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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Sep 09. 2015

1학년 아이들도 욕을 한다.

1학년 아이들이 욕을 하는 이유

바깥엔 여름 단비가 내리던 날, 쉬는 시간이었다.

비가 오니 바깥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교실에서 놀자니 금세 몸이 근질거리는지

한 아이가 외쳤다. 선생님, 검정 고무신 볼래요. 테레비 틀어줘요.

그러자 또 한 아이가 그 아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퉁을 준다. 

으이구 자알~ 한다. 야, 너 왜 선생님한테 막 시켜. 선생님 제가 검정고무신 보고 싶은데 쫌 틀어주시면 안 되까요 이렇게 공손하게 해야지. 으이구. 맞죠, 선생님?

그 말에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몰린다. 아이들의 눈빛을 보니 그 아이의 말에 동조하는 것 같다.


그 아이의 말이 맞다. 불과 며칠 전에 상대에게 요청할 때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를 배웠으니.

하지만 자칫 여론 재판에 의해 한 아이의 검정고무신 욕망이 짓이겨지는 것 같아 

내가 섣불리 동조를 못하고 입을 우물거리며 멍청하게 있자, 그 아이가 날카롭게 한 마디를 더 한다.

공부시간에 배웠잖아요. 어른들한테는 예절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고.

난 일부러 허리가 아픈 척 꾸부정한 허리를 두드리며 아주 느리게 TV를 켜며 아이의 날카로움을 눙쳐 본다.


내가 TV를 켜자 아이들이 와~ 하며 좋아한다.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자 아까 TV를 틀어달라던 아이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당당히 또 외친다. 불 꺼 주세요. 교실 껌껌하게.

아까 나무라던 아이가 또 그 아이를 나무란다. 야, 너 왜 자꾸 선생님한테 까불어. 싸가지 없게. 그러다 선생님이 테레비 끄면 어떡할라구.

그 아이도 대든다. 야, 니네 나 땜에 검정고무신 보는 거잖아. 그럼 너 보지 마. 선생님 쟤는 보지 말라그래요.

두 아이의 대립에 어느 편을 들어도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은 안 생길 것 같은 지 나머지 아이들은 섣불리 끼어들지 못 하고 두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본다.


난 교실의 전등 스위치를 내리며 목소리를 깔아서 말한다. 음... 자꾸 싸우면 텔레비전을 꺼야겠네.

바깥에 비는 내리고 교실의 불까지 끄니 평소보다 교실이 한결 어두워졌다.

만화가 시작되자 한 아이가 물었다. 누워서 봐도 되죠?

난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선뜻 말한다. 그럼. 쉬는 시간이니까 맘대로 해도 되지.

그러자 아까 나무라던 그 아이가 또 타이르듯 지청구를 준다. 야, 누워서 테레비 보면 너네 허리 다 꼬부라진다.

아까 그 아이도 빽 소리를 지른다. 야, 지금 쉬는 시간이잖아. 선생님이 맘대로 해도 된다 그랬어. 넌 상관 쓰지 마.

그러면서 교실 바닥에  가방을 베고 척 눕는다.









잠시 후, 나무라던 아이를 뺀 다른 아이들 모두가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교실 뒤로 나가더니 그걸 따라 한다.

어떤 아이는 친구의 의자를 두개 붙여 그 위에 드러눕는다. 순식간에 교실이 평화로워진다.

나무라던 아이는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의자에 앉아 TV를 본다. 나는 그 아이 옆에 슬쩍 가서 앉았다.





만화에서 웃기는 내용이 나오면 나도 재미있는 척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옆에 앉은 아이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지 나의 큰 웃음소리에도 웃지 않는다. 일부러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까의 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가끔 친구들이 궁금한 지 나 몰래 흘깃거린다.

난 모르는 척, 너도 눕고 싶으면 누워서 봐도 된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아이는 당장이라도 누울 것처럼 교실의 빈 곳을 탐색하는 것 같더니 누워 있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색을 하고는 말한다. 싫어요. 누워서 보면 허리 꼬부라질까 봐요.


*


예의 바른 말투를 집에서 미리 배우지 못해 사사건건 친구들로부터 퉁을 받는 아이와

먼저 배워오긴 했지만 그걸 부족한 친구에게 퉁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아이의 정서발달 수준은 결국 같은 위치에 있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건 말투가 아니라 그 말투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담아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인데,

두 아이 모두 그 단계까지 끌고 가는 일이 고되다.

이럴 때, 명쾌하게 해결책을 주고 단번에 가르쳐내는 것이 선생인 나의 일이건만, 쉽지 않다.

어쨌든 이 두 아이 덕분에 나머지 아이들은 말투보다 말하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좀 더 쉽게 배울 기회일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엔 시키듯 하지 않고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거라고 거의 매일 강조를 하지만 정착이 잘 안된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 줄 땐 공손한 표현을 잘 따라 하면서도 막상 실생활에서는 평소 사용하는 말투가 그대로 나온다.

아이들 입장에서 이미 익숙하게 몸에 밴 직설적 표현은 바로 나오지만,

새롭게 배운 공손한 표현은 그 문장을 일부러 떠올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잘 안 쓰게 된다.

가정에서 부모나 형제관계에서 굳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자신의 요구가 쉽게 충족되는 환경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어른을 상대로 깍듯한 표현을 해 보면 습관이 될 텐데

생각보다 많은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굳이 그런 말투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는 부모의 삶이 너무 바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이가 보채니까 일단 먼저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나서 아이를 진정시킨다. 이번에 해 줬으니 다음번엔 예쁘게 말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원하는 걸 얻고 난 아이의 입장에서 어른의 그런 교육은 잔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아이는 일단 먼저 떼를 쓰고 본다. 잠깐만 야단을 맞으면 가장 빠르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니.

그런 아이들은 식당에서, 장난감 가게에서 자기 고집을 피며 남의 시선을 이끌어 부모를 난처하게 만들면

자기의 요구가 쉽게 관철된다는 걸 경험적으로 터득한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부모는 뒤늦게 아이를 강하게 다그쳐 보지만,

부모 앞에서도 그러는 단계에 이른 아이가 다시 부드러운 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사소한 예절까지 모두 가정에서 어른이 엄격하게 지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 자식이 예의를 갖추지 못하면 동네에서 흉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어른들은 자기 자식이 무례함으로 남에게 책 잡힐까 봐 예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돈인 산업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그런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모처럼의 시간이 겨우 나면, 훈육은 고사하고 아이가 원하는걸 해 주기도 바쁜가 보다.


어떤 부모는 예절에 관한 훈육이 자칫 자기 아이를 기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수행평가의 비중이 높아지고, 직장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잘 펴야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겸손과 신중함보다는 남보다 빨리 어떻게든 과감하게 표현하고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의를 가르칠 여유가 없는 바쁜 일상과 자녀 훈육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갈수록 드세거나  버릇없거나 발칙하거나 도발적이거나 직설적인 아이가 늘고 있다.


그 결과, 학교에서는 어른인 교사를 대하는 아이들의 말투를 가르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고학년이 되면 어떤 아이들은 담임교사에게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를 쓰기도 한다.

마치 자기의 친구를 대하듯 한다. 아이가 하기 싫은 과제를 교사가 내면 아이는 저항한다.

아이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친밀감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교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는다.


말투가 잘 못 된 아이를 보면 나는 공손한 표현을 알려주고 다시 해 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공손한 표현 문장을 연습하면서  어색해한다. 자기가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패턴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입이 거친 아이들은 어른이나 친구들에게 자기가 내키는 대로 막 말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가 뭘 잘 못 하는 줄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게 버릇없는 아이 취급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제아가 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아이들의 말투에 있지 않다. 말투는 그 아이가 상대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라서

반항적인 말투를 쓰는 아이는 실제 행동도 그러한 것이 진짜 문제다.

내가 고학년을 담임하던 작년에, 수업 시간마다 나의 말끝마다 '왜요?'를 붙이는 아이들을 만나야 했다.

아이들의 그런 말투 속에서는 선생, 자기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느냐는 반항심이 들어 있다.

그 말투를 고쳐주려고 하면 아이는 노골적으로 짜증 섞인 표정을 하곤 했다.

어쩌다 열 두세 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이 지경이 됐을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난 가능하면 부드러운 말투로 문제점을 설명해주려 애썼다.

그러면 내 말을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거나, 더 나아가 고쳐보려는 아이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돌아서면서 내가 안 들리게 내뱉는다. 씨발, 존나 짜증 나.


그나마 학교에서 담임을 대하는 태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런 아이들이 집에서 부모, 특히 그나마 무서운 아빠가 없을 때, 엄마를 대하는 걸 보면 그 실상이 더 비참하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반항을 하며 심지어 위협까지 한다.

이 지경이 된 아이들을 이기고 통제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이미 기싸움에서 부모를 이긴 것이다.

이 상황이 되면 아이는 엄마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엄마의 경고를 무시하고 피시방을 가거나 쉽게 거짓말을 한다. 탄로가 나도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엄마를 윽박지른다.

엄마들은 자기 아이를 향해 설득을 하고 야단을 쳐보지만, 종국엔 하소연도 통하지 않는 걸 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강하게 아이를 압박할 수 있는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 아빠는 아이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는 곧 아빠 말도 달게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엄마들은 학부모 상담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특히 이런 아이와 실랑이를 해 본 엄마들은 대부분 담임인 내 앞에서 참담해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순하던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핏대를 세우며 달려드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린다.

사춘기라서 그렇겠지요. 좀 더 크면 철들겠지요.

나는 이렇게 위로하지만, 난 안다. 예전의 아이로 돌아오기엔 그 아이의 삶이 너무 거칠어졌다는 걸.

이런 상황에서 부모들은 내게 매달린다. 아이가 부모 말은 잘 안 듣는다고.

그나마 담임선생님의 말은 들을 테니 어떻게 좀 해 봐 달라고.

아이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 6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머리 굵어진 아이를 교사가 바꿀 수 있을 확률은.

성장하는 속도가 그만큼  빠를수록, 그 아이가 어떤 방향으로 빠르게 바뀔지도 쉽게 가늠이 안 되는 시기.

그 시기의 버릇없는 자기 자식을 키우는 일이나, 그 아이를 학교에서 맡아 가르치는 일로  먹고사는 나나 모두 고되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어떤 아이들은 일부러 공손하게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친구들 사이에게 예절 바른 아이는 흔히 모범생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사내가 사내답지 못하고 말투는 친절하고 표정이 부드럽다면 다른 남자 아이들에게 기가 꺾인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를 강하게 키운 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거친 표현을 그냥 두기도 한다.

심지어 아이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욕을 하거나 험한 표현을 한다.

운전을 하다가, 또는 일상의 생활에서 부모가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향해 욕을 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불행하다.


보통 자의식이 강해지는 4학년 정도가 되면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말투가 사뭇 달라진다.

남자 아이들은 자연계의 수컷이 으레 그렇듯 다른 남자 아이들과의 기싸움에 흥미를 갖게 된다.

자연계의 수컷들이 다른 수컷과의 경쟁을 위해 뿔을 키우거나 이빨을 키우듯

아이들이 공부나 운동으로 경쟁을 하면 참 좋겠지만, 아이들은 그걸 쉽게 포기한다. 하기 싫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대신 자기가 포기한 것을 감추고 싶어서 일부러 그깟 공부는 아무것도 아닌 양 따져 묻는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예요? 엄마는 옛날에 공부 잘 했어요? 아빠 옛날 고생한 얘기를 왜 지금 하는데요.


그래서 사춘기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서 부모의 속을 뒤집는다.

난 뭐든 제일 잘 할 수 있어요. 단 공부만 빼고요. 왜냐? 공부 그까짓 거 별거 아니니까요.

끝까지 자기의 노력이 부족해서, 또는 공부를 다시 시작할 용기와 의지가 없어서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난 이런 것들의 시작이 1학년 때 그 아이가 어떤 말투를 지니고 시작하는가와  연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금 1학년 아이들이 그 쪽으로 빠지지 않게 하려고 온갖 애를 쓴다.


어떤 아이는 1학년인데도 말끝마다 상스런 표현을 한다.

고학년 형님들처럼 <씨발 / 극혐 / 존나 / 에바> 같은 구체적인 말은 아직 쓰지 않지만

<아, 짱나 / 아, 진짜 / 아, 씨~ / 헐 / 지랄 >같은 의성어 수준의 거친 표현은 익숙하다.

아이들이 이 말을 가까운 어른에게 배운 것처럼 곧 이 욕보다 더 심한 표현이 말끝에 붙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런 표현을 안 쓰게 하고, 그 이전에 그런 표현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부끄러운 표현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그네나 딱지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면서 무심코라도 욕을 하면 무조건 놀이를  중지시킨다.

그리고 난 아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과제를 낸다. 아이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그리고 시간 안에 다 하기 힘든 과제를 잔뜩 주고 버틴다. 그리고 한 동안은 놀이를 아예 못하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다시 내가 기분이 좋아지도록 와서 사과도 하고 앞으로는 고운말을 쓰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한다.

그러면서 얼굴이 벌겋게 따진다. 우리가 받아쓰기 틀린 건 봐주면서 몰르고 욕 한 건 왜 안 봐주는데요, 증말. 그래도 난 못 들은 척 한다.

아이들에게는 특히 그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 즉 어휘가 중요하다.  

특히 그 아이가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때 어떤 부사나 형용사를 쓰는지를 보면 그 아이의 성장 환경이 보인다.

어릴 땐 욕의 의미도 모르고 욕이 포함된 문장을 자연스럽게 따라 하며 배우다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 욕이 나쁜 걸 아는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걸 안 하려고 애 쓰는 게 정상적인 성장일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계기로 욕을 하게 되는가.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이 힘들다고 생각할 때 아이는 열등감에 상처를 받기 시작한다.

자존감이 강한 아이라면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을 상처로 치환함으로써 자기를 학대하지 않겠지만,

자존감이 약한 아이는 그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본능적으로 강한 척을 하게 마련이다.

공부로 강한 척을 하면 참 좋으련만 그런 아이들은 없다. 대신 도발적인 외모를 가꾸고, 거친 말을 한다.

그 이유를 물으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자기가 너무 지질해 보이는 게 두려워서.

그 결과 학교 규칙을 어기며 머리를 염색하고 치마를 줄여 입고 해로운 걸 알면서도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 중 대부분의 아이들이 또래나 엄마 앞에서는 유난을 떨다가도 막상 혼자 있으면 안 그러는 경우가 꽤 많다.

일부러 센 척을 하는 것도 본인으로선 꽤나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혼자서 있을 땐 용기가 안 나 튀는 짓을 못한다. 누가 봐도 모자라는 짓인 걸 그 아이들도 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은 기를 쓰고 비슷한 또래끼리 어울려 다닌다. 이 때 잠시라도 누가 그 고리를 좀 끊어주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하다 보니 그 길로 갔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이 처음부터 온순하고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게 누군가 도와 줬더라면, 그에겐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자기의 귀한 입으로 험한 말을 하는 걸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아이로 키웠으면.

어릴 때부터 부모든 선생이든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쳐 주었다면. 결국 자존감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가 점점 클라이맥스 부분으로 치닫자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워서 보면 몸은 편하고 재미있겠지만, 집중해서 보기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잠시 후, 이번엔 하나 둘 씩 책상 위에 올라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끝까지 교실 바닥에 눕지 않던 아이도 이번엔 친구들을 따라 책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 사이에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고 그 꼭대기 즈음에서 아이들은 배를 잡고 깔깔깔 웃었다.

내내 웃지 않던 아이도 같이 어울려 웃었다. 그 아이의 웃음에 난 안도했다.

어쩌면 아이들은 처음부터 저렇게 앉아서 영화를 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조금  돌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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