거니까. 내 삶도 비극이지만 더 비극적인 삶을 보면 위안이 되지. 소설 <가난한 사람들>도 그랬어. 은행원 부모에게 태어나 안정적으로 자란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가난해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그 소설에 빠진 건 위로를 찾고 싶어서였어. 비극의 한가운데에 나를 고정하고 내 주변 인물을 소설에서 찾아 대입해 보았어. 의외로 위안이 되었어. 고등학교를 못 간 현실, 겨우 쌀 한 가마 반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월급. 이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작가들이 목욕탕 책장 속엔 꽤 있었어. 부자 애인 옆에서 가난한 연인이 기가 죽는 건 결국 돈의 문제일 텐데 나보다 더 가난한 그들도 사랑을 한다는 걸 안 순간, 그 문장들이 얼마나 우아하게 보이던지! 주인공도 죽기는 하지만 굶어서가 아니었어. 사랑 때문에 기꺼이 선택한 죽음이었지. 그래, 가난해도 사랑은 할 수 있어. 묘하게 위안되는 순간이었어. 다만 안타까운 건 그 위안이 정작 그녀를 떠올리면 황급히 사라진다는 거. 그녀를 떠올리면서 불우한 현실을 잊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한숨이 나오는 거야. 그래도 난 그녀와 연애를 하고 싶었어. 얼굴에 비극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와. 불우한 나와 그렇지 않은 그녀는 대등한 수평관계라기보다는 상하로 나뉘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불편했어. 지난번 지하다방의 그녀와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거든.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차이가 많았어. 가난한 데다 부모의 보살핌으로부터 차단된 채 마담에게 학대를 받은 여자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능력도 있는 여자. 박복과 축복의 차이가 사람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을까. 그래서 지하다방의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땡삐를 무작정 따라 간 건 아닐까. 땡삐의 돈과 보살핌이 좋아서. 은행의 그녀였대도 땡삐를 따라갔을까. 그럴 것 같지 않았어. 그녀는 사랑받고 자랐기 때문에 보살핌이나 돈이 선택을 바꿀 만큼 절실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의 결핍도 그녀에겐 별 문제 아닐 수 있는지 몰라. 그녀를 만날 땐 나도 나의 불우라는 가면을 벗자고 생각했어.


과연 며칠이 지나 그녀의 편지가 왔어. 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어. 몇 달 전 지하다방의 그녀에게 보냈던 그런 편지들이 다시 이어졌어. 내가 혹시라도, 국문과 대학생이 된다면 어떻게 편지를 쓸지 생각해 봤어. 그런 상상은 씁쓸했지만 한편 들뜨는 일이었어. 나는 한껏 과잉된 감성으로 편지를 썼어.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안나 카레니나가 브론스키를 원망하며 뛰어들었던 기차역에 가 보고 싶다. 혹시 인희씨도 함께 할 의향이 있으신지 같은 내용과 러셀이나 니체라는 작가는 언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든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테레자 같은 여자가 정말 있을지 모르겠다든지. 이런 나와 달리 그녀의 편지는 주로 드라마, 특히 <사랑과 진실>에 집중됐어. 배우 원미경은 예쁘고 이덕화는 멋있다는 내용. 그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인용. 과연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다웠어.


편지지가 한 장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어떤 날은 편지지가 다 떨어져 가계부를 찢어서 쓰기도 했어. 마치 그녀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고개만 돌려도 말이 줄줄 나왔어.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혹은 안 와도. 편지를 다 쓰면 어김없이 P. S.라고 적은 뒤 몇 줄 더 넣었어. 편지도 막 접지 않았어. 마름모나 넥타이 모양으로 접고 접히는 면에는 꽃이나 나비 그림도 그려 넣었어. 봉투에 넣고 풀로 붙이고 돌아서면 또 못 쓴 내용이 생각나기도 했어. 그러면 바로 편지지를 꺼내 다음 편지를 쓰는 거야. 그래도 더 쓰고 싶어 안달이 났어. 일방적으로 편지가 갈 뿐 답장을 못 받던 지하다방 그녀와 달리 그녀의 문장을 읽다 보면 저절로 미소가 일었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전에 없던 습관을 만드는 일이기도 한가 봐.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긴 거야. 관찰한 걸 문장으로 구상했다가 한가할 때 탈의실 평상에 배 깔고 엎드려 편지를 썼어. 예를 들어 어느 노인의 때를 밀면서 만약 이 장면을 편지로 쓴다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멋있을까, 생각해 보는 식이지. 전 같으면 숨기고 싶었을 목욕탕 일도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됐어. 창피함을 드러내는 순간 면죄부를 받는 기분이었거든. 또 그녀는 어떤 작가 스타일을 좋아할지 짐작해보는 것도 즐거웠어. 도스토옙스키를 흉내 내서 <오늘 제가 때 민 노파의 주름진 피부에 계급에 있다면. 그의 겨드랑이야 말로 황제일 겁니다.>라고 낭만을 부려볼까, 아니면 밀란 쿤데라 식으로 <죽어가는 노파의 삶이 주름진 피부 아래에 숨겨져 있다.> 고 염세적인 척해볼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즐겁기까지 했어. 그녀에게 써먹을 문장을 고르기 위해 더 열심히 책을 읽었어. 그녀 덕분이야. 그녀가 아니면, 장깨 녀석 말대로 연애편지가 아니라면 도저히 날 리 없는 기운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 편지를 통해 그녀의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 대학에 다니는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고 마당 감나무에 벌레가 생겨 아빠가 약을 쳤다는 것, 엄마가 두 해 전 천만 원 주고 산 아파트가 그 사이에 두 배로 올랐는데 그걸 팔아 새 아파트 두 채를 사서 일단은 전세를 줬지만 그중 한 채는 언니, 다른 한 채는 자기의 시집 밑천으로 주시기로 했다는 것과 그녀 가족이 나가는 교회와 자주 가는 고깃집이 어딘지도.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의 집은 드라마 <사랑과 진실>에 나오는 부잣집과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파가 있는 넓은 응접실이 있고 벽난로 옆에는 TV가 있지 않을까. 책장엔 책이 가득하고 LP가 가득한 방에는 멋진 오디오도 있어서 기분에 따라 음악을 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을이면 가지가 휘도록 달린 감을 따서 마당에 있는 유럽풍의 하얀 식탁에 둘러앉아 웃으며 먹는 집. 주말엔 갈비를 먹으러 가고 일요일엔 성장을 하고 교회에 가는 집. 그렇게 단란한 가정의 그녀가 지하 단칸방에 대해 알까. 그 방엔 남편을 잃은 여자가 있는데 집이 좁아 다섯 아이 중 세 아이만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세 아이 중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못 가고 목욕탕 뽀이가 됐다는 걸. 뽀이 주제에 은행 다니는 아가씨와 연애할 꿈을 꾼다는 걸.


아이코, 어느새 난 또 장깨가 놀려먹던 생각 병이 도진 걸 깨달았어. 무슨 생각을 하면 꼭 비관의 결말을 향한단 말야. 진짜 난 왜 이 모양일까. 틈만 나면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불러내 우울 드라마를 연출하잖아. 금세라도 장깨가 욕을 해 줄 것만 같았어. 병신아. 어지간히 해라, 새꺄. 피식 웃음이 나왔어. 그래, 그녀의 유복함이 운 좋게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결과인 것처럼 나의 불우도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불우한 팔자에 대해 탓할 사람은 정작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 아닌가. 시골에서 태어나 교육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시집 가 다섯 아이를 낳고 과부가 되어 서울로 이사 온 엄마와 원래 서울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어 중산층이 된 인희씨 어머니의 삶은 다르잖아. 그걸 굳이 비교하며 좌절하는 아들을 본다면 우리 엄마 심정은 어떨까. 그녀의 결혼 몫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아파트를 생각하면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안 자랑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잘못은 아니고, 가난은 내 사정일 뿐이잖아. 오히려 나의 자격지심을 들키면 그녀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에 대해 좋은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녀는 가끔 은행이 늦게 끝나면 목욕탕 주변에서 기다렸다가 나를 만나고 가곤 했어. 난 덤으로 받은 딸기 우유며 베지밀을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가 버스 타는 그녀 손에 쥐어주곤 했지. 그 시각에 다방을 가자니 돈이 없고 또 다방 아니면 갈만한 곳도 딱히 없는 동네여서 주로 버스 정류장 근처 골목을 한 바퀴 돌거나 놀이터 벤치에 앉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녀와 데이트할 일이 생겼어. 추석이 온 거야. 추석날과 다음 날 오전은 목욕탕이 쉬거든. 며칠 전부터 우린 그날을 기다렸어.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어린이 대공원을 가기로 했거든. 내 일기장에 빨간 볼펜으로 크게 별을 그려 놓았던 날, 1984년 9월 10일 월요일. 그 날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추석 임박하니 목욕탕이 터져나갈 듯 손님이 몰려왔어. 팔이 빠지고 허리가 몇 번은 끊어질 만큼 때를 밀었지. 손님들이 마시고 평상에 아무렇게나 두고 간 음료수 캔이며 요구르트 병을 미처 못 치울 만큼 장사도 잘 됐어. 그리고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오후 4시가 되자 손님이 뚝 끊겼어. 귀향이 시작된 거야. 대목은 대목이라서 평소 한 달 동안 벌 돈이 며칠 사이에 들어왔어. 명절이라고 카운터 이모와 보일러실 형들에게는 떡값이 돌아갔다는 말이 돌았어. 그렇다면 때밀이 형도 나에게 얼마 주려나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어. 명절 끝나면 새꺄, 딴 데로 새지 말고 잽싸게 와서 문 열어. 똑바로 안 하면 죽는다, 는 말뿐. 뭐, 그래도 좋았어. 난 그녀를 만날 거니까! 형이 퇴근하고 난 서둘러 수건을 모아 지하 세탁기에 돌리고 후다닥 뛰어 올라와 목욕탕과 탈의실 청소를 시작했어. 일찍 끝나면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거든. 만나서 내일 있을 첫 데이트 이야기를 하려고. 처음으로 내가 저녁도 사 줄 거였어.


손님들이 많아 청소가 길어졌어. 하지만 잠시 후 그녀를 만날 일을 생각하니 힘이 나더라. 그런데 청소가 끝날 무렵 카운터에서 인터폰이 오는 거야. 사장 심부름이 있으니 빨리 내려오래. 내려가니 현관에 설탕, 기름, 과자 선물세트가 쌓여 있었어. 그것들을 사장 차로 나르래. 선물에 따라 트렁크에 실을 것과 뒷좌석에 실을 걸 구분해줬어. 비싸 보이는 건 뒷좌석에 싣는 거야. 선물을 다 싣고 올라가려는데 차에 타래. 그의 추석 인사 길에 데려갈 건가 봐. 나 잠시 후 그녀를 만나야 하는데...? 설마...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겠지?


사장은 경찰서로 가 차를 세우더니 나 더러 트렁크에서 선물세트 다섯 개를 들고 따라오랬어. 파출소 안에 들어간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나왔어. 사장이 그에게 선물 세트를 건네자 몇 번 사양하는 흉내를 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받아서 이미 몇 개의 선물세트가 즐비한 책상 아래에 놓았어. 사장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는 또 굳이 붙잡으면서 다방에 전화를 걸어 커피를 두 잔 시켰어. 사장은 나더러 들고 온 선물을 파출소 안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리라고 시켰어. 다 돌리고 나니 밖에 나가서 기다리래. 밖에 나와 사장 차 옆에 서 있는데 잠시 뒤 목욕탕 지하 다방 마담이 커피를 들고 들어갔어. 저 커피 마시고 늦게 나오면 어쩌지. 난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섯 시 반쯤 그녀를 만나려면 지금쯤 은행 앞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커피 마시고 나온 사장에게 조심스럽게 여기서 먼저 가도 되겠느냐고 말해 보았어.


“왜? 너도 시골 내려가냐?”

“아, 그건 아닙니다만. 제가 지금 갈 데가 있...”

“알았어, 인마. 금방 끝나.”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사장 표정이 일그러졌어. 참을 걸 괜히 얘기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럼 남은 선물이라도 하나 줄지도 모르잖아. 면박당한 티를 최대한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를 따라나섰어. 경찰서 다음으로 간 곳은 라이온스 클럽이었어. 거기를 들렀다가 또 어느 사무실로. 거기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갔어. 무겁지도 않은 선물이라 양손에 들으면 한 번에 열 개도 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장은 언제나 비싼 선물 한 두 개만 들고 나머지는 나에게 들렸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두 손을 움켜잡고 느끼한 악수를 하고 형식적인 덕담을 한 다음 굳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야 밖으로 나왔어. 그러다 보니 일곱 시가 넘었어. 더구나 마지막에 들른 곳은 목욕탕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는데 사장은 나더러 버스 타고 들어가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버스를 탈 수가 있나,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은행 앞으로 갔지. 그녀는 화가 많이 나 있었어.


"아,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그만... “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요?”

“아, 저...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님이 심부름을...”

“그럼 말을 해 줘야죠. 내게 그럴 요구 할 권리가 있죠?”

“아, 그게... 전화드릴 틈도 없이 심부름을 가느라...”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내 심정이 어땠을 거 같아요?”

“...”


어쩌면 저렇게 드라마 대사 같은 말만 골라서 똑똑하게 말을 잘할까.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배우 같았어. 도도한 원미경을 연기하듯 그녀는 벌떡 일어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 같이 밥을 먹기로 했는데. 그냥 갈 건가? 따라가서 한 번 더 미안하다고 할까? 드라마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하던데. 아냐,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니 눈에 안 보이는 게 더 좋을까? 이게 드라마 속 한 장면이라면 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게 서 있는데 몇 발짝 걷던 그녀가 확 돌아보며 소리쳤어.


“어떡할 거냐고요.”

“네? 뭐를...”

“내일 말이에요. 내일도 이렇게 늦게 나올 건가요?”

“아, 내일은...”

그 순간 때밀이 형이 떠올랐어. 똑바로 해 새꺄, 똑바로! 형이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뒤통수도 한 대 쳤겠지.

“그러니까... 내일은 똑바로 할 거죠?”

“아, 네...”


그녀가 혼자 어둠 속으로 걸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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