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편지봉투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어. 연두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지, 그렇게 진한 색은 또 아니야. 뭐랄까, 덜 익은 여름 풋콩을 곱게 갈아 밀가루와 섞어 풀을 쑨다고 생각해 봐. 그걸 하얀 창호지에 먹이고 빳빳하게 다림질을 하면 만들어질 것 같았어.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에서나 썼을 법한 그런 봉투. 속 편지지는 봉투보다 더 고급스러웠어. 장미가 반투명으로 그려진 부드럽고 단아한 질감. 이런 건 절대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위엄마저 느껴졌어. 나만의 박물관 가장 깊은 곳에 고이 모셔놔야지. 하긴, 은행원이면 월급도 많을 텐데 이 정도는 살 능력이 될 거야. 내 입장에서는 그냥 공책 한 장 주욱 찢어 쓰면 더 편할 것 같은데.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 모두가 행복한 고민이잖아. 속 편지지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열었어.
To 선진씨.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마침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F.R. David의 words가 나오고 있어요.
선진씨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책!
그 책을 사자마자 책 표지를 쌌어요.
그러면 항상 깨끗한 책을 볼 수 있겠죠.
이 책은 저에게 특별한 책이에요.
이 책은 선진씨 덕분에 알게 된 책이니까 특별히 포장지를 고민해서 골랐어요. 예쁜가요?
이 책을 읽으면서 선진씨를 마까르에 비교해보았어요.
그렇다고 저를 마까르가 사랑하는 바르바라에 비교한 건 아니랍니다. 오해하실까 봐(메롱!)
솔직히 마까르의 사랑을 받는 바르바라가 부럽긴 해요. 그래도 낭만이 결여된 사랑은 싫어요.
저보다 저를 더 사랑해주는 것까지는 바라진 않지만 그래도 주는 만큼은 받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저는 바르바라만큼 가난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선진씨도 마까르만큼 가난하지 않아 보이고요.
우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해요. 알았죠?
지금 선진씨는 저보다 더 부자예요.
선진씨의 한 달 예금이 제 월급보다 많은 거 모르죠?
선진씨가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해 봤어요. 혹시 (몰래바이트 과외?)
가난한 사람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선진씨는 이런 책이 좋으세요? 책이 좀 어두운 것 같아요.
시간이 되면 선진씨와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좋아하는 책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F.R. David 테이프를 사야겠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 선진씨에게 첫 편지를 쓰던 오늘이 생각날 테니까요.(사 달라는 말은 아니랍니다. 메롱!)
그럼 이만 총총
P.S : 책 빌려달라고 투덜대서 미안해요.(아직도 좀 삐쳐있지만).
*
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편지가 또 있을까? 내가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이야. 처음으로 나를 누군가의 부속물이 아닌 내 고유의 감정으로 특정해 준 사람. 나 때문에 책을 사고, 나 때문에 포장을 하고, 나 때문에 고급 편지지를 고르는 사람. 나를 위해 F.R. David 노래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나의 그녀라니. 테이프, 그게 뭐든 사 드릴게요. 하늘의 별보다 더 높이 있더라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런데 선진씨? 선진은 때밀이 형의 이름이야. 아, 그녀는 아직 내가 통장 심부름을 하는 걸 모르지. 내가 통장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돈도 잘 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과외를 하는 대학생? 그러고 보니 나를 오해할 만 해. 그렇게 안 본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몸에서 내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어. 그다음엔 목욕탕 창밖으로 휙 날아가지. 바람에 떠밀려 너울거리다 길가에 떨어져. 오가는 이들에게 밟히고 치이다 하수도 구멍에 빠질 거야. 더럽고 차가운 물을 따라 멀리, 더 멀리 떠밀려가다가 어딘가 어두컴컴한 시궁창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나 자신이 그려졌어. 나도 아무 시궁창에나 처박히고 싶었어. 긴 한숨 몇 번에 눈물이 났어. 멈출 기운도 없었어. 옷장에 기대어 훌쩍거리는데 탈의실 문이 벌컥 열렸어. 탈수가 끝난 수건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보일러 보조 형 손에 들려 있었어. 아이고, 궁상떠느라 빨래 찾아오는 것도 잊고 있었네. 벌떡 일어나 달려가 바구니를 받으면서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했어. 목이 멘 소리였나 봐.
“어디 아프냐?”
“아, 아닙니다...”
“저녁은 먹었냐?”
“먹었습니다.”
“또 라면이냐?”
“네...”
“개 씹쌔끼들. 밥이라도 먹여주면서 부려 처먹든지. 씨팔 새끼들.”
“...”
“부탁 좀 하자. 내가 오늘 집에 좀 갔다 와야 되는데 내일 새벽 4시에 보일러 혹시 꺼졌으면 탄 한 자루 넣고 점화 좀 시켜라.”
“알겠습니다...”
형이 건네는 보일러실 열쇠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옷장에 기대 한참 더 있었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 널어야 할 수건이 눈에 밟혔지만 모른 척했어. 이럴 때 일을 하면 내가 더 서러울 것 같아서. 이럴 때 고향에 있었으면 소 끌고 뒷산에 올라가서 좀 앉아 있으면 좀 풀리는데. 아무도 없는 산등성이에 소를 묶어놓고 소가 풀을 뜯는 동안 멍하게 앉아서 동네를 내려다보는 거야. 그러면 응어리가 슬며시 사라지곤 했거든. 서울에 안 왔으면 목욕탕에도 안 왔을 텐데. 어쩌면 고등학교에 갔을지도 몰라. 고등학교? 아, 우리 형편에 고등학교는... 어려웠겠다... 잠시 고향을 떠올려봤어. 그래 봐야 거기까지였어. 여긴 목욕탕이고... 마냥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어.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수건을 널었어. 탁탁 털어서 네 끝을 맞춘 다음 바닥에 줄을 맞췄지. 그냥 하는 거야. 그런 거라도 해야 월급을 받을 테니. 그래야 엄마한테 갖다 드리지. 그래야 쌀을 사고 동생들을 키우지. 왜 내 삶은 이렇게 막막할까. 그녀가 독후감 써 달라고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쓸 기분이 아니었어. 어두운 골방에서 허깨비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그냥 우울했어.
수건을 널고 편지를 대충 옷장에 던져 넣은 채 불 끄고 누웠어. 길 건너 장깨네 중국집 2층 술집에서 나오는 취객들의 노랫소리가 싸구려 네온 조명과 섞여 탈의실 천정에 일렁였어.
잊어야, 잊어야만 될 사랑이기에
깨끗이 묻어버린 내 청춘이련만
그래도 못 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빨강, 초록, 노랑, 분홍이 뒤섞인 네온 불빛과 사랑 타령 노래. 장깨의 애창곡이었어. 그가 얼큰해지면 담배를 입술 맨 끄트머리로 문 채 부르곤 했지. 그가 노래를 부르면 간신이 매달려 있는 담배가 위아래로 까딱까딱하다가 재를 떨구곤 했어. 장깨가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도 그 노래를 좋아했지. 하지만 그날은 그 노래도, 네온도 역겹기만 했어. 그래, 니들은 조오켔다. 사랑도 하고. 그래, 사랑 존나게 하고 잘들 살아라. 이불도 깔지 않고 널브러져 있다가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어. 4시에 보일러 보려면 빨리 자야 되는데 마음만 급할 뿐, 몸은 뭔가에 눌린 것처럼 잠이 오지 않았어. 그렇게 늦게까지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싶은 순간이 금세 지나고 자명종 소리에 깼어. 막 어지러운 꿈을 꾸던 끝이었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에게 쫓기다 구덩이에 빠지는 꿈. 다시 도망가려고 해도 다리가 안 움직이는 거야. 결국 잡혔지. 괴물이 내 발가락부터 뜯어먹어 들어왔어. 다리를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는 거야. 손으로 한쪽 무릎을 잡아 간신히 빼내면 다른 다리를 괴물에게 물어뜯기는 꿈이었어. 차라리 다 먹혀버리라지. 살아서 뭣해. 하지만 꿈이 문제가 아니었어. 4시였어. 아, 보일러! 보일러가 꺼졌으면 점화를 시켜야 해. 그건 내가 아직 서툰데. 보일러 조수 형이 전에 한 번 가르쳐 주었는데 막상 내가 하면 잘 안되더라고. 그래서 욕을 먹었지. 만약 이번에도 보일러를 못 살리면 큰일이야. 물을 못 데우면... 문을 못 열고, 아, 상상하기도 싫었어.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속옷만 입은 채 아직 어두운 지하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어. 보일러실 문을 열어보니 다행히 아직 불이 약하게나마 살아 있었어! 천만다행이었지 뭐야. 보일러실 화구를 열었어. 열기가 확 느껴졌어. 바로 갈탄 부대 하나를 뜯어 쏟아 넣었어. 먼지와 검댕, 그리고 맹렬하게 갈탄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뒤섞여 보일러실에 차올랐어. 컥, 숨이 막혔어. 당장 보일러실을 나가고 싶지만 아직은 안 돼. 바닥에 떨어진 갈탄 조각들을 빗자루로 쓸어 양동이에 모아놓아야 하거든. 보일러 기사님은 이걸 특히 강조했어. 여기저기 탄 조각이 굴러다니면 불이 날 수도 있대. 불나면 목욕탕은 끝장이거든. 만약 그렇게 되기라도 하면... 기사님이 나를 저 아궁이에 처넣어 태우고도 남을 거야. 성질이 불같은 보일러 기사는 조수에게 아주 엄격했어. 실수를 하면 욕이 기본에 정강이를 걷어차는 건 물론이고 머리채를 잡아 벽에 박는 것도 봤어. 시팔 놈들. 왜 때밀이 형이나 보일러 기사나 윗대가리 새끼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지들이 꼴난 월급 준다고 사람을 두들겨 패잖아. 그래도 조수 형은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 보일러 기술을 배워야 하거든. 기사 자격증을 따는 게 형의 목표였어. 나도 때밀이를 배워야 하니 어쩔 수 없었어. 때리는 것에 맞서기보다 한 대라도 덜 맞는 방법을 찾았어. 노예근성이지. 언젠가 나도 어엿한 때밀이가 되면 어디 두고 봐라, 나쁜 놈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비질을 했어. 근데 갈탄 조각이 돌덩이처럼 무거워 잘 안 쓸리는 거야. 비질은 마음대로 안 되고 연기가 눈을 찔렀어. 결국 눈물범벅이 되고 나서야 일을 마치고 목욕탕에 올라왔지. 거울을 보니 몰골이 험했어. 검댕이 묻어 거뭇거뭇한 속옷에 눈물이 몇 줄기 흐른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까지. 피에로가 따로 없었어.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 서둘러 탕에 물을 받고 사우나 전원을 올렸어. 건물 앞 버스정류장의 담배꽁초도 쓸었지.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책이나 보려고 책장 앞으로 가는데 문득, 아, 그녀의 책이 있었지? 옷장에서 그녀의 책을 꺼냈어. 어젯밤만 해도 그 책을 거들떠보기도 싫었는데 밤사이 마음은 거의 누그러져있었어. 신기했어. 어젠 금세라도 말라죽을 것처럼 궁상스럽던 내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냥 잔 것 밖에 없는데? 그녀에 대한 감정도 더 단순해진 느낌이었어. 밤에 한 거라고는 허공 속 그녀를 향해 주먹질 몇 번 하다 잠든 거랑 아침에 보일러실 간 것 밖에 없거든. 아하, 잠깐이었지만 잠도 잤지? 이래서 마음이 복잡할 땐 일단 자고 보라는 건가? 아무튼 마음이 부대끼지 않으니 살 것 같았어. 오히려 어젯밤의 그 좌절이 민망해지더라. 다음 날이 되면 이렇게 별 일 아닌 게 될 일인데 어제는 뭐 그리 궁상을 떨었을까. 그것도 누가 말해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았다는 게 더 창피했어. 병신 새끼. 어린애처럼 이게 뭐야. 지질하다, 지질해. 난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그깟 책만 해도 그래. 목욕탕 사장이 책을 찾으러 올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거든. 오더라도 백 권이나 되는 책 중에서 그 책을 일부러 찾을 가능성은 더 없지. 그런데도 난 책을 못 빌려준 거야. 조금이라도 나에게 힘든 상황이 생길까 봐 무서워서. 보일러도 봐. 안 꺼지고 있었잖아. 난 보일러가 무조건 꺼져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어젯밤에 신경 쓴 거야. 꺼졌으면 점화를 누르면 되고 안 꺼졌으면 갈탄만 넣으면 되는데도. 걱정을 만들어서 하는 꼴이라니.
난 그녀의 편지가 마치 없던 일이었다는 듯 책에 집중했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맹렬하게 보내는 편지들을 보니 내가 지하다방 그녀에게 한 게 떠올라 때론 우습고 때론 연민이 느껴졌어. 주인공의 편지 중에는 지금의 나 자신과 똑같을 만큼 감정이입되는 장면도 있었어. 말단 공무원인 주인공이 어떤 실수를 해서 높은 사람 앞에 불려 가 야단을 맞는 장면이 그랬어. 주인공의 단추 하나가 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똑 떨어지거든. 근데 하필이면 상급자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네? 당황한 주인공은 단추를 집으려고 허둥대지. 그의 가난한 행색을 본 상급자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돈을 줘. 주인공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렇게 말해. 제가 자식을 낳는다면 아버지인 저를 위한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겠습니다. 대신 그 시간에 상급자 나리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시키겠습니다! 아이고, 참. 이런 바보가 어디 있니. 자존감이 하나도 없잖아. 결국 그와 편지를 주고받던 여자는 주인공을 버리고 갑자기 나타난 부자의 청혼에 덜컥. 그를 떠나고 말지. 사랑을 잃은 주인공은 절규 해. 근데 불쌍하기보다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어. 거 봐라. 너 지질할 때부터 내 알아봤다는 느낌. 사랑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성찰하지는 못하고 누가 시키는 건 잘 하지만 스스로 사랑을 개척해 나가지는 못하는 주인공. 그의 편지들은 하나같이 감정이 과잉되어 있거나 촐싹거림이 느껴져. 뻔히 알만한 자기의 가난을 감추고 포장하면서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안 해. 심지어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자기의 가난을 합리화하지. 소설이니까 작가가 마음대로 꾸몄겠지. 그래서 주인공에게 정이 더 갔어. 나와 너무 비슷했거든. 가난하면서도 예민한 그는 누가 자기에게 가난 비슷한 말이라도 언급하면 파르르 화를 내. 그러면서 내가 가난한 데 당신이 보태준 거 있냐고 덤비지. 열등감이 감당 안 되니까 마음속에 숨겨 둔 자격지심을 불태우는 거야. 그걸 또 편지로 써서 연인에게 일러바쳐. 어쩜 나와 그리 똑같은지. 대부분의 소설 주인공은 멋있고 겸손하고 지성이 풍부하고 정의감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도스또옙스키는 꼭 그렇지 않았어. 그래서 그의 소설들이 좋았어. 왠지 그가 내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것 같았거든. 같은 욕이라도 도스또옙스키한테 먹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내편 같이 느껴지는 거야. 죽비를 든 스승 같았어. 내가 쪼잔해질 때마다 등짝을 후려치는 스승. 나도 그놈의 자격지심 때문에 나를 계속 파괴하고 있잖아. 고등학교 못 간 일, 목욕탕 뽀이로 일하는 일. 그건 내가 선택했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의 결과일 뿐인데 난 계속 부정하는 거야.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가해자는 없어. 그냥 내 팔자가 더럽게 꼬였다고 스스로 결론 내린 거야. 결론만 내리면 뭐해? 꼬인 팔자를 풀어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은 일부러 모른 척하잖아. 사실 처음부터 이 부분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어. 양아치처럼 골목길을 쏘다닐 때에도 문득문득,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이러는 게 원래 내 모습이 아닌데. 계속 이러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 지금은 폼 나 보이는 이런 짓이 언제까지 그렇게 보일까? 어쩌면 난 주어진 불행과 맞서기 위해 담배 피우고 침 뱉는 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고 느끼는 나를 감추고 싶었는지도 몰라.
책장 속 책에도 온통 그런 이야기들이었어. 흔들리거나 떠밀려가는 주인공과 그의 삶을 지탱하는 주변 인물의 이야기. 또 그들의 삶을 더욱 성장시키는 사건들. 그런 걸 볼 때마다 지금 나의 투정들은 호강에 겨워보였어. 해 봐야 바뀌지도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몸부림. 그걸로 가득 찬 비루한 일상이 내 삶을 이루고 있는데 그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무력하잖아. 은행원 아가씨에게 고상한 대학생인 척하고 싶은 나와 때밀이 형에게 욕먹을 때 질질 짜는 내가 한 몸에 공존하고 있는 거야. 나의 실체를 알고 나니 비참했어. 바닥에 닿은 것 같아서. 그러다 서서히... 덤덤해져 갔어. 목욕탕 뽀이라는 걸 숨기고 과외로 돈 잘 버는 대학생인 척하면서, 들킬 때 들키더라도 그녀와 어떻게든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이제 점점 없어졌어. 나 같은 사람은 사랑이란 것도 못해보겠지, 싶은 마음에 잠시 속이 상했지만. 대신 그녀가 너무 좋아졌을 때 내 거짓말이 들키는 상황보다는 아예 지금 접는 게 덜 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연인으로 그녀를 포기하니 마음은 편해졌어. 이제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녀만큼 좋은 건 아니지만 전에 지하다방 그녀에게 쓰다 남은 편지지가 있었어. 편지지에 바로 쓰는 건 자신이 없어서 일기장에 먼저 써보았어.
To 인희씨.
인희씨 편지를 읽는 이 순간도 제 삶은 절실합니다.
제 삶은 바닥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돈입니다.
제 삶은 추락하고 있고 곧 바닥에 닿습니다.
인희씨가 일일이 세어주시고 예금해주시는 그 돈은 제 돈이 아닙니다.
저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의 돈입니다.
비록 제 돈은 아니지만 인희씨가 돈을 셀 때마다 손끝을 지나는 지폐의 당당함이 부러웠습니다.
인희씨가 사서 읽으신 <가난한 사람들>의 마까르와 저는 비슷합니다.
솔제니친 소설 속 죄수들과도요.
비유가 과하다고 놀리신다면... 그래서 제 현실이 마까르보다 낫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습니다.
저는 대학생도, 아니 고등학생도 아닙니다.
지금은 마까르의 삶 만도 못합니다. 나중에도 장담 못합니다.
그 점에서 인희씨를 두근거림으로 대했던 일이 민망합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제 민망함의 책임이 인희씨에게 있지 않으니까요.
그건 제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두 해 전 떠나와야만 했던 고향에서의 피폐한 현실과의 싸움에서 제 어머니가 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몫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만 오천 원의 남은 생활비와 어느 용한 의사에게서도 치료받지 못할 열등의식뿐입니다.
그러면 안녕히.
P.S : 국문과냐고 물으셨을 때 그 자리에서 저를 밝히지 못한 영악함을 탓해주십시오.
인희씨 덕분에 며칠이나마 제가 정말 국문과 대학생이 된다면!이라는 상상 속에서 즐거웠다는 말은 감출 수가 없군요.
*
아이고, 민망해라. 그녀에게 쓴 이 편지를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단다. 근데 이걸 빼면 이야기가 돼야 말이지. 더 최악인 건 이 내용이 초안으로 일기장에 써 놓은 거라는 거. 편지지에 옮겨 쓴 건 이것보다 더 유치했지. 뻔한 내용에 온갖 미사여구를 욱여넣은 문장 좀 봐. 짧게 끊어 써야 할 문장을 여러 개 겹쳐 꼬아 놓은 것도 좀 이상하지? 그런데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결정인 이유가 있었어. 이 문장들은 내가 직접 지은 문장이 아니거든.
솔직히 난 내 마음을 문장으로 지어낼 자신이 없었어. 써 봤어야 말이지. 남이 쓴 걸 보고 읽을 줄은 알아도 쓰지는 못 해. 특히 나를 드러내는 건 더욱. 결국 어쩌겠어? 베끼는 거지. 이 편지는 밀란 쿤데라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문장을 섞어 쓴 거야. 차마 그녀가 방금 읽었을 <가난한 사람들> 문장까지는 못 베끼겠더라고. 주어부와 목적부가 바뀐 번역 투의 문장, 앞 뒤 문장의 매끄럽지 않은 어울림만 봐도 베낀 게 티가 나지? 차라리 우리나라 작가들의 문장을 베끼면 나았을 걸. 그나마 이거 쓰는 데도 하루 종일 걸렸어. 지루한 책을 읽긴 읽어야겠는데 썩 내키지 않을 때 요즘도 내가 쓰는 방식이란다. 읽을 책 속의 명문장을 뽑아 두었다가 그걸로 일기나 편지를 써보는 거지. 그럼 더 잘 읽히거든. 예를 들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같은 책 같은 거 말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아이고, 요즘은 또 어떤 책을 읽길래 이런 편지를 썼느냐고 놀려. 이 습관이 시작된 것도 그녀 덕분이란다.
편지를 편지봉투에 넣고 풀로 주둥이를 붙인 다음, 그녀 책 사이에 끼워 은행으로 가면서 난 몇 번을 망설였나. 대학생이 아니라는 말은 그대로 두고 고등학교도 못 갔다는 말이라도 좀 뺄까, 하고 얼마나 고민했던가. 학교야 그렇다 쳐도 돈까지 없다는 말은 너무 밑바닥을 보여주는 표현 아닐까? 너무 솔직한 게 오히려 깔봄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아님 말구지, 뭐. 난 당당히 들어갔고 그녀에게 책을 건넸어. 하루만의 답장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라고 느꼈을까, 그녀는 환하게 웃었어. 내가 급하다 싶게 돌아서는데 그녀가 불렀어. 그녀가 웃으며 통장을 내밀었어. 글쎄, 통장을 챙기지도 않고 돌아섰던 거야. 막 시작되려는 로맨스를 내 발로 걷어차고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통장을 받고 쏜살같이 목욕탕으로 돌아왔어. 형이 퇴근하자마자 그날은 청소도 안 하고 수건만 대충 던져 널고 잤어. 쭉 뻗어서. 전날 못 잔 잠까지.
20. 멘토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아무리 낯선 환경이라도 입문기가 지나면 익숙해지게 마련이지. 목욕탕에서의 나도 그랬어.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게으름을 피우고 형의 눈을 피해 가며 책을 보는 요령까지 영악하게 알아갔지. 근데,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게 있었어. 목욕탕 배수구 청소할 때마다 어김없이 짜증이 솟구치는 거야. 이상해. 다른 일은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배수구 청소만 하면 꼭 짜증이 나더라. 배수구는 탕 전체에 있던 땟물이 최종 모여 배수관으로 빠져나가는 곳이야. 항상 검은 때 덩어리가 끼지. 보기가 안 좋겠지? 그래서 모든 목욕탕의 배수구는 손님들 눈에 안 보이는 구석에 설치되어 있거든. 탕 안엔 습기도 많고 조명도 흐린데 구석에 있으니 더 안 보여. 근데 때밀이 형은 항상 여기를 검사하는 거야. 내가 청소를 덜 했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 배수구에 머리를 박으라고 시켰어. 딱딱한 타일에 머리를 박으니 죽을 맛이지. 그런데 더 힘든 건 배수구 냄새야. 썩는 냄새. 거길 닦는 게 아주 어려웠어. 구멍이 작아 솔이 안 들어가거든. 그래서 칫솔 끝에 휴지를 돌돌 말아 닦아내는데 가끔 휴지가 물에 녹으면서 배수구로 흘러내려가거든. 막히지. 막히면 바닥을 깨야 할 거 아냐? 그 공사비는 때밀이 형이 내야 한대. 그러니 형은 절대 배수구가 막히면 안 되는 거야. 한 번은 손님들이 버린 일회용 때수건이 배수구를 막은 적이 있었어. 공사를 했고, 형이 돈을 물었지. 화가 난 형은 그 뒤로는 배수구 입구에 목욕의자를 쌓아버렸어. 어차피 그렇게 막을 거면 배수구를 굳이 청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형이 시키니 별 수 있나. 결국 손가락 끝부분에 휴지를 돌돌 말아 구멍에 넣고 좌우로 휘휘 돌려가며 닦는 거야. 그때 손가락 끝에 느껴지던 물컹함이 싫었어. 내가 적응 안 된 게 그거야. 손가락을 넣으면 소름이 돋아. 배수구멍이 꼭 뱀 대가리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배수구 입구를 청소한다고 해도 입구만 닦는 거라 썩은 냄새는 그대로야. 그래서 소독용 크레졸을 붓곤 했어. 하지만 크레졸 냄새를 맡아본 사람이라면 차라리 썩는 냄새가 더 낫다고 생각할 거야.
청소는 항상 혼자 했으니 나 말고는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배수구를 청소할 땐 꼭 욕을 했어. 대상도 없이 하는 욕은 결국 나에게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발, 지겹다, 지겨워, 짜증 나, 이런 욕을 나에게 했어. 그거야 말로 자학이잖아. 욕이 나오는 걸 어떡해. 욕이라도 하면서 어쨌든 청소를 하긴 하니까. 그렇게라도 견뎌본 거지. 한편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나는 왜 나에게 욕을 할까. 욕을 하게 만든 건 형인데 얻어맞고 쫓겨날까 봐 말을 못 하면서. 이럴 때 내 편을 들어준 사람이 있었어. 내가 휘청거릴 때마다 잡아준 사람. 내가 때밀이 형에게 맞아 눈두덩이 퍼렇게 되었을 때 나보다 더 서러워해 준 사람. 내 열일곱의 멘토.
손님 중엔 밤새 술 마시고 외박하고 아침 일찍 목욕탕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대부분 남자야. 집에 못 갔으니 속옷이 없겠지? 내게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했어. 때밀이 형은 탈의실 뽀이인 나를 심부름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들 땡삐 같은 깡패들이라는 게 문제였어. 칼을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하는데 어떡하겠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한편 돈에 밝은 형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어. 싸구려 양말과 속옷을 떼어다 비싸게 파는 거야. 막상 팔기 시작하자 의외로 잘 팔렸어. 그걸 사는 사람들은 다들 헌 속옷을 버렸어. 난 영업이 끝난 뒤 쓰레기통에서 그것들을 꺼내 비누칠해 빨아 탈의실 바닥에 널었지. 속옷 중 상태가 좋은 것들은 형이 가져온 새 비닐봉지에 넣었어. 형은 그걸 구제 장사꾼에게 판댔어. 낡아서 못 파는 것들 중 그나마 상태가 나은 건 형이 가져가고 나머진 버리래. 그럼 그 중 몇 개는 내가 입고 장깨도 줬어. 돈 있는 사람들이 입던 거라 그런지 너무 좋은 거야. 우린 이 팬티 저 팬티를 입어보며 낄낄거렸어.
“야, 빤쓰가 우리 바지보다 더 비싼 거 같다야. 속에만 입기 존나 아까운데 슈퍼맨처럼 겉에 입을까? 킬킬.”
사실 녀석이나 나나 그전까지는 속옷을 못 입었어. 옷도 얻어 입는 형편에 속옷이 다 뭐야. 그냥 맨 몸에 바지를 입었지. 속옷을 입으니 참 좋아. 든든한 누군가가 내 몸을 안아주는 느낌인 거야. 속옷 덕분에 배앓이도 없어졌어. 그래서 사람들이 속옷을 입나 보다 생각했어. 깡패들 중에는 속옷뿐 아니라 셔츠 다림질 심부름을 시키는 두목도 있었어. 형은 이 기회도 놓치지 않고 다리미를 사다가 다림질 장사도 시작했지. 형이 군대에서 배운 다림질 기술을 알려줬어. 두 어깨를 다리고 소매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다리미가 쭉 지나가면 주름선이 나와. 그다음에 등판과 옆구리를 다리고 마지막으로 단춧구멍을 다리면 된대. 그런데 문제는 나의 다림질을 깡패 손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거였어. 무조건 세탁소에 가서 다려 오래. 형이 설득하려고 해 봤지만 따귀만 맞았지.
세탁소는 몇 골목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걸어가기엔 멀고 버스를 타기엔 아까운 거리였어. 형은 나더러 빨리 튀어갔다 오라고 하면서도 버스비를 주지는 않았어. 방법이 있나, 두목이 탕으로 들어가는 즉시 셔츠를 들고 세탁소로 뛰어야지. 그러다 보니 세탁소에 도착하면 헐떡거릴 수밖에 없지. 신기하게도 세탁소 아저씨는 나를 딱 알아보셨어.
“너, 목욕탕에서 왔지?”
“네, 맞습니다. 헉헉. 근데 어떻게 아셨...?”
“목욕탕에서 오는 아이는 항상 뛰어 오더구나. 숨찬 거 보고 알았지.”
내가 셔츠를 건네자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더니 빨대를 꽂아 건네셨어. 다리려면 시간이 걸리니 앉아서 쉬래. 형이 튀어갔다 오랬으니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싶어서 마음이 급했어. 근데 아저씨는 내가 요구르트를 다 마시도록 다림질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시는 거야. 급한 마음에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당장 가 봐야 하니까 먼저 해주실 수 없냐고 여쭤보았어.
“걱정 마라. 삼십 분 안에 가게 해 줄게.”
삼십 분? 형은 셔츠 다림질 하나에 삼분을 넘으면 안 된 댔는데? 급한 마음에 늦게 가면 곤란한 일이 생기니 빨리 좀 부탁드린다고 말했어. 아저씨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어.
“셔츠가 매매상 손님 거잖아. 그렇지? 어제 술 마셨다면 지금쯤 사우나에서 한 잠자고 있겠구나. 안 잔다고 해도 삼십 분 전에 목욕을 끝내진 못할 거다. 그 사람들 주먹이 무서워 때밀이도 너한테 뭐라고 못할 거 같은데? 그 핑계로 여기서 쉬었다 가거라.”
이 아저씨 뭐지? 목욕탕 사정을 다 알고 있잖아. 신기해서 그걸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어.
“너 전에 일하던 아이도 그랬단다. 여기 오면 무조건 삼십 분 쉬었다 갔지. 네가 일찍 가면 때밀이가 어떻게 생각할까? 전에 일하던 뽀이는 게으름을 폈다고 하겠구나. 혹시 때밀이가 뭐라고 하면 세탁소 아저씨가 바빠 늦게 다렸다고 하렴.”
첫날부터 그 아저씨가 좋았어. 내 편인 것 같아서. 아저씨 말대로 삼십 분을 쉬었지. 아저씨는 나에 대한 이것저것을 물었고 내 얘기 중간중간 자기 얘기도 해 주셨어. 그분도 중학교만 다니고 시멘트 공장, 옷 공장에서 일했대. 어느 날, 오염된 옷을 세탁하러 갔다가 세탁소집 딸하고 눈이 맞았고 결혼해서 물려받았다는 거야. 내 또래의 아들과 그 밑으로 딸 둘이 더 있었어.
셔츠 다림질 가격은 천 원이었어. 그런데 앞으로는 이천 원을 받을 거랬어. 때밀이 형에게 말했더니 날강도라고 화를 냈어. 자기네 동네에서는 팔백 원이라는 거야. 하지만 별 수 있나. 그 동네 세탁소는 거기밖에 없는데. 손님들에게 선불 이천 원을 받아서 세탁소로 뛰어갔지. 그러면 삼십 분간 아저씨랑 얘기도 하고 요구르트도 얻어먹는 거야. 다림질이 다 끝나면 아저씨는 셔츠와 함께 천 원을 내밀었어. 심부름 값 이래. 다림질 이천 원을 받은 이유가 내게 천 원을 주시려고 그런 거야. 괜찮다고, 안 주셔도 된다고 해도 내 몫이라며 주셨어.
“너 이 돈으로 술 먹고 담배 피우면 안 된다. 알았지? 때밀이 퇴근하면 만두라도 사다 끓여 먹어. 네 나이에 라면만 먹으면 골병든다.”
내가 라면 먹는 걸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몇 있었지만 돈을 주면서 뭐라도 사 먹으라는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었어. 돈을 받는데 손이 떨리면서 코끝이 무겁게 느껴졌어. 고맙습니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어. 돈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만두를 사 먹을 수는 없었어. 세탁소 심부름이 자주 있는 게 아니었거든. 그 돈까지 모아 엄마를 갖다 드렸어. 아저씨가 좋으니 세탁소 심부름이 기다려졌어. 내가 가면 아저씨는 항상 같은 질문을 하셨어.
“그래, 요즘은 뭐 하니?”
뽀이가 하는 게 뭐겠어. 손님 맞고 심부름하고 청소하고 자는 거지. 아저씨가 물어올 때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데도 아저씨는 마치 잊었다는 듯 다음 날 같은 질문을 하시는 거야. 근데 이상하지? 내가 목욕탕에서 매일 하는 일 말고 다른 얘기가 궁금하신가 보다, 생각이 문득 드는 거야. 자연히 목욕탕 얘기가 아닌 다른 얘기를 하게 됐어. 요즘 읽는 책 이야기, 지하 다방의 그녀와 데이트 한 이야기, 장깨라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드릴까 생각하게 됐어.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질문도 하셨어. 어떤 질문은 나를 후련하게도 했고 위로하기도 했어. 내가 엄마 이야기를 할 때 특히 그랬어. 당시 난 엄마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서 수시로 투정을 했거든.
“아이고, 속상했겠네. 그래도 이 아저씨 눈엔 힘 팔팔 넘치는 열일곱 소년보다 다섯 아이를 어떻게든 키워 보시려고 애쓰시는 어머니에게 더 눈이 가는 걸?”
내가 라면만 먹는다는 말이 걸리셨을까, 어떤 날은 요구르트 대신 동그랑땡이나 전을 내어 주시기도 했어. 또 어떤 날은 냄비에 김치밥을 볶아 내놓기도 하셨지. 세탁을 맡겨 놓고 안 찾아간 옷들 중에 내게 맞을 법한 걸 골라주시기도 했어. 너무 피곤하면 세탁소 의자에 앉아 졸기도 했어. 거기만 앉으면 잠이 왔어. 내가 미처 잠을 못 깨 삼십 분이 넘어가면 아저씨가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목욕탕 앞까지 데려다주시기도 했어. 너무 고마운 분인데 내가 뭐 해드릴 게 있나. 세탁소 마당을 쓸기도 하고 손걸레를 빨아 유리창이며 선반 먼지를 닦았어. 아저씨는 못하게 하셨지만 내가 하고 싶었어. 너무 고마워서. 우리 아버지가 계시면 저분 같았을까, 생각도 했어.
“저녁 여덟 시 넘어 목욕탕에 오세요. 저 때 엄청 잘 밀어요!”
아저씨는 내게 많은 걸 주셨어. 친절과 격려, 설움을 대하는 방법, 심지어 연애에 대한 조언까지. 그중 아직도 내가 고맙게 여기는 건 클래식 음악이야. 아저씨의 세탁소 구석에 제법 큰 카세트라디오가 있었어. 거기에선 항상 내가 못 들어 본 분위기의 음악이 나왔어. 가요나 팝송, 뽕짝이 아닌 음악.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비롯해 여러 악기들이 동시에 또는 각자 연주를 하고 나면 아나운서가 그 음악이 뭔지 이야기하고 또 비슷한 종류의 다른 음악이 나왔지. 아저씨 말로는 클래식이라고 했어. 목욕탕에도 작은 카세트가 있기는 했지만 저런 음악은 나온 적이 없었어. 형이 가끔 트는 가요 테이프 몇 개가 전부였지. 라디오도 뉴스와 노래가 나오는 걸 틀었기 때문에 난 저런 방송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 내가 관심을 보이자 아저씨가 서랍에서 노란색 테이프 하나를 꺼내시더니 맨 앞부분으로 감아서 주셨어.
“한 번만 들어보렴. 만약 네가 이 음악이 좋게 느껴진다면, 너도 나처럼 음악을 좋아하게 될 거야.”
테이프를 옷장에 잘 넣어뒀다가 형이 퇴근하자마자 바로 틀었어. 그리고 정말. 5초가 지나기도 전에 그 음악이 좋아졌어. 2,3분쯤 들었나? 난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들어봤어. 그래도 좋았어. 뭐랄까, 막 봄이 온 것 같은 인상의 음악이었어. 봄이 온 고향 뒷산 계곡에서 듣는 느낌이랄까. 바이올린들이 경쾌한 상승곡선을 짧게 연주했다 다시 기본음으로 돌아오면 나무에 새싹이 피어나듯 하프 선율이 따라오는 음악. 헨델의 하프 협주곡 B플랫 장조. 봄이 와 막 얼음이 녹고 계곡엔 졸졸 물소리가 날 것 같은 음악이었어. 하프가 통통거리며 선율을 이끌면 바이올린들이 경쾌하게 상승시키고 저 아래에서는 첼로인지 뭔지 모를 저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둥둥거리며 따라와.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해지는 음악이었어. 아저씨는 내가 이 음악 좋아할 걸 어떻게 아셨을까. 소리를 키우고 욕탕 문을 연 채 청소를 했어. 여느 때와 같은 청소였지만 그날은 배수구를 닦으면서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았어. 음악을 듣느라.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어. 욕을 하지 않는 날이 이어지자 그동안 욕을 했던 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거야. 일을 다 마치고 엎드려 책을 보면서도 그 음악을 들었어.
아저씨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다 더 반가워하셨어. 그러면서 이번엔 다른 테이프를 주셨어.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어. 이 음악도 좋았어. 빰빰빰빰 하고 금관악기가 네 박자를 내뿜으면 나머지 악기들이 꽝, 하고 받는 시작 부분이 귀에 꽂혔어. 기회만 되면 그 테이프를 들었어. 듣다 보니 하루에 서너 번도 더 들었어. 들으면 들을수록 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선율이 들리는 데다가 내 마음속 어떤 체증을 밀어 내주는 통쾌함도 있었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더니 아저씨 말이 그 음악이 원래 광고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음악이래. 그다음부터는 세탁소 갈 때마다 음악이야기를 했어. 특히 슈베르트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 키도 작고 못생기고 돈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먹을 게 없어서 며칠을 굶기도 했대.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도 못했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데도 정작 피아노 살 돈이 없어서 남의 피아노를 빌리거나 상상으로 음악을 만들었대. 이름이 알려지면서 돈을 벌기 시작해 끝내 피아노를 샀지만 몇 달 쳐 보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었대. 가도 가도 불행이 끝날 것 같지 않은 내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아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을 졸였어. 그래도 난 굶지는 않으니까 어떻게든 때밀이를 잘 배워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아저씨는 클래식 라디오 주파수가 93.1이라는 것도 알려주셨어. 그전까지는 주로 두 시의 데이트 같은 팝송을 들었는데 아저씨 덕분에 영화음악이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됐어. 아저씨의 서랍에는 클래식 테이프가 백 개도 넘었어. 그 많은 음악을 다 들어봤대. 놀라운 건 클래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잠깐만 들어도 제목을 아신다는 거야. 그 뒤로 틈이 나면 음악을 듣고 지금까지도 클래식 감상을 취미로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아저씨 덕분이야. 나를 부려먹고 욕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던 목욕탕에서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유일한 분. 이 세상 어딘가에 천사가 정말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으로 계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