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를 경험한 사람들만의 공감대

by 나는일학년담임

25. 풍요를 경험한 사람들만의 공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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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손을 잡아서 좋은 건 잠시. 그녀 친구들과 저녁 먹을 생각을 하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친구로 선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야. 그녀 친구들이 앞으로 두고두고 내 이야기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그녀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그녀들은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로 괜찮다고 생각해줄까? 혹시 내 싼 옷차림과 고등학교도 못 간 교양 수준을 흉보지는 않을까. 그런데 진짜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어. 아침에 만 오천 원을 준비해 왔는데 제과점과 극장에서 쓰고 나니 그녀와 돈가스를 먹으면 딱 맞을 돈밖에 안 남았어. 버스비가 안 남으면 걸어가면 되지만 그녀 친구들의 저녁까지 살 돈은 안 되는데 어쩌지? 오천 원, 아니 만원은 더 가져왔어야 하는데 이거 큰일이네. 그녀에게 말을 해 볼까. 아냐, 첫 데이트인데 남자가 돈 떨어졌다는 말을 어떻게 해? 아니지. 왜 말 못 해? 말할 수 있지. 오늘 쓴 돈만 해도 내 월급의 사분의 일이야. 그걸로 쌀을 사면 몇 말을 살 수 있다고. 나로선 이미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고를 했어. 당당해도 돼. 아냐, 아냐... 그래도 남자가 돈 없단 말을 어떻게 해? 그래도 해야 해. 나중에 진짜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을 하자. 창피하더라도 지금은 그게 최선이야. 아, 내가 만원만 더 가져왔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난 왜 이렇게 조잔한 인간일까. 정해진 테두리를 못 넘어. 영화 보는 내내 참담했지만 어쩔 수 있나, 사실대로 말하자고 결론 내렸어. 인희씨... 죄송하지만 친구 분들에게 저녁 살 돈이 지금은 없어요... 인희씨가 대신 내주신다면 다음에 더 훌륭한 저녁으로 보답하고 싶은데 한번 만 봐주시겠... 하지만 막상 그 말은 못 했어. 막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고 있었거든. 얼결에 우리도 인파에 휩쓸려 나오자마자 바로 입구에서 기다리던 그녀 친구들과 맞닥뜨린 거야. 나와 그녀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그녀는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몇 발짝 앞서 횡단보도를 건너더니 바로 지하로 들어가버렸어. 목신의 오후라는 경양식집이었어. 나는 한 번도 못 가 본 곳. 함박스테이크, 비후가스 같이 비싼 걸 파는 곳. 이거 큰일 났네. 그녀에게 돈 없단 말을 아직 못 했는데.


그녀들은 이미 이곳이 익숙한 것 같았어. 양장본 표지를 한 메뉴판을 받자마자 익숙한 듯 휘리릭 넘기더니 하나같이 함박스테이크를 시키더라. 난 그녀들의 눈을 피해 가격을 재빨리 살폈어. 돈가스와 오므라이스가 그중 싸 보였어. 그녀들과 너무 다른 걸 시키면 이상할 것 같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없었어. 제일 싼 오므라이스를 주문했어. 웨이터가 음료나 칵테일은 안 하시겠냐고 물었어. 그녀들은 그것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블루스카이, 키스 오브 파이어 같은 말이 나왔어. 난 안 마시겠다고 하기가 뭣해서 그중 싼 맥주를 시켰어. 그녀의 친구들이 깔깔 웃으며 나와 그녀를 두고 적당히 놀리기도 하고 부러워하는 말을 했어. 잠시 뒤 오묵한 접시에 수프가 나왔어. 그런데 세 개뿐이야. 그녀들이 후추와 소금을 뿌려 호로록 다 먹도록 난 안 줘. 그래서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물었어. 그랬더니 웨이터 대신 그녀 친구 중 하나가 말했어.


“수프 안 나오는데...?”

“네?”

“오므라이스 시키셨잖아요.”


친구가 피식 웃는 것 같았어. 그녀도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어. 내가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몰라. 뭔지 모를 굴욕감 같은 게 휙 지나갔어. 면박당하는 기분이었어. 촌스러움과 무식이 탄로 난 기분이었어.


“아하, 오므라이스는 수프를 안 주는구나. 몰랐네요. 어쩐지 싸더라...헤헤.”


민망함을 감춰보려고 억지로 웃어보았어. 이러면 상황이 유머로 바뀔까. 그럴 거 같지 않았어. 아, 난감하네. 그녀가 나 대신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나섰어.


“주현씨, 레스토랑도 처음이에요? 얘들아, 우리 주현씨가 오늘 처음 하는 게 많단다.”


그녀가 나를 변명해주듯 웃었어.


“네, TV에서만... 봤습니다. 헤헤.”

“얘들아, 봤지? 주현씨는 극장도 오늘 처음 간 거래.”


친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어.


“사실은 점심 먹은 제과점도요. 헤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러자 친구들도 살짝 웃음을 뗬어.


"주현씨, 산속에서 도 닦다 오셨죠? 아니면 절에서 탈출?"

“주현씨가 강원도 사람이거든. 서울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자 친구가 그녀 말을 가로막았어.


“강원도에도 레스토랑 있을 거 아냐. 그렇죠, 주현씨?”

“네, 원주에 나가면 있을 겁니다. 근데 제가 못 나가봐서...”

“정말요? 졸업식이나 생일 그럴 때는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집에서 미역국에 밥 먹을 때도 있고...”

“아, 그게 더 맛있겠네요. 이깟 함박스테이크보다 엄마 정성 들어간 미역국이 진짜죠.”


그녀들이 급하게 내 편들어주려고 애썼어. 그런데 묘하게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어. 위로의 색깔은 분명해 보이는데 위로로 들리지 않는 기분. 나는 잘 모르지만 그녀들은 분명히 느끼는, 중산층들만의 공감대가 함박스테이크와 칵테일에는 있는 것 같았어. 풍요를 경험한 사람들만의 공감대랄까. 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비싼 걸 먹어 본 사람들만 느끼는 여유로움. 나처럼 상상만 하던 사람에겐 평생 목표인 이런 레스토랑을 저들은 생일이나 졸업식이면 쉽게 이용할 수 있잖아. 이런 걸 일상으로 향유하면서도 이 정도 돈 쓰는 건 별 거 아니라는 자신감. 자연스레 풍기는 만만함. 인희씨도 그 정서에 익숙하겠지. 부럽다. 이런 곳을 얼마나 많이 다니면 나도 그녀만큼 적응이 될까. 돈은 어디서 나지? 설령 많이 다닌다고 해도 내가 적응할 수는 있을까. 안 돼도 어쩌겠어. 그렇다고 뛰쳐나갈 수는 없잖아. 그녀는 어쩌고? 오늘은 여기 있으니까 이 상황에 충실하자 생각했어. 내가 더 이상 말을 못 하자 그녀도 친구들도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기 뭣 했는지 그 이야기는 유야무야 되었어. 대화 주제는 이내 그녀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 현재 만나는 남자, 교회 오빠들 주제로 바뀌어갔어. 나는 알 수도 없고 짐작하기도 어려운 내용들. 말을 섞어서 친근함을 키워보고 싶었지만 모르니 끼어들 수가 있나.


가만 앉아 대화를 들으며 웃긴 내용이면 같이 웃는 척이나 하고 있는데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화장실이 가고 싶었어.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보니 그 레스토랑은 보통 경양식집이 아니라. 꽤 고급스러운 곳이야. 넓은 공간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는데 옆 칸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살짝 보일 정도의 높이였어. 테이블도 수십 개나 있고 홀 정면에는 LP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DJ 박스도 있었어. 그 구석에 통기타도 있는 걸 보니 노래도 하는 모양이었어. 기타를 보니 작년에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던 생각이 났어. 맥주도 한 잔 했겠다,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 손님도 우리 밖에 없겠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저 기타 좀 쳐도 되냐고 물어봤어. 웨이터는 나를 슬쩍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장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어. 손님 오기 전에 한 곡만 하래. F.R. 데이비드의 WORDS를 불러야지. 웨이터가 마이크를 켜고 아아, 테스트를 했어. 그 소리를 들은 그녀와 친구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어. 내가 기타를 들고 튜닝을 했어. 그녀 눈이 동그래졌어. 난 마이크에 대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어.


“저... 인희씨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내가 기타를 친다는 걸 몰랐던 그녀는 잠시 놀라는 것 같더니 이내 양손을 깍지 껴 턱을 괴고 웃으며 끄덕였어. 친구들도 의외라는 반응이었어.


"오늘... 인희씨와 친구분들 덕분에 좋은 경험 했어요.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에게 불러주려고 목욕탕 청소할 때마다 연습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기타까지 치면서 부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 터라 첫 음 잡는데 시간이 걸렸어. 원래 F.R. David는 D코드로 부르거든. 팝송 책에도 그렇게 나와. 그래서 나도 D코드로 시작하려고 보니 첫음이 너무 높은 거야. 그래서 이리저리 바꾸다가 F로 조를 바꿔 불렀어. 원곡은 약간 빠른 리듬인데 원곡처럼 경쾌할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조금 느린 블루스 풍으로 했어. 전주가 시작되자 그녀 친구 중 한 사람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고 다른 친구는 오빠!라고 외쳐주었어. 그러자 인희씨가 그녀들에게 니들 조용히 하라고, 주먹을 쥐어 보였어. 귀여웠어.


Well I'm just a music man

Melodies are so far my best friend

But my words are coming out wrong then I

I reveal my heart to you and

Hope that you believe it's true cause words...


https://www.youtube.com/watch?v=nwrqQ2jYpwY


멜로디는 잘 떠오르는데 사랑을 표현할 노랫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야말로. 내 마음과 같았어. 책을 봐도 내가 좋아하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제대로 묘사하는 문장을 찾을 수 없었어. 톨스토이도 밀란 쿤데라도 그녀를 위한 문장은 남겨놓지 못했어. 내가 지금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안다면. 그걸 안다면, 영혼이라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데. 노래가 끝나자 그녀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며 앙코르를 외쳤어. 그녀는 친구들의 호들갑을 막느라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나를 향해 웃었어. 웨이터는 한 곡만 하라고 했으니까 내려가려는데 옆에서 노래를 듣던 사람이 와서 오늘 추석이라 DJ가 안 나오니까 나더러 더 하고 싶으면 해도 된대. 못할 거 있나? 두 번째로 한 노래는 당시 라디오에서도 자주 나오고 작년에 친구들과 자주 부르던 리처드 샌더슨의 ‘리얼리티’였어.


Met you by surprise,

I didn't realize

that my life would change forever

Saw you standing there,

I didn't know I cared

there was something special in the air


https://www.youtube.com/watch?v=OL2FazadHoQ


노래를 하면서 그녀를 봤어. 그녀는 이 노랫말 의미를 알겠지. 그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을 만나서 내 삶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이토록 특별한 사람일 줄 몰랐어요... 그 노래 말고도 몇 곡 더 했어. 다행히 그녀는 싫지 않아 했어.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어. 난 기타를 내려놓고 사장에게 가서, 사실 내가 친구들에게 갑자기 저녁을 사야 했는데 돈이 모자란다... 한번만 믿어주시고 보내주시면 내일 점심 전에 돈을 가져와 갚겠다고 진지하게 부탁을 드렸어. 사장은 의외로 선뜻 알겠다며 대신 전화번호를 적게 했어. 다행이었어. 그 사이에 친구들은 먼저들 가고 그녀가 출입문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을 잡았어.


"고마워요, 주현씨."


지하 계단을 두 세 개쯤 올라왔을까. 앞서 올라가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며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어.



24. 첫 키스의 눈물은 얼마나 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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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래하는 동안 칵테일을 여러 잔 마셔서일까, 그녀가 내게 쏟아지듯 얹혔어. 아무 대비 없이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그녀를 받쳐내지 못하고 휘청, 계단 아래로 뒷걸음질 치며 벽에 부딪혔지. 이런 숙맥 좀 봐. 이런 순간에야말로 든든하게 그녀를 지탱해야 하잖아. 근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꼴이라니. 아, 오늘 참 안 된다. 이런 나를 무엇에 쓸까. 그녀도 놀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어. 술냄새가 훅 끼쳤어.


“아오, 뭐예요. 지금? 분위기 깨지게! 남자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아... 죄송해요.... 갑자기... 그래서... 그럼 다시 한번... 헤헤.”

“다시 한번? 완전 선수네. 선수 맞죠?”


그녀는 입술 끝을 동그랗게 말며 째려봤어. 어둠 속에서도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어. 자기가 취했다는 생각을 아직 못하는 것 같았어.


“주현씨가 물어내요. 이게 뭐야. 난 진짜 처음이었다구요.”

“엥? 그럼 전 뭐... 처, 처음 아닌 줄... 아십니..?”

“처음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요. 중국집 배달하는 그 친구도 연애한다면서요.”

“그, 그래도 전...”

“허이구,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시네. 편지 쓰는 거 보면 모를 줄 알고? 그리고 아까 그 노래들, 도대체 몇 명한테 불러줬어요? 다리를 척 꼬고...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던데.”

“그게... 원래 기타 칠 땐 그래야 되거든요. 인희씨한테 불러드리려고 전부터...”

“그래요? 나 위해서 그 많은 노랠 연습 했다? 요 며칠 사이에? 그걸 믿으라고요? 점점 수상하네. 내 눈 똑바로 봐요.”

"작년에 밴드 한답시고 친구들이랑..."


그녀는 결정적 증거라도 잡은 양 눈에 힘을 주고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어. 취했네, 취했어. 집에 데려다줘야겠다. 계단을 다 올라오자 그녀가 갑자기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어.


“암튼 우리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알았죠? 다시 할래. 따라와요.”

“우리? 아니, 인희씨 혼자 해놓고... 우리라뇨?"

“어쭈? 그럼 주현씨는 싫었나 보네. 그런 거예요? 내가 실수했네. 죄송합니다아아아아!”

"제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리고 지금 시간도 늦고 취하셨는데 또 어딜...”


어떻게 보면 아이의 투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순한 엄마가 말썽쟁이 아들 야단치는 것처럼 들렸어. 이 여자, 알면 알수록 달달하다고 생각했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가 누군 줄 아니? 키스, 그것도 뜨거운 키스를 예고하며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여자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누구겠니. 그런 여자의 말에 복종하듯 따라가는 사람이지. 그곳이 지옥이라도.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면, 난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골목길을 두어 구비 돌아가더니 어느 집 앞에서 멈췄어.


“우리 집이에요. 들어가요.”

“헉. 지금요?”

“왜요, 떨려요? 하하! 저 무서워하는 것 좀 봐. 왜요? 여자는 많이 꼬셔도 이런 경험은 아직 없었나 보네? 누굴 속이려 하시나? 내가 은행원인 거 알죠?”

“그게 아니라 지금... 어른들 계실 텐데... 그리고 제가 무슨 경험을 했다고 자꾸 그러십니까? 은행원 씩이나 되시는 분이”

“겁나죠? 울 아빠한테 인사도 하고 좋죠. 싫음 관두시고요.”

“싫긴요. 하지만 오늘은 인희씨도 좀 취했고...”

“어쭈? 누가 취했다고 그래요? 나를 아예 술 취한 여자로 몰아가시겠다? 안 되겠네. 따라와요. 우리 아빠한테 확 일러버릴 거야!”


정말 취한 걸까, 취한 척하는 걸까. 저렇게 사랑스럽게 취하는 여자가 또 있을까. 그나저나 명절날 딸아이가 잔뜩 취해서 어떤 남자를 데려오는 걸 보고 가만있을 아버지가 있을까? 잠시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그녀는 내 쪽을 향해 거 보라는 듯 실망의 눈치를 보내더니 상황이 재미있는지 야릇한 웃음을 지었어. 그래도 내가 멍하게 있자 대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 버렸어. 당돌하게까지 느껴지는 저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비싼 함박스테이크를 자주 먹으면 생겨나나? 들어가기 힘들다는 은행에 1등으로 붙으면 저렇게 되나. 그녀의 정신세계는 내가 범접은커녕 흉내도 힘든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어.


따라오라니 들어는 가야겠는데 이 꼴로 어른들을 뵙는다는 게 영 낯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고 못 들어가는 건 더 바보스러운 것 같은 거야. 얼른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셔츠 매무새를 정리하고 들어갔지. 집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어. 벽돌로 야무지게 쌓은 담장과 연결된 튼튼한 대문 왼 편으로 제법 자란 나무들이 담 쪽으로 경계를 지은 정원이 있었어. 그녀의 편지에 언급된 감나무에도 감이 제법 많이 매달려 있었지. 잔디밭에 깔린 디딤돌 대여섯 개를 밟고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계단이 나오는데 작은 화분이 양 끝에 줄지어있었어. 계단을 올라가니 현관문이 나왔어. 그 앞에서 둘러보는 정원은 더 보기가 좋았어. 고색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창연하다고 할 정도였어. 가지를 단정하게 친 소나무들과 향나무, 담장을 따라 깔끔하게 식재된 화살나무와 목련, 그리고 구석의 조팝나무와 경사면의 회양목이 적당히 드리운 어둠을 배경으로 아늑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어. 깔끔하고 아늑한 정원. 이런 정원을 가꾸는 그녀의 부모님이 어떤 분이실지 짐작이 되었어. 나도 모르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우리 집이 떠올랐어. 거실로 들어가 보니 막상 그녀 말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잘 정리된 소파 앞에 응접테이블이 있고 정원이 보이는 넓은 창 앞에는 난 화분이 늘어서 있었어. 그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피아노가 있고 그 옆엔 제법 큰 스피커와 오디오가 있었어. 부럽고 신기한 마음에 빙 둘러보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어.


“속았죠? 아유, 주현씨도 속는구나? 순진하네. 약오르지롱.”


그녀의 가족은 명절 쇠러 시골에 가셨대. 원래는 그녀도 함께 갔다가 내일 출근을 핑계로 오늘 밤에 오려고 했는데 나를 만나기로 한 그녀가 취직 후 처음 맞는 명절이니 친구들 만나 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지. 대학생인 언니만 데리고 가서 내일 오신다는 거야.


“빈 집에 혼자 잘 일이 좀 걱정이었거든요. 주현씨가 오늘 밤새 놀아줘야 해요. 똑바로 할 거죠?”


‘똑바로 할 거죠?’ 하면서 그녀는 검지 손가락을 곧게 펴 나를 가리키며 눈에 힘을 줬어. 눈에 힘준다는 건 졸리다는 뜻인데...


“아, 진짜... 걱정 많이 했거든요. 두고 봐요. 인희씨.”

“두고 봐? 주현씨가 뭐 어쩌게요? 아이고, 무서워라.”


그녀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밥공기를 감싸듯 내 양 볼을 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었어. 그러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췄어.


너희들의 첫 키스는 어땠니. 너희들도 잊을 수 없는 첫 키스가 있겠지? 나의 첫 키스는 말야... 시간으로 치면 약 일 분 정도 됐을까? 일 분이라니. 나 좀 봐. 세상에 어떤 남자가 키스를 시간으로 계량화 한다니? 하지만 모르겠어. 그날의 키스를 어떤 낱말로 여기에 기록해야 할지. 어떤 낱말이든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 낱말을 쓰는 순간, 내 첫 키스의 의미는 그 낱말의 의미 안에 오롯이 갇히고 말 거야. 그해 9월 10일 월요일 저녁 여덟 시 무렵의 일이 내 기억엔 불과 며칠 전 일 같구나.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 있었을 때 내 손은 어정쩡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어. 아니, 그랬나? 그랬을 거야. 그녀가 발뒤꿈치를 들 필요가 없게 적당히 등도 구부렸겠지. 그리고 눈을 감고 이번엔 휘청거리지 않게 가만히 버티고 있었어. 눈을 감으니 그녀의 입술이 막 피어난 진달래처럼 느껴졌어. 어릴 적 봄이 막 오고 뒷산이 벌겋게 진달래가 피면 한 아름 꺾어다 꽃을 뜯어먹곤 했어. 진달래가 분홍색인 건 다들 알지만 막상 산에 가 보면 진달래마다 분홍의 정도가 다 제각각인 걸 모를 거야. 분홍이 짙어 농염한 꽃이 있고 빛을 덜 받아 묽은 분홍꽃도 있었어. 그녀의 입술은 짙은 분홍꽃이었어. 다른 건 잘 모르겠어. 모든 느낌이 예상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 밖에는. 막상 그 순간이 지나고 나니 머리가 그냥 하얘. 오랜 시간이 지나서가 잊힌 게 아니야. 당시에도 그랬어. 그녀의 입술이 닿았을 때 시간이 정지되었나? 그래서 기억이 휘발되었을까? 그랬을지도 몰라. 뭔가 아득했어. 내일 오후엔 다시 목욕탕 뽀이로 돌아갈 일을 걱정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어. 아냐, 잘 모르겠어. 그날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떠올려보려고 애써 봤지만 통 살아나지 않았거든.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그녀의 술 냄새와 내가 운 거야. 내가 운 건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냥 눈물이 주르르 나왔거든. 내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렸지. 눈을 뜬 그녀가 깜짝 놀랐어.


“뭐야, 울어? 아오... 그래... 내가 키스 좀 했어요. 그렇다고... 울 일이야? 누가 보면 내가 남자 하나 끌어다 잡아먹는 줄 알겠네. 나 지금 나쁜 년 되는 설정인 거 맞아요?”


이번엔 진짜 화난 것 같아 보였어. 마치 연기를 하듯 말하는 그녀 말에 나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이 터졌어. 그 바람에 콧물이 픽, 나왔어. 난 민망해서 그녀가 내 얼굴을 못 보게 잡아당겨 꼭 안았어. 그녀가 귀엽게 버둥대며 말했어.


“어허, 죄인은 어서 놓지 못할까? 이 남자 이거 진짜 은행 금고에 가둬놓고 분석 좀 해야 돼. 뭘 잘했다고 운대? 하긴, 아까 지은 죄를 생각하니 울긴 울어야겠네. 맞죠?”


“인희씨... 좋아서요. 너무 좋아서 그래요. 우리 이대로 조금만 있어요.”


이 말을 하고 나니 뭔가 제대로 복받쳐 올랐어. 눈물이 훌쩍거림으로 바뀌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경이 됐어. 일부러 멈추고 싶지는 않았어. 이 세상 누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줄까, 누가 나의 눈물을 이렇게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줄까. 그녀는 나의 구원자, 나의 베아트리체였어. 불도 안 켠 거실에서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난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세수를 했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내가 쓴 세면대며 변기와 수도꼭지를 비누 묻혀 싹 닦았어. 목욕탕에서 하던 것처럼. 수건도 말끔하게 펴서 보기 좋게 널어놓았어.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그녀가 잘 쓰게. 다시 거실로 밖으로 나오니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 아까 불렀던 그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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