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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Sep 23. 2015

엄마의 욕망 vs 교사의 욕망 vs 아이의 욕망

엄마,교사 사이에서 1학년 아이들이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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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은 학년초에 교과서 수업을 하기 전 별도의 적응기간을 보낸다.

이 기간에는 '우리들은 1학년'이라고 부르는 교재를 사용하는데 주로 지역교육청에서 제작해서 보급하지만 담임이 따로 준비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적응을 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활동은 주로 화장실, 급식실 사용법 알기나 친구 사귀는 일을 주로 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친구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내일 또 학교에 오고 싶다고 말한다. 무리를 이루고 싶은 사회적 동물 본능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는게 두려웠는데 와 보니 막상 자기와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에 안도하며 반긴다.

그 정서 때문에 1학년 아이들은 쉽게 친구가 된다.


어른이 친구를 사귈 때 통성명부터 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은 처음부터 이름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친구를 호칭할 땐 그냥 '쟤'라고 표현한다. 그러다가 자기와 마음이 잘 맞는다 싶으면 서로 이름을 물어본다. 특별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며칠이 지나도록 친구의 이름을 모른다. 친구에게 관심이 없고 또 관심을 받지도 못해서다.

난 이런 아이를 눈여겨봤다가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 그 아이를 주요 역할에 넣어줘 본다.

대부분 잘 통하지만, 모든 아이가 좋은 결과를 보이지는 않는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친구관계는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된다.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 자기가 친구들에게 선택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를 쓴다. 연필이나 사탕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오줌이 안 마려우면서도 친구와 화장실을 같이 가 준다.

그러면서 자기 성향을 좋게 봐주고 받아줄만한 상대를 탐색한다.


아이들은 교실에서든 그네나 미끄럼틀에서든 치열하게 자기와 맞는 상대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거절당해 울고 누구는 선택의 즐거움을 누린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성향을 알고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는 능력이 드러난다.

아이가 어떤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지를 보면 그 아이가 대인관계에서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읽을 수 있다.

어떤 아이는 자기가 군림하기에 만만한 상대를 찾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오히려 자기에게 군림해 줄 상대를 찾는다.

어떤 아이는 부모나 형제와 비슷한 느낌의 친구를 찾기도 하고 또 정반대 느낌의 친구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이왕이면 군림하는 쪽, 이끄는 쪽 편에 서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기 아이는 왜 주도적으로 친구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친구에게 끌려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한다.

집에서 동생에게 막 대하는 걸 보면 친구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이상하게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낳고 길러 왔으면서도 어떻게 아이의 욕망을 모를 수 있을까.

아이가 어릴 땐 생존을 유지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키우다 보니,

자기 아이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아직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은 이렇게 애매한 시기다. 엄마 눈엔 아직 아가, 사회에서는 유년. 다른 두 관점에 의해 아이와 부모가 혼란하다.



교실은 가정이 아니다. 교실에는 자기를 도와주는 엄마도, 자기를 야단치는 엄마도 없다.

부모의 욕망이 차단된 1학년 교실에서, 아이는 비로소 자기의 본연의 욕망대로 친구를 사귄다.

부모의 욕망을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집과 그 욕망을 굳이 안 따라도 되는 교실에서 아이는 두 가지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자신의 원래 욕망, 살아 남기 위해 할 수 없이 그런 척해야 했던 욕망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해 낸다.

이러면서 엄마의 부속물로서의 아이가 아니라, 비로소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런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부모의 틀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시험대.

1학년 시기는 비로소 아이의 본색이 드러나는 시기다. 그래서 부모와 교사들이 이 시기의 아이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아이의 원래 욕망이 그동안 엄마로 인해 억압되었던 건 아닌지, 잘 가늠해내야 한다.

아이의 욕망과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걸 잘 유지하며 자랄 수 있게 해야 아이의 삶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년초, 이 시기의 치열함을 학교 바깥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시기 아이들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끝없이 학교 이야기를 한다.

어떤 친구가 울었다요, 어떤 친구가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요, 점심 때 내 짝꿍은 오이를 남겼다요.

들어보면 자기와 별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을 아이는 왜 그렇게 일러바치듯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려는 걸까.

아이 스스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엄마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를 떠나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학교에서의 내 모습이, 과연 엄마 보기에도 잘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끝마다 묻는다. 엄마가 나였다면 어땠을 거 같으냐고.


ㅇㅇ가 오늘 떠들어서 선생님께 혼났다요. ㅇㅇ는 아주 말썽꾸러기다요. 걔 못됐죠?(친구에게 감정을 부여)

ㅇㅇ가 오늘 조금밖에 안 떠들었는데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다요. 우리 선생님 엄청 무섭겠죠?(담임에게 감정을 부여)

ㅇㅇ가 오늘 선생님한테 혼났다요. 나도 혼날까 봐 무서웠다요. 엄마도 무서웠겠죠?(자신에게 비관적 감정을 부여)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각자 나름의 판단을 덧붙인다.

하나의 사실(떠든 아이가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은 사실)을 두고 아이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판단을 이야기를 한다.

아이가 엄마와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그 아이가 학교, 친구들, 담임교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다.

아이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판단을 엄마도 좋아해 주는지(인정해주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 시기에 아이로 하여금 아예 말 할 기회를 안 주거나 아이의 판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

아이는 점점 학교 이야기를 안 하게 되거나 아예 엄마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하게 된다.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엄마의 비위를 맞추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엄마가 싫어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거나 각색한다.

주로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거나 아이에게 높은 수준을 원하는 엄마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엄마들과 상담을 해 보면 담임인 내가 파악한 아이와 전혀 다른 아이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이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엄마에게 가려서 전달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서서히 엄마의 욕망과 다른 자기의 욕망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한편 엄마의 욕망을 또한 욕망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감추고 엄마의 욕망에 충실하려 애쓴다.

이직은 엄마에게 잘 보여야 자신의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는 엄마의 욕망이 아이의 욕망보다 지나치면 곤란하다.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게 되기 때문이다.

1학년 아이들의 말투를 보면 잘 드러난다.


- (먹기 싫은 반찬을 가리키며) 엄마가 배 아플까 봐 오이 먹지 말래요.(오이 먹기 싫어요.)

- (수학시간에) 엄마가 수학 하기 싫으면 그네 타래요.(수학 공부 대신 그네 타고 싶어요.)

- (바깥놀이 시간에) 엄마가 치마에 흙 묻으면 선생님이 털어 주래요.(제 치마 흙 좀 털어 주세요.)


이런 아이들을 보면 다른 아이들이 바로 퉁을 준다. 야, 너는 니네 엄마가 죽으라그러문 죽을 거냐, 으이구.

강한 엄마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모른 채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지 못한다.

자기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애매하다.

그래서 상대의 욕망을 따라간다. 어릴 땐 부모를, 자라면서는 친구를, 결혼해서는 배우자를, 늙어서는 자식을.

평생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주체적으로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당당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자기 탓을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일수록, 소외가 많은 사회일수록 약자들은 이런 사람들로 채워진다.

남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자식에게 냉대를 받아도 자기 탓을 한다.

그러면서 마음 한 쪽엔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을 키워간다. 결국 그것 때문에 화병이 된다.


욕망이 강한 아이는 엄마의 권유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키우기가 힘들다.

엄마가 아이의 욕망을 억압하는 이유는 그래야 키우기 쉽기 때문이다.

엄마의 삶도 바쁜데 아이의 욕망을 일일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아이도 1학년을 지나 어느덧 사춘기가 되어 엄마와 덩치가 비슷해지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동안 억눌렀던 욕망을 엄마를 향해 쏟아낸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퍼붓는 아이는 시원하기라도 할 테니 다행이다.

이 때, 엄마들은 갑자기 아이가 변했다며 놀라고 슬퍼한다. 고학년 학부모들이 상담을 와서 우는 경우다.

자신의 욕망을 알아서 표현하면서 엄마 입자에서도 키우기 쉬운 그런 아이는 없는거냐고 엄마들이 물어올 때마다, 나는 모성애의 허망함을 읽는다.


그러면 엄마 입장에서 1학년 아이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가 말하는 전부를 믿어주고 호응해줘야 하지만 내용은 사실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왜 아이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이가 너무 비관적이면 왜 그런지를 생각해서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조정해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담임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의 반응도 알려야 한다. 실제 담임이 너무 무서워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엄마들은 아이의 학교생활이 몹시 궁금하고 염려되지만, 담임이 어려워 자주 학교를 찾지 못한다.

교사 또한 엄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학부모가 어려워 그러지 못한다.

부모, 교사가 함께 키워야 할 아이를 가운데 두고 양편이 서로 어려워 소통하지 못한다면 교육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학교마다 상담주간을 열어 공식적인 상담을 유도하지만 그보다 더 많을수록 좋다.

학교는 곳은 아이를 잘 길러보자고 만든 곳이고 교사는 그 핵심에 있다. 어려워도 일단 부딪혀 볼 필요가 있다.

교사와 부모들은 서로에게 너무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아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는 아이의 욕망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욕망에 의존하는 것 못지않게 학교에서는 교사의 욕망을 따르기 때문이다.

엄마, 교사의 욕망을 서로 확인하면서, 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해 나간다. 그래야 아이도 잘 자란다.

교사가 엄격하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교사의 눈치를 보느라 지친다.


또 반대로 너무 관대하면 교사의 방관으로 인해 공백이 된 교실의 질서를 불안해한다.

교사가 어떤 아이를 조금이라도 편애하면 교실의 아이들은 순식간에 그 아이를 중심으로 관계가 재편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교사의 사랑을 더 받는지 안다. 그 순간 아이들은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도 애쓴다.

교사가 인위적으로 아이들의 관계에 개입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교사 입장에서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교실에선 수많은 일이 항상 벌어지고 그때마다 교사가 개입해서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교사든 부모든 타고난 아이의 성향을 함부로 바꾸고 재단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아이 곁에서 머물며 성장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

학기 초는 이렇듯 아이, 부모, 교사 모두에게 치열하고 힘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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