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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Oct 16. 2015

1학년 아이, 문장을 지어내다.

1학년 아이들이 작문을 시작하는 과정




단독주택 집 안에서 주인공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다.

주인공의 손에는 텔레비전을 향해 뻗은 리모컨이 들려 있다.

검은색 집에는 굴뚝이 두 개가 있는데 굴뚝 하나에서 나온 연기는 별까지 이어져 있다. 

나머지 굴뚝의 연기는 별을 지나쳐 무한 우주공간까지 이어진다.

지붕 너머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파란색 마름모)과 반짝이지 않는 더 작은 별(파란색 별 위쪽에 있는 별)이 뒤섞여 있고 

그 위엔 특별히 크고 멋진 별 세 개와 그믐에 가까운 하현달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샤갈의 그림이 떠오른다.


아직 언어 구사가 서툰 1학년 아이들의 그림 속엔 하늘의 별들처럼 무한한 이야기가 있다.

인식의 한계가 분명한 구상의 세계를 뛰어넘은 추상적 표현이, 글로는 표현되기 어려운 아이만의 세계를 선명히 드러낸다.

1학년 아이가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저 아이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어서 저런 그림이 나온 걸까. 아이의 상상력을 나같은 사람은 짐도 못한다.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걸 옆에서 보면, 아이가 상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자기 현실을 그리는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든다.

어른인 나의 시각에서는 맥락이 안 맞고 개연성을 잃은 그림인데, 아이는 마치 진짜 자기의 세계인 양 그리기 때문이다.

상상을 하면 곧바로 현실의 삶과 맥락으로 이어지는 그림의 세계,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내가 저 아이들을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얕보거나 무시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자기가 그려내는 그림을 상상한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와, 하늘 멋지다 그러면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퉁을 준다. 우리 집 마당에서 보면 이렇다니깐요.

밤이어서 지붕이 까맣게 보이는 것, 반짝이는 별과 반짝이지 않는 별이 함께 있는 풍경은 밤새도록 조명이 난무하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와, 별이 엄청 많네? 내가 놀라면 아이는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아유, 달이 쪼그매지니깐 별이 많죠.

아이의 이 그림은 과학적으로도 맞다. 그믐달이 되면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니 별들이 더 많이 보이는 걸 아는 것이다.

1학년 아이의 관찰력이 이 정도나 된다. 이곳 아이들은 밤 풍경을 그리면서 별을 유난히 많이 그린다.



글씨를 알아가면서 아이들의 그림일기도 점차 추상의 틀을 벗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그린 난해한 추상의 세계를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구상의 세계로 연결해주기 위해서는 그 그림을 설명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1학년 아이들은 언어가 익숙지 않으니 그림 내용을 알릴 방법이 없다.

나는 아이가 그림일기를 그려오면 그 내용을 일일이 물어 아이가 보는 데서 글씨로 써 준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내가 긴 글을 쓰게 하려고 복잡한 그림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 어떻게 언어라는 포장을 덧입어 남들에게 읽히게 되는지 경험할 것이다.


아이의 그림일기를 보면 난 언제가 같은 질문을 한다. 이거 뭐 한 그림이야?

그럼 아이들은 익숙한 듯 주어와 목적어가 빠진, 그림의 내용이 함축된 말을 한다. 텔레비 본 그림이잖어요. 그것도 몰라요?

그럼 나는 또 묻는다. 언제 봤어? 어제 봤다니깐요.

누구랑 봤어? 으이구, 나 혼자 봤죠. 아빤 거실에 있었으니깐요.

뭘 봤는데? 뉴스 봤다니깐요. 보고 싶어서 텔레비 켰죠. 그런데 리모컨으로 켰죠. 리모컨이 망가졌으니깐 장에서 새로 사왔죠.


내가 아이들에게 써 주는 문장은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 즉 육하원칙이 갖춰진 문장이다.

아이가 그린 그림일기를 토대로 문장에 살을 붙여가기 위해 용언이나 부사구들을 이끌어 내는 질문을 이어간다.

그럼 아이는 나의 질문에 맞게 답을 한다. 나는 아이의 대답들을 모아 긴 문장으로 완성해 써 준다.

지금은 내가 아이의 일기를 완성해 주지만, 아이는 머잖아 스스로 문장을 완성할 것이다.

지금 상황만 봐서는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문장을 만드는 단계로 성장할까 싶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빨리 학습한다. 그리고 응용하기까지 한다. 신기하게도 그게 몇 개월 안에 다 이루어진다.

그래서 2학년이 되면 두 개의 문장을 중심 문장과 보조 문장으로 구분하는 능력까지 생긴다.


아이들로 하여금 짧은 기간 안에 작문 능력을 갖게하려면, 아이들이 문장을 어떻게 학습해 가는지를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한다.

무작정 아이의 공부를 돕겠다고 엄마가 아이를 앉혀 놓고 당장 해 보라 한다고 생기는 능력이 아니다.

문장을 가르치는 일은 더하기 빼기를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 언어교육은 고도의 노하우들이 결집되어야 한다.

셈은 제법 하는 아이들이 언변은 그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건 그래서다. 결국 모든 것이 시행착오인 셈이다.

난 내가 이런 걸 가르칠 때마다 내가 선생이라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나의 시행착오를 견뎌냈을 수많은 제자들에게 죄스럽다.


*

1학년 아이들의 언어는 아직 조사의 사용이 매끄럽지 않다.

그래서 '텔레비를 봤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그냥 목적격조사 '를'을 빼고 텔레비 봤어요. 그런다. 구어체 문장이다.

아이들에게 문어체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가르치는 것이 초등학교 국어교육과정의 큰 틀이다. 그만큼 어려운 과정이다.

어떤 아이는 이런 나의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미리 육하원칙에 맞게 문장을 써 오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이미 문장에 익숙해진 경우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줬거나 어른들과 대화를 많이 하며 자란 것이다.

문어체 문장은 줄글이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어체 문장을 익히는 셈이다.

다양한 문장뿐 아니라, 많은 어휘, 적절한 비유와 상징도 끼워 넣어 세련된 문장을 만들어 낸다.

어릴 적 책을 읽었거나 이야기를 들은 경험은 아이의 학습능력을 배가 시킨다. 유아 독서가 중요한 이유다.

책의 힘, 정확하게는 이야기에 대한 경험이 문장을 만드는 자양분이다.

책 읽는 동안 아이는 문장이 만들어지는 규칙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이 규칙을 아는 아이는 글을 쓰거나 말로 토론을 할 때 거침이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가 이런 아이를 이길 수는 없다.


반면에 책을 싫어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구어체와 문어체의 구별을 하지 않고 사용한다.

또 어떤 아이는 끝내 성인이 되도록 문어체식 문장의 작문을 못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보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어눌하거나 난삽하다.

자기가 구사할 수 있는 문장력이 약하다 보니 한 문장으로 설명이 어렵다.

그래서 중언부언 말이 많아진다. 말이 채 못 따라가니 논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가 죽는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기죽은 걸 티내기는 싫으니 우선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걸로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다.

논리가 약하니 감정의 과잉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주장이나 억울함을 논리로 풀어내지 못한다. 대신 성질 거친 아이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친구들이 금세 알아본다. 자연히 또래 집단의 중심세력에서 밀려나 부족한 아이 취급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가 그러하듯 부족한 아이들일수록 억울한 일을 많이 겪기 마련인 현실이 문제다.

이런 아이들은 교실에서 이런저런 일로 치이고 무시당하다보니 불만이 많이 쌓인다.

그 불만을 자신의 문장으로 차근차근 친구들과 대등하게 맞서지 못하게 되니 욱하는 마음에 언어 대신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때론 억울하게 야단을 맞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친구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운다.

결국 문장의 힘,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 능력은 아이의 우아한 삶을 보장하는 수단인 것이다.

말을 잘 못하는 아이, 자기 감정이나 주장을 펴지 못하는 아이는 어딜 가도 잘 하는 아이에게 치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자기도 빛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안 되는 것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게는 일, 그게 아니라면 어른들과 논리적 대화에 자주 노출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경험보다 중요하다.

아이의 문장은 아이의 삶 속에서 나온다. 세련된 문장을 위해서는 자양분을 아이의 삶 속에 넣어 주어야 한다.

다양한 독서활동, 다양한 주제에 관한 폭 넓은 대화, 여러 계층의 아젠다를 아우르는 고른 안목,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 봉사활동.

이런 것들이야 말로 아이의 문장력을 키우는 자양분이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의 글씨를 예쁘게 쓰는데 더 집중한다. 뭐든 작은 거라도 제대로 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글씨가 네모 칸을 벗어났다고, 이응(ㅇ)을 쓰면서 동그라미 모양이 일그러졌다고, 받침이나 띄어쓰기가 틀렸다고 다시 쓰라고 한다.

아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상처 받는다. 아직 손가락 힘이 모자라 바른 모양으로 글씨를 쓰는 게 잘 안 되는데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들을 강제로 하면서, 아이들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글씨를 저주한다. 그러면서 공부에서 멀어져 간다.

부모가 아이의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뭔가를 하는 대신, 글씨에 집착하는 건 그게 쉽고 효과가 빠르기 때문이다.

글씨 모양이 미워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려도 지적을 받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글씨가 힘들긴 해도

막상 글씨를 알게 되면 책도 읽을 수 있고 텔레비전 자막도 볼 수 있으니 나름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기술적인 난관으로 야단을 맞다 보니 진입장벽이 높다고 느낀다. 차라리 처음부터 글씨를 모르는 게 더 좋았겠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씨를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기도 하고 손가락이 아파서 못 쓰겠다고도 한다.

국어 교과의 목적은 글씨를 예쁘고 가지런히 쓰는데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어휘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있다.

말은 제법 유창하게 잘 하는 아이가 글쓰기를 싫어하는 경우, 거의 어김없이 그 아이가 글씨를 익히는 과정에서 겪은 상처들이 보인다.



*

나의 질문이 이어지면서 아이는 자기가 그렸던 그림일기에서 문장을 뽑아낸다.

텔레비 봤어요.

어제 텔레비 봤어요.

어제 집에서 텔레비 봤어요.

어제 집에서 나 혼자 텔레비 봤어요.

어제 집에서 나 혼자 리모컨으로 텔레비 봤어요.

어제 집에서 나 혼자 리모컨으로 텔레비를 켜서 뉴스를 봤어요.

어제 집에서 나 혼자 뉴스가 보고 싶어서 리모컨으로 텔레비를 켜서 뉴스를 봤어요.


이 문장에서 리모컨으로 텔레비를 켰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은데

아이는 계속 리모컨으로 텔레비를 켰다는 말을 한다. 아이가 리모컨을 좋아해서 일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는 전체의 과정에서 전원을 켜는 과정이 아이에겐 중요한 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또 텔레비전이라는 표준어 대신 텔레비라는 명사를 쓰는데 이건 가족의 언어 사용 습관일 것이다.

만약 이 아이에게 표준어를 쓰게 하고 불필요한 부사구를 빼게 하면 더욱 정제된 문장을 쓰는 게 될 것이다.

하지만 1학년부터 그렇게 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아이 고유의 문장력을 너무 획일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사가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가르치려 하면 아이들은 이걸 눈치채고 재빨리 교사의 의도대로 따라간다. 그래야 교사가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가 원래 지녔던 고유의 감성을 스스로 제거한다. 그 결과, 매끈하지만 뻔한 문장, 건조한 문장만 지어낸다.

이런 식으로 배운 아이에게 동시를 지어보라고 하면 힘들어한다. 주장하는 글, 설명하는 글은 잘 쓰면서도

자기의 독특한 감성이 묻어나야 하는 글은 잘 못 쓴다. 결국 어른의 문제다. 어릴수록 내용을 세밀하게 나눠서 천천히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아이의 문장에서 이 아이다운 표현은 그래서 '텔레비'와 '리모컨으로'라는 부사어다.

이런 개성을 유지하게 하면서 글을 쓰게 하는 것이 이 아이를 위한 글쓰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 만으로도 표현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

밤 하늘의 수많은 별들, 그 별들 사이를 유영하는 푸른 연기, 검은 지붕, 귀뚜라미와 나뭇잎 바스러지는 가을 소리.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가 그림에 담은 모든 것들을 유려한 글로 풀어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글씨가 밉다고, 그림이 밉다고 좌절하지 말기를. 그래서 아이의 그림에서 별과 달이 밀려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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