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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Oct 06. 2015

1학년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대하는 어른의 자세

아이가 일기를 쓴다는 것은...

1학년 교육과정상 그림일기는 한 학기 정도 지나서부터 시작한다.

그때가 되어야 글씨를 어느 정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입학 날부터 그림일기를 그렸다. 

일기를 글씨가 아닌 그림으로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숙하지만 자기 손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직 사고가 자기중심적인 1학년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기억한다.

어떤 걸 먹거나, 보거나, 만지거나, 듣는 일 같은 직접적인 감각이 감정보다 우선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최초의 그림일기는 대부분 한 개의 사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엄마 생일날 케이크를 먹은 아이는 그림일기에 케이크 하나만 달랑 그린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생일이라는 사건보다 달콤한 케이크가 더 강렬한 기억인 것이다.

하지만 담임 입장에서 케이크만 봐서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아이가 그린 케이크를 보고 내가 와, 엄청 맛있는 케이크네, 그러면 아이는 내게 사연을 줄줄 얘기해 준다.

어제가 엄마 생일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빠가 까먹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할머니가 아빠한테 빨리 케이크를 사 오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오기 전에 아빠가 케이크를 사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할머니가 엄마한테 미역국을 끓여줬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랑 누나가 엄마한테 선물을 줬단 말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눈물이 났단 말이에요. 

아이의 케이크 그림엔 이렇게 깊은 감동의 일상이 스며 있다. 아이의 그림일기는 그래서 소중하다.


또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은 어떤 아이는 울고 있는 아이 한 명을 달랑 그린다.

그림 속 아이는 입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고 눈에는 눈물이 있다.

그걸 보고 내가 또 아유, 이 아이는 누구신데 이렇게 슬프게 우시나, 그러면 또 내게 엄마를 일러바친다.

어제 내가 레고로 터닝메카드를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 동생이 자다가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 터닝메카드를 만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빨리 다시 만들어 놓으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난 때리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 동생이 울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엄마가 날 때렸단 말이에요.

아이는 자기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혼났다는 사실,

그래서 다음엔 같은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엄마에게 맞아서 아팠다는 기억을 그린다.

1학년 아이에게 회초리는 이런 의미다. 아직 이 아이들은 여기까지 밖에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입체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조망하고 기록하는 어른의 일기에 비해

1학년 아이들이 자신의 감각에 더 의존하는 건, 아직 아이들의 관찰 시점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관찰력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관찰 범위가 좁은 대신 그 밀도가 어른보다 높다.

사물의 이치를 이미 아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그 좁은 관찰 범위 안에서 무한한 상상을 해낸다.

그 방대하고 세밀한 관찰 결과들은 일기장에 그림과 글씨로 일기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탈락될 뿐이다.

하지만 탈락된 기억들은 그대로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심상으로 맺혀 아이들 의식 속에 저장된다. 그리고 평생을 살면서 반추된다.

그 안에는 아이들 개개인이 겪은 일들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아이들의 감정, 판단이 섞인 삶의 원형질이 가득하다.

아직 때묻지 않고 순수한 아이들이 겪는 이런 일련의 과정, 그 과정에서 느꼈던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동심이라 부르는 것들이 아닐지.

그걸 가능하면 다채롭게, 진하게 겪어내고 자기 기억에 많이 채워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갖고 살아가는데 거름이 되지 않을까.


*


그림일기를 쓰게 하면서 원칙을 몇 가지 정해준다. 

글씨를 알면 글씨를 써도 되지만 글씨를 모르거나 글씨를 쓰기 싫으면 그림만 그려도 된다.

아는 글씨를 틀리게 써도 된다. 기분에 따라 색은 칠해도 되고 안 칠해도 된다.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땐 그 기분이 나타나게 표정을 그려 넣는다.

이 원칙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본연의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게 하려는 나의 얕은 계략이다. 

일기의 핵심은 내용이고 그 내용엔 아이의 감정이 포함되어야 하고, 그림이나 글씨는 일기를 표현하는 수단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이들의 그림일기가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이나 반구대의 암각화처럼 

원시 인류의 벽화 수준을 넘지 못하는데 반해, 어떤 아이는 벌써 정형화된 그림일기를 그려기도 한다.

그림일기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고 그 그림에 대한 설명도 육하원칙 비슷하게 체계가 잡혀 있으며 글씨도 가지런하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날짜를 제대로 쓰고, 날씨까지 알아서 쓴다. 일기장 아랫부분에 오늘의 반성도 쓰고 내일의 계획도 다 채운다.

누군가에 의해 이미 훈련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내가 말해 준 원칙을 지키기 힘들어한다. 힘들어 한다기보다, 어려워서 못한다.

그림이나 글씨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담아야 할 자신의 삶은 넣기가 힘들다. 그리기도 전에 벌써 지친다.

이런 아이는 자기에 비해 그림도 대충 그리고 글씨도 이상하게 쓴 아이의 일기가 선생님의 야단을 맞지 않는 걸 이상해한다.

나 또한 이 아이에게, 굳이 날씨나 날짜는 안 써도 되고 오늘의 반성이나 내일의 계획도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아이에게 혼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잘 했다고 한다. 다만 다음에는 이런 일기장을 선택하지 않길 바랄 뿐.

어느 어른이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가. 그건 일기가 아닐 것이다.

세상 어느 아이가 반성과 계획을 통해 성장하는가. 아이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교류하며 성장한다.


어른은 안 하는 걸 아이에게 하려는 의도의 불순함 속에는 어떻게든 쉽게 아이를 키워보려는 어른들의 간절함이 있다.

이렇게 단정하고 모범적인 일기의 이면에, 조금의 실수도 없이 자기 아이를 키우고 싶은 부모의 욕망이 있는 것이다.

뭔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림을 그려 가면 담임이 자기 아이를 바보 같다고 무시할 것이다.

또 아이가 1학년에 들어오도록 그림도 하나 제대로 안 가르치고 내버려 둔 부모를 생각 없다 비웃을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말끔하게 잘도 그려내는데 자기 아이는 귀도 없고 목도 없는 이상한 나뭇가지 사람이라고 그려놓았다면,

다른 집 아이들은 한글은 물론 한자와 영어도 쓴다는데 자기 아이는 받침이나 띄어쓰기도 잘 모른다면,

아이의 학교 선생은 그런 부모인 자기를 얼마나 우습게 알까.

이런 다급한 마음에 우선 억지로라도 그림 공부든 글자 공부든 먼저 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기가 좋은 일기인지 난 잘 모르겠다. 

이런 아이들의 일기엔 아이 삶의 개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 삶을 기록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만이 잘 알 텐데, 타인에게 형식과 틀을 배우는 이 과정에서

아이는 테크닉은 배우지만, 일기에 자기 삶의 개별성을 넣는 방법은 잃는다.

내용도 주로 외식을 했거나 책을 읽었거나 손님이 오셨거나 하는 내용처럼,

자기만의 기록이 아닌 여럿의 기록, 심지어는 자기와 별 상관없는 타인의 일을 기록하기도 한다.

사관이 타인인 왕의 삶을 실록으로 기록하듯,  평이하고 건조하다.


이런 일기엔 아이 자신만의 감정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영혼 없는 글을 보는 것 같다.

그저 즐거웠다거나, 맛있었다거나 다음에 또 하고 싶다는 의례적인 말뿐, 일기는 아이를 깊은 내면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한다.

이렇게 일기를 시작한 아이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글쓰기를 할 때에도 자신의 내면과 겉도는 글을 쓴다.

어린이 글쓰기 전문가 이오덕 선생의 표현처럼 살아 있는 글쓰기가 아닌 '죽은 글쓰기'를 쓰는 것이다. 

이런 일기가 어떻게 아이의 삶에서 동심으로 치환되어 장기 기억에 저장될 수 있을까.

아이는 그저 일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기는 안 쓰느니만 못하다.

이 아이가 원래 이런 식으로 밖에 일기를 쓰지 못하는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가 시켜주는 틀 안에 일기를 맞추려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끼워 넣는 방법을 찾기도 전에 지쳤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하는 까닭이 이런 기술을 자랑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난감하다.


어쩌다 부모는 담임 선생이 이런 아이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 부모가 어릴 적, 그들의 선생들이 그런 아이들만 골라 상 주고 칭찬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창의와 감성을 자기만의 색깔로 만들어내면 오히려 왜 너만 이상하냐고 야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글의 문장이 왜 이러냐고, 그림의 구도나  색채가 너무 튄다고 야단을 맞아 본 아이는

쉽게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포기하고 선생이 원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구도를 잡고 영혼이 거세된 채색을 하고, 명암이나 소묘 같은 기술에 더 매달린다.

아이의 천재성이 평범한 선생의 기준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다.

예술을 잘 모르는 나를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아이들의 동심에서 예술을 멀어지게 만든 그 죄, 내 어찌 다 받을까.



*

그림일기가 시작되면서 난 부모님께도 따로 안내를 했다. 

그림일기의 내용에 대한 조언하지 마시고 아이가 표현하는 걸 존중해 주실 것,

아이의 그림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거나 부족해 보여도 수정이나 보충을 하지 마실 것,

가급적 그림일기를 그릴 때는 아이의 사생활을 보장해 주셔서 혼자 있게 해 주실 것.







한 아이가 등교하자마자 가방도 내려 안 내려놓고 내 책상에서 일기장을 가져다가 숨을 헐떡이며 일기를 쓴다.

그림을 뭘로 그릴까,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그림은 포기했는지 바로 글씨 쓰는 칸으로 넘어가 뭐라고 막 쓴다.

그걸 보고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내가 한 마디 한다. 아유, 가방 무거워 어깨가 빠지겠네.

아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글씨를 계속 쓰는 거 같더니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연필로 북북 긋는다.

아이를 향해 난 또 너스레를 떤다. 아이고, 일기장 다 찢어지겠네.

잠시 후, 아직 상기된 얼굴로 내게 일기장을 쑥 내밀며 외친다. 오늘은 말로예요, 알겠죠?

평소엔 그림으로 가득하던 아이의 일기장에 오늘은 그림 대신 '말로'라는 글씨뿐이다.

오잉, 오늘 그림은 왠지 글씨처럼 보이네. '말로'가 뭐야? 하며 모르는 표정을 하자, 아이는 답답한지 일기를 확 뺏어가며 타박을 한다.

으이구, 오늘 일기가 너무 길어서 말로 하겠다구요.


나랑 우리 누나랑 아빠 차를 타고 학교에 오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디서 개가 나타났단 말이에요. 누런 갠데 빨간 목줄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차가 벌써 지나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개가 어제도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개가 우리 차를 막 쫓아왔단 말이에요. 나랑 누나랑 아빠한테 저기 개 있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빠가 더 빨리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개가 학교까지 막 따라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개가 아빠 차에 치일 수도 있으니깐 나는 아빠한테 차라리 더 빨리 가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 딱 내렸잖아요? 그런데 그 개가 운동장까지 벌써 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운동장에 가 봤단 말이에요? 그런데 형님들이 개를 귀엽다고 데리고 놀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저도 좀 거기서 개랑 노느라 늦게 들어왔단 말이에요. 이제 알겠죠?


이 아이가 말로 하는 일기에서 범상치 않은 생각의 힘이 느껴진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유기견에 대한 건강한 애정, 그리고 그 애정을 실현한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진다.

1학년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하루하루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들 선이 굵다.

늘 그렇고 그런 내용에 싸구려 감상을 몇 줄 끄덕이는 걸로 일기를 대신하는 나의 그것과는 근본적인 진실성부터 다르다.


아빠 차에 개가 치일까 봐, 차라리 차가 더 빨리 달렸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씨.

오늘은 아이의 '말로' 대신 그려졌지만, 이 아이가 글씨에 능숙해지는 조만간, 훌륭한 글쓰기 작품으로 기어이 탄생할 것이다.

아이에게 글씨보다 자기를 먼저 표현하게 해 주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저 아이의 그림, 글씨의 속도는 말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지만, 머잖아 언어의 힘만으로 세상에 없는 그림까지도 그려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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