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새벽기도

by 나는일학년담임

27. 엄마의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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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David의 words가 집안에 가득 울렸어. 춤추기에 적당히 들썩이는 리듬이 우리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았어. 스피커도 내 허리 높이까지 올라올 만큼 큼직했지. 목욕탕의 팔뚝만 한 라디오로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음질이었어. 와, 소리 좋다! 음악 들을만한데요? 근데 아무 답이 없었어. 그녀가 소파에 기대 잠이 든 거야.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음악을 꺼야 했어. 괜찮아. 노래는 나중에 들으면 되지, 뭐. 그녀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들어가서 자요,라고 말했지만 반응이 없었어. 방문을 연 다음 그녀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켰어. 물컹한 느낌과 함께 화장품 냄새가 났어. 꿀을 달이면 이런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누이는데 그녀가 뭐라고 웅얼거렸어. 물을 달란 말인가? 물을 들고 가니 이미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어. 그녀 방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어. 거실에 혼자 남으니 비로소 그녀 집이 눈에 들어왔어. 가족사진, 전축, 식탁 위의 과일 바구니, 냉장고, 가스레인지... 우리 집과 꽤 다른 살림이었어. 잘 사는구나. 인희씨는 좋겠네. 나도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웠어. 낯선 집이라서 그런가, 쉽게 잠이 오지 않았어. 눈을 감았지만 잠은 안 오고 그녀의 얼굴, 특히 방금 맡았던 냄새와 입술이 떠올랐어. 키스할 때 느낌이 어땠더라? 방금 전 일인데도 생각날 듯 말 듯 몽롱했어. 우리가 키스를 하기는 했나, 꿈인가, 현실인가. 그녀가 저 방에서 혼자 자고 있는데. 가서 다시 한번 해 볼까. 그녀가 알면 싫어할지도 몰라. 오락가락하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쯤이었나? 그녀 방문이 왈칵 열리더니 그녀가 화장실로 쏟아지듯 뛰어갔어. 이어서 토하는 소리가 났지. 술을 많이 마시더니 탈이 났나 보다. 급히 달려가 등을 두드려 주었어. 한참을 토하고 그녀는 다시 잠이 들고 난 세수를 했어. 엄마에게 돈을 얻어다 경양식집에 갖다 주려면 엄마 출근 전에 집에 가야 하거든. 그런데 막상 그녀 집을 나오려고 보니 걱정이 되는 거야. 토했는데 빈 속으로 출근해도 되나? 냉장고에 보니 그녀 어머니가 준비해 놓으신 음식이 있었어. 그녀가 아침에 먹으면 좋을만한 걸 몇 개 꺼내고 찌개를 데워 식탁에 올려놓았어. 그리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요, 아침 꼭 드시고 출근 잘하라는 메모를 써 놓고 나왔어. 거리엔 새벽 기운이 돌고 있었어.


집에 오니 동생들은 아직 자고 어머니가 출근 준비를 하고 계셨어.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엄마에게 만 원만 달라고 했어.


“쯧쯧. 돈 번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쓰는 버릇을 들이냐? 만 원? 목욕탕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돈 쓸 일이 뭐 있어.”

“원래는 친구 한 명에게 쓰려고 그랬는데... 갑자기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친구들 밥은 지들이 돈 내고 먹으면 되지, 니가 돈을 왜 내? 허이구, 니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여. 돈 벌어 남들 입에 다 처넣어주면 뭐가 남디? 어리다, 어려...”

“엄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사주고 싶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들이야...”

“허참, 좋기나 하겠다. 그런 것들이 다 니 돈 빼 처먹을라고 그 지랄하는 거야. 지들은 돈이 없을까 봐? 서울엔 너 같은 애 우려먹는 것들 천지야. 그런 애들이 뭐 좋다고 쫓아다녀. 너 정신 바짝 차려.”


엄마,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 그 여자... 좋아해,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할 수 없었어. 돈에 관한 한, 엄마는 완고함을 지니고 있었어. 남에게 돈을 쓰면 내가 굶어 죽는다는 극단. 누적된 가난의 경험 때문일 거야. 엄마가 날 이해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괜히 와서 걱정만 시킨 꼴이었지. 목욕탕 가 봐야 한다고 말하고 방에서 나와 신을 신는데 까만 그을음이 낀 석유곤로가 눈에 들어왔어. 쉬는 날 집에 올 때마다 내가 닦곤 했는데 그녀 만나느라 안 온 사이에 더 까매졌네. 어쩌면 나와 엄마의 관계는 석유곤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엄마와 멀어지면 우리 살림은 석유곤로처럼 검댕이 많아지겠지. 아직은 엄마가 저걸 닦을 여유가 없는데. 그때까지는 내가 다른 것에 정신 팔지 말고 엄마에게 신경 써야 하는데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만원? 그 돈이면 쌀이 두 말 반인데. 잘 알지도 못한 그녀 친구들에게 함박스테이크? 어리다, 어려. 엄마의 한탄이 보이지 않는 거니.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수세미를 꺼내 수돗가에서 검댕을 닦았어. 아주 박박. 손이 안 보이도록. 간다고 나간 내가 부엌에서 덜그럭거리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어.


“아이고, 우리 아들 착하네. 내가 매일 새벽기도 가서 하나님, 우리 가정 꼭 살려주세요, 애들 잘 크게 꼭 붙들어주시고 우리 주현이는 담대하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있어. 너도 아침마다 기도해. 그럼 예수님이 굳세게 붙잡아 주실 거야. 그리고 니 돈 빼먹는 그런 친구는 딱 끊어, 알았지?”


곤로 검댕을 닦아서 조립해놓고 지하 방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뛰었어. 어머니께 못 얻었으니 때밀이 형에게 가불을 부탁해야 해. 그러려면 미리 목욕탕에 가 청소라도 하는 척해야겠지. 정류장 옆 공중전화로 그녀 집에 전화를 했어. 지금쯤 일어나야 내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나갈 텐데. 그런데 신호만 갈 뿐 전화를 안 받네? 몸이 많이 아픈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걱정이 됐어. 근데 내가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지? 엄마야, 그녀야?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내가 엄마에게 이래도 되나? 그런데 엄마 얼굴보다 자꾸 그녀 얼굴이 더 떠올랐어. 마음이 불편했어. 엄마는 돈 때문에 저렇게 마음을 끓이시는데 난 여자 생각이나 하고, 아주 자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끝없이 샘솟는 그녀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 웃을 때 살짝 접히는 오른쪽 보조개. 말끝을 살짝 올리면서 웃음이 배어있는 말투는 귀엽기도 하고 유혹적이기도 하지. 그녀가 나를 언급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애정 어린 낱말들. 그리고 어제의 키스, 그녀 집의 유복한 살림살이들. 얼마를 주면 그런 집을 살 수 있을까. 한 달에 얼마를 벌면 그 살림을 다 장만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집에 살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특히 눈에 들어온 건 그녀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이었어. 환하게 웃는 두 딸을 양 옆에 세우고 다정히 붙어 앉은 중년의 부부. 엄마는 인자한 표정, 아버지는 당당한 표정이었어. 자신의 가정에 누구든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겠다는 든든한 결의. 우리 아버지도 살아계셨으면 저런 표정을 지었겠지. 그러면 우리 엄마도 저렇게 인자한 표정으로 살고 있었을까. 우리 엄마에게도 인자하던 때가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한, 없었어. 내가 여덟 살 되던 그 해에, 그나마 있던 논밭을 팔아 병마와 싸우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인자함도 묻어버렸을 거야. 대신 남은 빚과 강퍅함을 얻었겠지. 만약 아버지가 계셨다면 엄마는 내게 만 원 아니라 이만 원이라도 선뜻 쥐어줬을 텐데. 내가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목욕탕에 갈 필요도 없었을 거야. 엄마가 새벽기도 가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대신 차라리 만 원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은 그게 더 절실한데. 노동에 지쳐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새벽잠을 밀쳐내며 꾸역꾸역 교회까지 걸어 가 마른 눈물을 쏟으며 기도까지 하느라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더 자면 좋겠단 말야. 엄마 삶이 죽을 지경인데 새벽기도를 뭐 하러 해. 꼭 그래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대? 그렇게 고생을 해야 들어두는 기도라면 차라리 내 기도라도 빼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 기도 하는 시간이라도 줄여서 한 숨이라도 더 자게. 그러고나서도 시간이 조금이라도 난다면 나에게 단 일 분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우리 주현이 밥은 먹었니, 때밀이 할 때 팔은 안 아프니, 때밀이 형이 오늘은 안 때렸니. 오늘도 울었니... 우리 주현이한테도 이쁜 여자 친구가 생기면 좋겠구나... 왜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기도를 하느라 고생을 하는데? 그 시간에 더 자면 붓기도 빠지고 좋겠는데. 누가 나 위해 기도하래? 엄마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기도가 뭔 줄이나 알까. 속상한 마음에 짜증이 확 났어. 버스에서 내리면서 침을 칵 뱉었어. 마음이 부대껴 울고 싶은데 어쩌지 못해 오히려 화가 날 때 하는 방법, 침 뱉기. 그런데 그 날은 침을 뱉어도 마음이 안 풀렸어. 답답했어. 그냥. 하늘은 눈부시게 높고 파란데. 내 인생이 더러워 보였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어. 저 깨끗한 하늘을 담배연기로 희뿌옇게 문질러 버리고 싶었어. 마음이 좀 가라앉았어. 화도 덜 나는 것 같았어. 사람들은 이래서 담배를 피나 봐. 그런데 담배에 의해 분노가 또 없어진다는 건 뭐지? 그동안엔 그럼 담배가 없어서 화가 났던 거야? 그깟 담배가 뭔데. 내가 담배에게 조종당한 거였어? 부끄럽고 어이없었어. 아까 집에서와는 다른 이유로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어. 난 담배를 왜 필까. 장깨를 따라한 게 시작이었는데. 멋있어 보이려고, 상대에게 겁을 주려는 목적 말고는 별 필요도 없는 걸 꼬박꼬박 한 갑에 백 원씩이나 주고 샀다는 게 좀 어이가 없었어. 그동안 산 담뱃값만 모았어도 엄마에게 돈을 얻으러 갈 필요도 없었겠네. 엄마가 정신 차리라고 말한 게 혹시 담배 피우지 말라는 건 아니었을까. 죄송해요, 엄마...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어.


목욕탕에 오니 이미 문이 열려 있었어. 벌써 형이 와 있나? 싶어 탈의실 미닫이문을 열려고 하는데 안에서 형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어.


“야, 씨발. 아니라니까! 아니라는데 이 미친년이 진짜!”


누구한테 욕하는 걸까? 순간 여탕 때밀이 누나가 떠올랐어. 형은 요즘도 그녀와 가끔 탈의실 탁자에서 술을 마시고 정사를 나누곤 하니까. 그런데, 미친년이라고? 둘이 싸운 거야?


“그런데 왜 요즘 안 들어와? 여탕 년이랑 바람피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구? 내가 오늘 그냥 갈 줄 알아?”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어. 앙칼지다. 형 못지않은 걸.


“야, 까놓고 말해서 뱃속 애가 내 새낀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주접떨지 마. 미친년아.”

“나쁜 새끼. 내가 오빠들한테 말해서 너 신고해 버릴 거야. 혼인빙자로. 개새꺄.”

“이런 시발년이 어디서 애를 배 와서 나한테 지랄이야. 왜? 니 오빠새끼가 또 내 돈 좀 뜯어 오라 그러디? 니들 통빡 모를 줄 알어?”


감히 문을 열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왔어. 형에게 가불을 부탁하는 건 안 될 것 같았어. 오전 중에 갚는다고 했는데 어쩌지. 할 수 없이 길 건너 중국집으로 갔어. 장깨는 배달 나가고 없다길래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목욕탕 창을 열고 담배를 피우던 형이 날 불렀어. 허겁지겁 올라와 보니 형과 다투던 여자는 탁자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어. 형이 나를 낚아채듯 탈의실 밖으로 끌고 나가 속삭이듯 물었어.


“내 통장에 얼마 있냐?”

“백오십이만오천오백 원 있습니다.”

“너 지금 은행 튀어 가서 돈 찾아와. 삼십만 원, 아니, 이십만 원. 아, 저 시발년, 진짜.”


말하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형이 창 밖으로 침을 찍 뱉었어. 은행? 이때다 싶었어. 내가 잘 부탁하면 은행 가는 김에 만원 더 찾아서 가불 해 줄지 모르잖아. 난 최대한 비굴한 웃음으로 불쌍한 척하며 부탁해 봤어.


“만 원? 씨애키가 미쳤나? 이게 어디서... 가불? 재수 없게.”


‘씨애키’. 형이 된소리와 거센소리를 섞어 욕을 할 땐 곧 한 대 칠 수도 있다는 의미야. 난 아무 말 못 하고 목욕탕을 나왔어. 명절 다음 날 오전이어서 그런지 은행은 손님 없이 한산했어. 그녀의 창구를 봤어. 비어 있었어. 결국 술병 나서 결근했나? 혹시 나 나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나?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다른 창구에서 돈을 찾아 나오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가 옆구리를 쿡 찔렀어. 그녀였어. 그런데 그녀 얼굴이 멀쩡해. 오늘 새벽에 토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어. 반갑고 다행스러웠어. 은행이 한가해서 주전부리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래.


“어제 술 드신 분 맞아요? 인희씨, 변신이 완벽하네? 하나도 안 아픈 사람 같아요!”

“쉿, 말조심! 생사람 잡네. 누가 술 먹었다 그래요? 근데 새벽에 왜 도망갔어요? 진짜 잡아먹을까 봐 그랬어요? 숙녀를 두고 가다니. 주현씨는 도망이 특기야?”

“아, 제가 집에 좀... 근데 아침은 드시고 나오셨어요?”

“아뇨? 나 원래 아침 안 먹어요. 바로 출근했어요. 근데 왜요?”

“헉. 제가 식탁에 밥 차려놨는데. 큰일 났다. 거기에 메모까지 써 놨거든요.”

"이따 가서 먹을게요. 아니다. 주현씨 끝나면 같이 가서 먹어요. 엄마 아빠 늦게나 오신대요."

"인희씨,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일찍 가서 쉬시는 게 어때요?"

"왜요, 주현씬 나랑 저녁 먹기 싫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인희씨 어제 술도... 새벽에 엄청 토하시던데."

"아니, 내가 괜찮다는데... 주현씨 참 이상해? 왜 내 마음을 주현씨가 넘겨짚어요?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아, 그게... 전... 인희씨가 힘들까 봐..."

"됐어요. 잘 가요."


호의를 거절당해 속상했나? 그녀는 서둘러 은행으로 들어갔어. 아, 난 왜 물어보지도 않고 남의 마음을 넘겨짚을까. 모자라다. 한참 모자라. 내 딴엔 그녀를 걱정해서 한 일이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잖아. 이건 애정도 아니고 배려도 아닐 거야. 그냥 주책이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거지. 자책하면서 목욕탕에 돌아와 형에게 돈을 건넸어. 형은 그 돈을 탈의실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툭 던졌어.


“존 말할 때 애 지워라. 내 새끼면 지우고 남의 새끼면 그 새끼한테 가, 재수 없는 년아.”


여자는 많이 울었는지 머리가 헝클어지고 얼굴은 벌갰어. 그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재빨리 나와서 다시 장깨를 찾아갔어. 남은 희망은 그밖에 없었어. 나와 맞닥뜨리자 반가워하던 장깨는 내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숨을 여러번 쉬더니 점점 울상으로 바뀌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어.


“만 원? 햐, 뭘 쳐드셨길래 만 원? 답 없는 새꺄. 만 원? 내가 니네 엄마라도 안 주겄다, 병신아.”

“사실은 만 오천 원이야... 오천 원은 나한테 있으니까... 만 원만 빌려주라...”

“하...! 만 오천 원을 한 큐에 드셨쎄요? 지랄하네, 근데 넌 왜 오므라이스를 시켰는데? 너도 함박스테이크 처먹지, 병신아.”

“나라도 어떻게 돈을 좀 아껴 보려고...”

“새꺄, 돈은 너보다 은행 그 년이 더 잘 벌잖아. 근데 니가 왜 내고 지랄이세요?”

“야, 말 조심해라. 이게 어디서... 나야 처음 데이트하는 거니까... 야, 내가 남잔데 어떻게 여자에게 돈을 내라 그러냐...”

“이 새끼, 진짜 답 없네. 니가 싼 거 먹으면 은행 아가씨가 우리 주현이 참 잘했어요, 그러디?”

“아니...”

“거 봐, 병신아. 근데 니가 왜 알아서 찌그러지냐고. 그랬으면서 지금은 왜 징징대냐고, 새꺄. 차라리 넌 더 비싸 걸 시키든지 최소한 함박스테이크는 시켜야지, 남자는 깡인데 뭐? 오므라이스?”


신기해. 녀석도 나와 같은 열일곱 살이거든. 근데 통찰이 대단해. 나보다 이년 먼저 가출해서 일을 먼저 시작한 것 밖에 없는데.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틀린 말이 없어 보였어. 한 마디도 못하고 녀석의 지청구를 다 듣는 수밖에.


“어떤 병신이 남들한테는 비싼 거 사주면서 지는 싼 걸 시키냐. 아예 굶든지. 너 그럼 평생 여자 못 꼬셔, 병신아.”




28. 한 밤의 시장.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시간이 교차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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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오천 원. 장깨 역시 그 돈은 없었어. 그도 가불을 해야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장사 시작 전부터 가불을 언급하면 뺨 맞을 수도 있거든. 장깨가 사장 눈치를 봐서 일 끝날 때쯤 부탁해보기로 하고 난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왔어. 오후가 되어 문을 열었지만 명절 끝이라 손님은 거의 없었어. 형에게 돈을 받은 여자는 이미 가고 없었어. 형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님 오면 인터폰 하라며 지하 보일러실로 자러 갔어. 항상 손님이 오가는 영업집에 인적이 뜸하니 다들 지루했을까, 카운터 지키는 이모가 나와 보일러 조수 형을 불렀어. 추석 음식 남은 걸 싸 오신 거야. 우리가 이모라고 부르는 그분이 사장 부인의 친척 언니란 말했지? 사장이 자꾸 지하다방 마담을 건드리니까 감시하려고 사장 부인이 일부러 데려다 앉힌 분. 성격이 수더분하고 뒤끝도 없는 분이었어. 나를 뽀이, 보일러 조수 형은 보이라, 라고 부르며 집에서 가끔 제사 음식 같은 걸 가져다주셨어. 정이 많은 대신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분은 아니셨어. 아무나 붙잡고 아무 얘기나 떠드는 걸 좋아하셨지. 목욕탕에서 제일 약자인 우리 둘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계시는 것만으로도 난 그분을 좋아했어. 덤으로 들어온 음료를 가끔 드리곤 했지. 이모가 내게 물으셨어.


“때밀이 마누라 애 띤다디?”

“네? 애를요?”

“아까 때밀이가 지 앤지 누구 앤지 띠라고 지랄 지랄 허더먼?”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그러면 안 돼. 지가 델구 살면서 애 배게 했으면 내 새끼구나 해야지. 의처증은 병이여, 병.”

“의처증요?”

“의처증뿐이간디? 지는 저 쪽이랑 붙어 먹자네. 첩질 하는 인간 명 긴 거 못 봤다.”


이모가 여탕 쪽을 가리키며 불쾌한 듯 말했어. 그럼 이모도 형이랑 여탕 누나 사이를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들 사이를 내가 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이모 음식을 공짜로 먹는 것 같아 죄스러웠어. 그렇다고 이모한테 함부로 입을 놀리면 얘기가 돌고 돌아 형에게 갈지도 몰라. 이모의 말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보일러 조수 형이 말했어.


“여탕 누나는 오늘까지 쉬나 보죠? 아, 부럽다...”


“보이라야. 니가 땅 속에서 보이라만 때더니 목욕탕 물정을 통 몰른다야. 갸는 오늘 쉬는 게 아녀. 아침에 때밀이 여편네가 한바탕 했자네. 그 바람에 쬐껴 간겨. 그 여자도 독하더먼. 여탕 처녀 머리채를 움켜쥐고 카운터 벽에 막 쥐어박는데. 눈에서 불이 막 텨. 아주 싸나워. 허기사 그라니께 때밀이 겉은 종자랑 살 붙이고 살았겄제... 늬덜은 그런 여자 만나면 안 된다잉?”


형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집에 임신한 여자를 두고 여탕 누나랑 두 집 살림을... 모를 일이었어. 돈을 그렇게 아끼는 형이 두 집에 돈을 썼다니. 아니지, 형이 버는 돈이면 두 집 써도 남지. 음식을 다 먹고 그릇 설거지를 해서 갖다 드리고 탁자 위에 드러누워 한 숨 자고 일어나도록 손님은 더 오지 않았어. 형도 일찍 들어가고, 나도 목욕탕 문을 일찍 닫고 장깨를 만나러 갔어. 장깨가 만 오천 원을 내밀었어.


“만 원이면 되는데...”

“오천 원 밖에 없는 그지 새끼가. 그건 필요할 때 써, 임마.”

“고맙다. 곧 월급날이야. 금방 줄게.”

“고마울 거 없어, 임마. 니네 엄마 좀 팔았다. 우리 사장이 니네 엄마 만날 일 없잖냐.”


중국집 사장은 내가 자주 장깨를 불러 때를 밀어주는 걸 알고 있었어. 늘 땀에 절어 있는데 씻으면 냄새가 덜 나잖아. 덕분에 내게 호의적이었어. 그걸 아는 장깨가 우리 엄마가 수술을 한다고 거짓말을 해 가불을 한 거야. 당신이 돈을 안 줘서 당신을 팔아 가불 했다는 걸 어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오전에 외상값을 갚았어야 했는데 벌써 어두워졌어. 돈을 주머니에 넣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려는데 장깨가 자전거를 끌고 나왔어. 버스는 돌아가니까 자전거로 뚝방길 따라 쭉 가는 게 더 빠르다고. 장깨 자전거 뒤에 타고 밤바람을 가르며 달려 경양식집에 갔어. 장깨는 밖에서 기다리고 난 경양식집으로 들어가면서 각오를 다졌어. 외상을 먹은 주제에 이제야 돈을 가져왔으니 따귀 몇 대는 맞을 테니. 때밀이 형이라면 따귀로 끝나지 않았을 걸. 명절 끝이라 손님이 꽉 차 있었어. 사장을 만나 구십 도로 허리 굽혀 사죄하고 돈을 드렸어. 오전에 오려고 했는데 사정이 생겨 이제 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를 꽉 물었어. 맞을 때 입 안이 덜 터지거든. 근데 사장님은 때리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사정인지 묻는 거야. 죄송해서 더 솔직하게 말씀드렸어. 답을 하다 보니 내 형편을 다 말씀드리게 되었어. 형이 교회에서 얻어 온 기타를 독학으로 배우게 된 일, 고등학교 못 가고 때밀이 배우러 목욕탕에 간 일. 그러다 은행 다니는 그녀를 알게 되었고, 오늘은 극장에 갔는데 친구들을 갑자기 만나는 바람에...


“하하. 그러니까 여자 친구 함박스테이크 사주느라 그런 거네. 부럽다. 너희 때가 참 좋을 때란다.”


DJ 박스엔 오늘도 사람이 없었어. 사장은 나더러 이왕 왔으니 어제 불렀던 노래나 한 번 더 해보래. 목욕탕 일도 끝났겠다, 못 할 거 있나.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사장님의 마음에 울컥 해서였을까, 노래가 더 잘 된 것 같았어. 어떤 손님은 박수도 쳐 줬어.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자 사장님은 이곳에서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 저녁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 그러면 하루에 삼천 원을 주겠대. 그것도 주급으로. 삼천 원이면 함박스테이크에 후식까지 먹을 수 있는 돈이야. 한 달이면 구만 원이니까 목욕탕보다 많이 버는 거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목욕탕은 여덟 시에 끝나는 게 문제였어. 청소까지 마치면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거든. 난 목욕탕 일을 해야 해서 빨라도 여덟 시 반은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대신 더 늦게 끝나면 안 되겠느냐고 여쭸고 사장님은 그럼 여덟 시 반부터 아홉 시 반 까지 하고 이천 원을 주시겠다고 했어. 두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줄었으니 천오백 원만 주셔도 됩니다, 그랬더니 일단 시작해보고 다시 의논하재. 그분은 때밀이 형처럼 욕을 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았어. 마치 나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대화를 해주었어. 돈 주고 일 시키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어.


경양식집을 나와 바로 집으로 향했어. 기타를 가져오려고. 탈의실에서 미리 연습을 해야 하니까. 장깨는 싫다, 내색도 안 하고 나를 싣고 밤길을 달렸어. 집에 가니 엄마는 퇴근 전이고 아직 초등학생인 두 동생이 조그만 밥상에 아무 반찬이나 꺼내 놓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어. 밥상 테두리에 묵은 때가 보였어. 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났어. 기타와 노래책을 챙겨 바로 나와 장깨 자전거에 탔어. 기타 케이스가 없으니 한 손에 기타 모가지를 잡고 한 손엔 책을 들고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바깥 차선을 허위허위 노 젓듯 달렸어.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서 몇 번이나 놀래 넘어질 뻔했어. 그럴 때마다 지나는 차에서 욕설이 쏟아졌어. 그들 눈엔 우리가 밤에 기타 들고 놀러 가는 걸로 보이겠지. 찻길로 다니는 리어카들도 많았어. 리어카보다 배가 넘는 간장 통을 가득 싣고 허우적허우적 배달을 가는 아저씨,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 이 분들은 언제 주무시나. 시장통을 지날 땐 더 했어. 그 넓은 도로에 리어카며 짐자전거들이 엉켜 있었어. 밤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어. 부자들이 아늑한 가정으로 돌아가 식탁 위 과일을 거리낌 없이 먹으며 휴식을 누리기 시작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내일을 준비하러 거리로 나오는 거야. 이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각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 리어카와 리어카가 서로 비키라고 고성을 지르고 욕설을 주고받으면 그 틈을 오토바이가 신경질적으로 빵빵대며 비집고 지나갔지. 밑바닥 삶들끼리 서로에게 더 가혹한 현실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분노 지옥 같았어. 고리키나 체홉, 투르게네프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한 군상에 의해 더 잔인하고 염치없는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곳 말야. 벌레 같은 다툼이 한밤의 도로에서 일어나고 있었어.

목욕탕으로 돌아왔을 땐 밤이 제법 깊어있었어. 장깨 등에 땀이 흥건했어.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어. 장깨는 그걸 감추려고 무릎의 먼지를 터는 흉내를 내며 담배를 피웠어. 너무 고마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나 땜에 괜히 네가 고생했네...”

“지랄하네. 들어가 자라, 임마. 연습 잘하고.”

“목욕탕 가서 샤워하고 같이 자자.”


목욕탕에 올라가자마자 냉장고에서 제일 비싼 음료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어.


“아, 그 새끼, 참... 됐어, 임마. 팔아서 돈이나 빨리 갚어, 자식아.”

“응. 돈 빨리 벌게...”


그는 샤워를 하자마자 탈의실에 벌렁 눕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어. 큰 배달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우리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에게 고맙단 말도 제대로 못 했어. 나이는 동갑이지만 형 같았어. 하는 짓도 어른스러워서 항상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었어. 살면서 그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까. 매사 든든한 그에게 그럴 일은 없어 보였어.


그가 잠든 옆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앞으로 경양식집에서 부를 노래 목록을 적었어. 중1 때부터 기타를 만졌고 목욕탕에서도 항상 라디오를 들어서 당시 유행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 그중에서 경양식집에 어울릴 만한 노래를 정해야 해. 노래를 배운 적도 없고 목청이 좋은 것도 아니라서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 노래보다 기타 반주 비중이 높으면서 부르기에는 어렵지 않은 노래를 골라야 해. 또 사람들이 너무 모르거나 너무 잘 아는 노래도 안 돼. 그렇다 보니 노래를 고르는 게 어려웠어. 노래를 고르면 또 그 노래에 맞는 기타 코드도 따야 해. 실제 가수가 부르는 음높이와 내가 부를 수 있는 음높이가 다르거든. 코드를 바꾸거나 카포를 어디에 쓸지를 미리 정해야지. 팝송 책에 나와 있는 노래는 바로 코드를 따면 되지만 가사만 있는 노래는 내가 짐작해서 코드를 만들어야 했어. 매일 같은 노래를 할 수도 없으니 여유 있게 준비해야 해. 가요도 몇 곡 넣어야 해. 그렇게 해서 난 몇 개의 레퍼토리를 만들었고 악보를 만들었어.


딥 퍼플 - Soldier of fortune

사이먼 앤 가펑클 - Scarborough fair, The Boxer, Sound of silence

로보 - I'd love you to want me

스모키 - Living next door to Alice(유명한 노랜데 못 불러서 결국 제외)

캔자스 - Dust in the wind

케니 로저스 - Lady

코모도스 - Three Times A Lady

레인보우 - Rainbow eyes

레드 제플린 - Stairway to heaven

조동진 – 나뭇잎 사이로, 행복한 사람, 작은 배

정태춘 – 촛불, 서울의 달, 떠나가는 배,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망부가

김민기 – 가을 편지, 친구

송창식 - 사랑이야


이 중에서 내가 특히 자주 부른 노래는 정태춘씨의 노래였어. 경양식집 사장님이 좋아하셨거든. 그분이 그러는데 정태춘씨도 한 때 목욕탕 보일러 조수였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 목욕탕 보일러 조수 형이 떠올랐어. 나와 함께 목욕탕에서 가장 바닥이었거든. 그런 사람도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묘한 희망을 줬어.


다음 날, 형의 출근을 기다려 조심스럽게 노래 이야기를 꺼내보았어. 여덟 시에 목욕탕이 끝나면 먼저 노래를 하러 갔다가 와서 수건 널고 청소할 테니 허락해 달라고. 형은 매서운 눈을 하고 욕을 했어. 형편이 어렵다기에 오갈 데 없는 새끼 데려다 돈벌이도 시키고 이제 슬슬 때밀이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새끼가 싸가지 없이 다른 데로 새냐고. 아무리 못 배워먹었어도 인생 그 따위로 사는 거 아니라고.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자기 같은 사람이 골탕을 먹는다는 거야. 그래도 내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사정을 하니까 바로 따귀를 시작으로 때리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염치와 은혜를 모르는 양심불량자로 몰아갔지. 그날 나는 힘 없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저주를 형에게 다 들었어. 사실 방금 전까지 형에게 들은 욕을 형의 말투로 큰따옴표를 붙여 여기에 써 내려갔었단다. 너희들에게도 보여주려고. 그런데 결국 하다 말았어. 참담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 마치 내가 다시 열일곱이 되어 형 앞에 끌려 가 있는 기분인 거야. 식은땀도 났어. 이미 지난 일이고 난 더 이상 뽀이가 아닌데도. 결국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러 다 지웠어.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잊히지 않나 봐. 그래도 형에게 처음 맞을 때만큼 무섭지는 않았어. 전 같았으면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어. 얻어맞은 경험이 맷집을 키웠을까, 아니면 새 일자리에 대한 자신감이었을까. 그럴지도 몰라. 이미 그 무렵 몇 개월 전의 나와는 달랐어. 더 이상 겁 많고 눈물 많은 목욕탕 뽀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 사람이라는 게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고,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걸 알만한 시간이 흐른 뒤였지. 형이 날 때리고 싶으면 때리겠지만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도 그즈음 생겼어. 월급 받는 것만큼 매를 맞는다 생각하면 무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때리면 맞지 뭐. 욕하면 욕먹으면 돼. 그것도 월급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면. 아무리 위협을 하고 욕을 해도 내가 말을 안 들을 것 같았는지 형은 나를 설득하려고 했어.


“그렇게 두 탕 뛰다가 골병들어, 새꺄. 딴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있어.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때밀이 잘 배우면 새꺄, 노래보다 훨씬 나아. 경양식집 사장 새끼가 니 노래 몇 달이나 시켜줄 거 같냐? 잘 생각해, 임마.”


니가 나 골병드는 걸 걱정해 줄 때가 있었느냐고, 그 위선 역겹다, 개새꺄, 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어. 지금은 형을 설득해서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게 최선이니까. 형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 보기로 했어. 우리 엄마가 몸이 아프셔서 일을 못 다니신다고. 사실은 어제도 그래서 가불을 부탁드렸던 거라고. 한 번만 봐주시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한 번 거짓말을 시작하니 줄줄 나왔어. 내친김에 그의 발끝에 무릎 꿇고 울먹였어. 형이 확 짜증스러운 표정을 했어. 그러나 이내 수그러지는 것 같더니 나를 노려보며 말했어.


“햐, 거 씨입새키. 시팔노무 씨애키... 햐, 거... 대신 똑바로 안 하면 뒤진다.”


생각보다 형이 쉽게 허락을 했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형에게 책잡히지 않게 청소를 더 열심히 했어. 중간중간 손님이 끊기고 형이 한 숨 자러 내려가면 재빨리 사물함에서 숨겨 놓은 기타를 꺼내 연습했어. 갑자기 기타를 잡으니 왼손 손가락 끝이 벌겋게 아리면서 살같이 벗겨졌어. 그래도 노래를 하면 돈을 준다는데. 어떻게든 잘해야지.


내가 노래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도 기뻐해 줬어. 그런데 얼마를 받느냐는 질문에 내가 하루에 천오백 원이라고 하니 갸우뚱하는 것 같았어.


“천오백 원? 택시비 밖에 안 되잖아. 기본요금이라고 해도 오백 원은 나올 텐데 왕복이면 얼마야?”

“잘하면 좀 더 주실 지도 몰라요. 두 시간 하면 삼천 원을 주신다는 데 제가 시간이 안 돼서...”

“그걸 쉬지도 않고 매일 한다고? 주현씨, 그 돈 다 벌어서 뭐 하려고 그래요?”

“인희씨 맛있는 거 사 주려고요. 헤헤. 또 엄마도 드려야 하고 저축도 해야 고등학교에 가고...”

“주현씨 돈 없어요? 몰랐네? 많이 가난해요?”

“네, 가난해요.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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