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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Oct 07. 2015

새똥차의 교훈

1학년 아이들도 교사를 향해 쌓인 게 참 많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오랜 가뭄 끝 단비가 오시는 날이다.

운동장을 소나기에게 빼앗긴 이런 날이면 아이들은 교실에 갇혀 있어야 한다.

잠시도 가만있기 힘든 나이. 밖에 나가 그 뜨거운 몸을 발산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답답해한다.

답답하다 보니 움직임을 과잉하게 되고, 그래서 이런 날 안전사고가 많다.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창문에서 떨어지거나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거나 복도에서 뛰다가 친구와 부딪히거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교사들은 긴장한다. 비 오는 날은 실내 안전사고에 대한 잔소리도 늘어난다.


알까기 대회나 딱지 대회 같은 걸 열어 아예 실내놀이를 유도하기도 한다.

아이의 들이 교실에서 뛰지 않고 앉아서 뭔가를 하도록 묶어 놓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1학년 아이들은 금세 싫증을 내고 뛰어 다닌다.

내가 잠시만 한 눈을 팔면 아이들은 어느새 사물함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책상을 엎는다.

아이들의 움직임에 대한 열정을 알면서도 이런 날은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려고 온갖 술수를 다 쓴다.

평소 보다 더 받아쓰기를 오래 하거나 덧셈 문제를 많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아이들 또한 담임의 통제에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오줌 마렵다고 화장실로 내빼고 또 어떤 아이는 상처도 없는 손을 내 보이며 밴드를 붙여 달라고 한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배가 아파 공부를 못하겠다고 생떼를 부리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나도 사소한 트집을 잡아 강제로 아이들을 자리에 앉힌다.


이게 무리수였을까, 점심시간에 사달이 났다.

아이들이 먼저 점심을 먹고 나가고 뒤이어 내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3학년 아이가 내게 와서 이른다. 1학년 애들이 주차장에서 놀아요.

굵은 비가 조금 가늘어지긴 했지만 아직 비가 오는데 밖에 나가다니. 아까 교실에서 내가 너무 억눌렀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나가 보았다.

막상 나가 보니 난리였다. 아이들은 실내화를 신고 고인 물 위를 돌아다녔는지 다들 바지가 젖었고 손으로도 뭘 했는지 어깨까지 물 투성이다.

아직 춥진 않아도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학부모의 원망을 어찌 감당할까 급한 마음에 빨리 교실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교실로 들어 와 성난 얼굴을 하고 양말을 벗겨 창틀에 널고 나서 모두 교실 뒤로 나가 손을 높이 들라고 한 뒤, 눈을 부라리며 목소릴 높인다.

너네가 아가도 아니고 1학년인데 비 온 다고 나가서 막 뛰어다니고 옷을 적시고 실내화에 흙 묻히면

유치원 동생들이 너네 하는 거보고 나도 형님들처럼 해야지 하고 따라 하다가 감기도 걸리고 교실에 흙도 묻을 텐데 너네 어떡할 거냐고.

이참에 그동안 내 말을 우습게 여기던 습관을 고쳐야겠다 싶어 목소리를 높여 세게 성질을 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스윽 손을 내리면서 말한다.

선생님, 우리 새똥 닦았어요. 우리 안 뛰어다녔어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일제히 손을 내리면서 그 아이 편을 든다.

아이들의 말끝에 뭔가 서러운 표정이 있다. 어떤 아이는 조막만 한 주먹을 앙쥐고 눈물을 닦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아예 입을 내밀고 날 째려본다.


응? 새똥?

빗줄기가 가늘어지길래 운동장 가는 중간에 있는 주차장에는 흙이 없으니 굳이 바깥신으로 갈아 신지 않고 노는데

마침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선생님 차에 새 똥이 많이 묻어 있는 걸 한 아이가 발견한 모양이다.

그 아이가 주변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똥을 문질러 보니 빗물에 불은 똥이 금세 떨어졌고

이를 본 아이들이 죄다 달려들어 누구는 나뭇가지로 새 똥을 닦고, 새똥 차례도 안 온 누구는 손으로 차에 묻은 먼지라도 닦았나 보다.

마침 비도 오고 선생님 차도 잘 닦이고. 재미까지 있으니 놀이가 된 모양이다. 그러다 옷 젖는 줄도 몰랐나 보다.

그것도 모르면서 선생님은 자기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야단을 치니 자기들도 억울하다는 것이다.

민망해진 나는 잠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내가 니네한테 세차해 달래? 니네 세차하러 학교 왔어? 공부하러 왔잖어.

이렇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니 아이들이 일제히 울부짖는다. 새똥차 딲아줄라 그랬다구요 진짜라구요.


나는 머쓱해져서 아니..., 그래도 니네가 옷이 젖으면 감기에 걸리니깐... 그러면 기침도 나오고 그러면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으니깐... 그러면 아프니깐...

내가 어떤 말을 주워섬겨도 아이들의 '흥!'하는 표정이 잘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선생님이 우리한테 막 소리 질르구 그래요.

난 순순히 항복을 한다. 아이구, 미안해. 선생님은 니네가 선생님 차를 딲어 줄 줄은 몰르구 니네가 옷이 젖게 장난을 치는 줄 알구...

이참에 아이들도 할 말이 많은지 계속 쏟아붓는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일들을. 아이들을 이때다 싶은가 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아이들의 많이 섭섭했었나 싶어 조금 당황한 나는 울듯 말듯 비굴한 표정으로 아이들 얘기를 꼼짝 못하고 듣는다.

지난번에 우리한테 학예회 연습 잘 하면 터닝메카드 노래 틀어준다 그러고 안 틀어 줬잖어요.

먹기 싫은 반찬 잘 먹으면 다음 날엔 먹기 싫은 거 남겨도 되기로 하구선 다음 날 또 다 먹으라 그랬잖아요.

형님들 때문에 우리가 점심 늦게 먹었단 말이에요. 우리가 밥 먹고 막 놀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점심시간 끝났다구 선생님이 들어오라 그랬잖아요.

받아쓰기는 5번까지만 한다 그래놓고선 그다음 날엔 10번까지 했잖아요.


나를 향해 쏟아 놓으면서 그래도 뭔가 풀리기는 하는지 아이들 표정이 살아나는 것 같다.

급기야는 자기들이 잘못해서 야단맞은 것까지 마구 쏟아 낸다.

지난번 코끼리 동상에 올라갔다가 늦게 들어왔는데 선생님이 막 뭐라 그랬잖아요.

그러자 한 아이가 이 말을 한 아이를 향해 나무란다. 야, 그건 니가 거기서 떨어져서 다쳤으니깐 그렇지.

그러자 그 아이도 따진다. 그래도 선생님이 나한테 막 뭐라 그랬단 말이야.

그 말에 여럿이 한목소리로 나무란다. 으이구, 니가 잘못한 걸 따지면 어떡해.

또 다른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아 나도 끼어든다. 선생님이 미안해. 선생님이 다음에 또 잘못하면 너네가 알려 줘. 그럼 잘 할게. 응?

결국 그 아이 덕분에 나에 대한 아이들의 성토가 끝난다.


  

*

담임이 어떤 횡포를 하든 상관없이 1학년 아이들은 담임을 좋아한다.

담임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교실에서는 좋아하는 척한다. 담임에게 밉보이면 교실에서 지내기 힘든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에게 그러하듯 교실에서 담임에게도 쉽게 상처받는다.

문제는 가정에서는 수시로 부모가 풀어줄 수 있는데 반해 학교에선 정해진 일정 상 그러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담임은 아이들이 담임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꾹 참고 지내는지 잘 모른다.

여러 아이들을 교실에 모아 놓고 가르치며 북새통 속 한 해를 보내다 보면

자기가 아이들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해서 상처를 줬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또 기억을 한다고 해도 그게 담임인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 아이들 바르게 가르쳐 키워보려고 그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담임의 생각일 뿐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기의 이해에 의해 자기중심적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1학년 아이들에게 옳고 그른 건 의미가 없다.

그냥 자기 성에 안 차면 불만인 것이다. 교사의 의도와 달리, 이런 것들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상처라는 이름으로 쌓인다.


아이들이 주로 상처받는 건 친구들과의 관계를 담임에 의해 재판 받을 때다.

가정에서 형제의 다툼을 부모에게 공정하게 재판 받지 못해 자기가 더 혼났다고 억울해하듯 교실에서도 그런다.

친구와의 분쟁을 선생님이 끝까지 풀어주지 않고 억지로 화해를 시킨다며 상처받고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아닌 상대 아이 편만 들어준다며 상처받는다.

하지만 교사 입장에서 모든 아이의 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주고 화해를 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의 분쟁의 원인이 대부분 과거의 해묵은 감정에 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려 울렸는데 그게 예전에 그 아이 때문에 화났던 일 때문이라면 재판이 쉽지 않다.

어느 한 쪽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거나 오히려 상대가 잘못한 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교사는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걸 타이르고 앞으로는 잘 지내라고 조정하게 마련인데

문제는 이런 조정을 당사자인 아이들이 모두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신이 아닌 교사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중심적인 아이들의 분쟁을 서로의 앙금이 안 남게 조정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은 항상 자기에게만 유리하지 않은 교사의 판정을 서서히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교사를 향한 상처를 키운다.

그렇다고 자기를 가르치는 교사에게 자신의 상처를 책임지라고 따지지도 못한다. 그냥 참으며 견딘다.

그런 점에서 '새똥차' 같은 사건은 유용하다. 새똥을 핑계로 자신이 오래 가두었던 불만을 토해내고 풀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이런 사건은 쉽게 조작해 낼 수 있다.

아이가 공들여 쌓아 놓은 블록 탑을 실수하는 척하며 쓰러뜨리고 욕을 먹어도 되고

아이가 정답으로 쓴 받아쓰기 문제를 일부러 틀렸다고 표시해주고 항의를 받아도 된다.

그러면 아이는 그걸 내게 와 따지면서 예전에 자기가 서운했던 것들도 함께 말한다. 그때 난 그 아이가 내게 받은 스트레스를 읽는다.

아이가 막 따지는 동안 아이 앞에서 약간 멍한, 그러면서도 진지한 척 미안해 해주면 된다. 아이는 곧 밝아진다.

오히려 그렇게 푼 아이는 오히려 전보다 나에게 더 친절한 아이로 바뀌기도 한다. 자기가 선생님한테 퍼부은 게 좀 미안한 것이다.

이런 일은 결국 아이뿐 아니라 교사에게도 좋은 일이다. 싸워야 키 큰다는 명제가 빛나는 순간이다.

이런 푸닥거리가 비단 1학년 교실에만 필요할까. 소통이 안 되는 모든 어른의 세계에도 필요하리.


어떤 아이는 내게 지나치게 따지는 경우도 있다. 맺힌 것이 많은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나는 아이의 말을 끊을 필요가 없다. 멍하게 계속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나서서 나를 구해 준다.

선생님에게 따질 것도 많은 아이들이지만, 한편 다른 친구가 선생님에게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면 나서서 열심히 선생님 편을 든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자기 불만을 내게 와서 말하게 되면서도 적정한 선도 만들어진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이는 그 선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싶어 한다. 주로 모범생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또한 경계해야 한다. 너무 교사 편향의 학급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 기준을 맞추기 힘든 부족한 아이들에는 또한 고역일 것이다.

결국 그 선은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하는 선이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바래다 주러 마당으로 나오니 어느덧 비는 그쳐 있다.

불과 얼마 전 까지 흥덩하던 물이 빠진 주차장에는 마치 새것처럼 말끔한 차 한 대가 서 있다.

여름 내 새똥에 덮여 있던 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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