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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05. 2015

1학년 아이들, 자기의 삶을 글로 쓰다

1학년 아이들이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모습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키보드를 안 보고 한글을 입력할 수 있다는 걸 아주 신기하게 생각한다.

자기들은 아직 키보드를 한참 봐야 몇 글자 겨우 입력하는데 선생님은 양손을 쫙 펴서 쏜살같이 입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가끔 일부러 아이들에게 화면을 다 보게 한 다음에 아이들이 공부할 국어 교과서에 실린 지문을 빠른 속도로 입력하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와~ 그런다. 그리고 내가 입력하는 글을 큰 소리로 읽는다. 

난 가끔 일부러 오타를 내서 아이들을 웃긴다. 오타가 나기 전까진 엄청 도도하게 잘난 척을 하다가 오타가 나면 과장해서 창피한 척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막 웃는다.


나는 아이들이 나의 타자 실력을 놀라워하는 걸 이용해서 가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내가 화면에 나오도록 입력을 하는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 아이들은 일부러 나에게 뭔가 이야기를 막 불러준다.

그럴 때마다 난 마치 로봇이 된 것처럼 네, 주인님! 말씀하세용 삐리삐리, 큰 소리로 외친 다음 그 아이가 말하는 걸 입력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가 이야기를 지어서 불러주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이런 걸 이용해서 난 아이들에게 짧게나마 시를 지어보게 하고 있다.


1학년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고 하면 뭣하지만, 틈이 날 때마다 하다 보니 아이들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사실 내가 하는 건 시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속에 담고 있는 자신의 서정을 꺼내게 하는 수준이다.

아직 글씨가 서툴러 시를 글로 표현하는 게 힘들지만 시라는 게 꼭 글씨로 나타내야 시가 되는 건 아닐 테니.

시는 마음으로 쓰는 거니까, 아이들에게 시적 상상력과 언어의 감성을 느껴보게 해주고 싶다.

맞춤법이 틀리거나 접속사나 부사의 용법이 어색한 것들은 시를 쓰는데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들은 시가 뭔지도 모른 채 내가 제안하는 주제를 가지고 뭔가 글씨로 쓰기도 하고 글씨가 힘들면 나에게 와서 말로 해주기도 한다.

글씨로 쓰는 아이는 글씨 그대로 받고 말로 하는 아이는 내가 받아 적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씨로 쓰는 아이들은 점점 줄어가고 말로 불러주는 아이들은 늘어난다.

자기가 직접 쓰면 어려운 글씨도 만나게 되어 선생님한테 글씨를 물어봐야 하는데 이게 귀찮고,

선생님이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컴퓨터로 따다닥 입력하는 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서다.

아이들이 말로 시를 짓다보니 글씨로 쓰는 것보다 내용이 더 길고 풍성해지기 때문에 난 일부러 말로 하라고 꼬신다.

1학년 아이들에게 글을 쓴다는 건 내용보다는 형식에 불과한 글씨 쓰기가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시는 상상 속의 세계로 아이를 이끌기도 하고 아이의 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는 시라는 형태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고 나에게 공감을 요구하기도 한다.

난 아이의 시를 받아 적으면서 그 아이의 속마음을 공감하는 척 살짝 마음을 건드려도 주고 재미있는 표현을 하면 웃는척해 준다.





     우리 엄마


나는 1학년이다

나는 엄마 말을 잘 안 듣는다

나는 그래서 쯩쯩댄다

엄마가 파리채로 나를 막 때린다

그래도 언제나 좋다

하지만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엄마가 좋다

다음 날이면 엄마랑 사이가 좋다


이 아이는 평소 엄마가 무서운 일, 두 언니들에게 까분다고 자기만 혼나는 일을 나에게 항상 이르곤 한다.

아직 어린 마음에 그러는 거지만 아이가 이 시에서는 엄마에 대한 서운했던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는 게 보인다.

나에게 이를 땐 엄마나 언니들이 자기에게 나쁘게 대한 것들만 얘기했는데 이 날은 그래도 엄마가 좋다고 썼다.

평소 아이가 내게 하던 이야기와 다르길래 아, 너네 엄마가 만날 너 혼낸다고 해서 나쁜 엄마인 줄 알았는데 좋은 엄마구나 했더니, 아이가 그건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다. 좋은 엄마는 아니구요... 연필 줘 보세요. 그러더니 '그래도'라는 낱말 앞에 '다음날이면 사이가 좋다'는 말을 써넣는다.


선생님 앞에서 엄마에 대한 자기감정을 왜곡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다. 아직 1학년인데 이런 아이가 있다니.

사실 이 아이는 엄마에게 야단을 맞아도 엄마가 좋은데 그렇다고 아주 좋은 건 아니라는 의미를 '다음날이면' 사이가 좋다고 표현한 것이다. 훌륭한 동시다.

어떻게 키우면 아이가 엄마에게 매일 혼나면서도 스스로 치유하게 키울 수가 있을까.

올 해 통털어 이 아이의 엄마를 상담주간 행사 때 두 번 뵌 게 전부다.

늘 농사일로 바쁘신, 그러나 아이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분이었다. 굳이 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가 나무랄데가 없으니.

난 다만 어떻게 키우셨길래 아이가 이렇게 잘 크냐고, 비법을 알려주시면 다른 엄마들께도 권해보겠다고 여쭤보았다.

그저 수줍게 웃기만 하신다. 이런 엄마들은 나름의 공통점들이 있다. 주관이 강하고, 초지일관하고, 아이와 사이가 좋고.



자기의 동시가 4학년 언니들이 공부하는 교실 앞 복도에 걸린 걸 본 아이 기분이 좋은지 자기 시 앞에서 떠날 줄 모른다.

자기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써 냈을 뿐인데 자기의 글이 칭찬받는 걸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글을 지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쓴다.

시를 쓸 때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시원하다고 한다. 뭔가 마음의 정화가 되나보다. 아이는 글쓰기의 힘을 이미 아는 듯하다.

이렇게 시든 산문이든 아이로 하여금 뭔가를 스스로 꺼내게 하는 일은 아이에게 힘을 준다.

난 아이들이 쏟아낸 시들을 부모에게도 보내준다. 그리고 어떤 시는 액자에 넣어 학교 복도에  걸게 추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좋은 동시를 아이와 함께 읽어보고 외워도 보시라고 권한다.

아이들은 서로 친구의 시를 보면서 이 세상엔 자기와 비슷한 마음의 상처가 있지만 그걸 극복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 것이다.

이런 아이로 키우고 싶어서 입학 전부터 한글, 영어, 한자, 논술을 가르치고 있는데 잘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부모가 가끔 있다.

난 모르겠다. 다만, 내 아이가 자기감정을 왜곡하지 않는 능력을 갖게끔 누군가가 해 줄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

생활에서 주변의 어른들을 보고 모방하며 배우는 것이지 억지로 가르쳐서 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걸 어찌 부모가 하지 않고 남에게 맡기려 생각하는지. 아이는 또 무슨 고생일까. 아, 나와 그분의 간극이 까마득하다.


아이의 분별은 엄마에게서 올 것이다. 친정과 시댁식구들에게,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엄마는 자기 아이가 친구들에게 휘둘리는 걸 이해하지 못 한다.

휘둘림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이, 삶이란 원래 그런 줄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이의 감정과 분별을 알아채기가 힘들 것이다.

아이가 지혜롭고 야무지게 크도록 뭔가를 해 주고는 싶은데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1학년 부모들을 상대로

난 언제나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엄마의 삶을 건강하게 바로 세워 아이의 본보기 되기, 그리고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아이로 하여금 어른의 삶을 따라 배우게 하기.

야무진 아이가 되게 하려면 엄마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어서 아이가 보기에 멋져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엄마의 태도를 모방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를 눈여겨 봐뒀다가 따라하게 된다.

그런데 엄마는 이 역할을 자기 아닌 낯선 타인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익숙한 부모 대신 낯선 타인에게 배워야하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게 된다.

진화심리학 속의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존재다. 아이는 경계심 뿐 아니라, 배운다는 그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제목 :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친구가 저희 할아버지한테 술을 마시라고 해서 드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사고가 났다고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엄마한테 말했다.


어떤 할아버지 : 아이구, 어머니! 아버지가 사고 났어, 아버지가요!

엄마 : 어머나! 빨리 준비하고 빨리 병원으로 가야지!


엄마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엄마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결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 아이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할아버지가 이 아이를 아주 예뻐하셨나 보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술 드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아이는 이 얘기를 마치 며칠 전 이야기처럼 실감 나게 하곤 한다.

아직 자기 마음속 할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기에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이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직면하게 함으로써 할아버지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 주려고

난 아이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것저것 자세하게 물어봐 준다.

부인하거나 피하는 방법 대신 직면하고 인정하도록, 아이로 하여금 애도의 과정을 거쳐보게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아이가 이 글을 써 냈을 때, 난 아이로 하여금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는 그 순간을 대화하는 문장으로 써 보라고 해 보았다.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공책의 왼쪽 페이지에 추가 문장을 써넣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손녀딸을 두고 할아버지는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아이는 담임인 내가 읽을 걸 생각해서 '저희'할아버지라고 높임말을 썼다. 그걸 보니 뭉클하다.

아이는 글을 통해 나에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좀 더 자랄수록 아이는 세련된 문장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상처를 스스로 다독일 줄 알고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아이의 글에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기의 해석이나 판단이 들어있지 않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그냥 서술하는 단계일 뿐, 그 상황에 대해 자기가 어떻게 하겠다거나 어떻게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할아버지의 죽음이 아이에게 객관화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좀 더 시간이 지나 아이 스스로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의 과정이 끝나면 글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부모들이 어릴 적 일기를 쓰면서 불안한 성장기를 견딘 것처럼, 1학년 아이들도 각자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 자기의 삶을 조망하는 방법을 알아간다.



1학년 아이들의 일기장의 글씨는 잘 알아보기가 힘들다. 글씨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접속사, 용언들은 생략되거나 아예 없다.

하지만 아이의 일기 공책에 틀린 글자나 어색한 문장이 많은 건 별 문제가 안 된다. 

아이가 일기라는 표현 도구를 대하는 태도,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직해 나가는 힘이야말로 글씨 연습보다 훨씬 중요한 공부기 때문이다.

글씨는 몇 개월만에 떼면서 평생을 가도록 자기 삶을 조직해 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평소 이 아이는 생각이 깊고 자기의 주장을 조리 있게 잘 편다. 밝고 명랑하고 합리적이어서 친구들과의 관계 역시 담임인 내가 볼 때, 나무랄 데가 없다.

만약 아이의 부모나 담임이 일기를 글씨 연습으로 생각했다면, 아이는 일기를 더 쓰기 싫어질 것이다.


아이는 내가 자기의 일기를 읽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쓰자마자 내게 자랑하듯 보여준다.

그래도 난 아이에게 네 일기를 선생님이 한 번 만 읽어 봐도 되겠느냐고 물어본다.

아직 1학년인 이 아이는 자기의 일기를 담임이 보는 것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아이가 좀 더 성장해서 스스로 일기장을 관리할 수 있게 되면 저 일기의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그 달라지는 과정은 인간의 성숙 과정과 같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아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성장해 갈 것이므로.


일기는 온전히 나의 사적인 기록이라는 것, 누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일기는 지금의 온전한 내 모습이므로 쓰기 싫은 걸 감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러다 보면 아이가 글을 쓰면서, 글의 힘으로 스스로 자기를 치유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들이 글씨와 띄어쓰기, 받침을 더 먼저 살피게 되는 배경엔 지루하고 답답한 입시제도가 있다.


일기는 사적인 것이고, 아이에게도 사생활이 있으며,

그래서 당연히 아무도 허락 없이 내 일기를 보거나 검열해선 안된다는 것,

교사도 부모도 함부로 일기를 훔쳐보지 않을 거라는 내용을 아이와 부모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게 사적인 감정이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그제야 아이들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일기장에 풀어놓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일기장과 함께 아이도 성장한다.


어릴 때,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대면해 본 아이들이라야 왜곡된 자아를 만들지 않고 바르게 성장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이 일기 훔쳐 보기를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수없이 부모들에게 말하는데도

여전히 아이들은 일기를 쓰기 전에 머뭇거린다. 숨겨야 할 것과 위장을 해서라도 드러내고 싶은 내용을 골라내야 해서다.

그런 과정을 어른들은 당연하게 여긴다. 또한 아이들 또한 자긴 아직 어리니까 할 수 없다고,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성장 동력은 빼앗긴다. 아이 기르기가 이렇게 힘들다.

몇 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일기 검사를 강권하지 말라는 권고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동이 △사생활의 내용이 외부에 공개될 것을 예상하여 자유로운 사적 활동 영위를 방해받거나 

△교사의 검사를 염두에 두고 일기를 작성하게 됨으로써 아동의 양심 형성에 교사 등이 실질적으로 관여하게 될 우려가 크며 

△아동 스스로도 자신의 느낌이나 판단 등 내면의 내용이 검사,평가 될 것이라는 불안을 제거하기 어려워 솔직한 서술을 사전에 억제하게 될 수 있기 때문.


아직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아이들은 일기를 쓴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이런 식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엄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힘이 길러지고 짓기 능력이 향상된다는 아이들의 입장과 아이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창구가 된다는 부모의 이해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의 부모 또한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쓴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좋은 기억보다는 싫은 기억으로 간직한 어른들이 더 많은데

그들은 왜 자기 아이들에게 무조건 일기를 쓰라고 하는지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초등학교 때 일기를 그렇게 열심히 쓴 어른들의 왜 어른이 되어서는 글쓰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지 아이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럴 때 누가 판단해줘야 하는가.



*

어릴 때, 나는 일기를 정말 열심히 썼다. 매일 아침,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우리들이 쓴 일기장이 뒤집힌 채 쌓이곤 했다.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손바닥을 맞았다. 맞는 것이 너무 무서웠던 나는 기를 쓰고 일기를 썼다. 일기를 빠지지 않고 쓰면 학기말에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안 쓰면 매를 맞고 잘 쓰면 상을 받던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일기 쓰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잘 쓰면 상을 받는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맞는 것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도대체 선생님은 그 많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왜 궁금해하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기 내용을 숨길 생각을 감히 하지 못 했다. 숨겨도 다 아실 것만 같았다.


날짜와 날씨를 적고 나면 그날 있었던 일을 쓰고, 오늘의 반성과 내일의 할 일을 쓰는 칸이 있었다.

반성할 일은 늘 차고 넘쳤으나 내일 할 일은 늘 한 가지였다. 꼴 베기, 소 풀 뜯기기.

시골 아이인 내가 도시에서 오신 선생님께 나의 하루 일과를 알려드리는 건 당연하지 싶었다.

문제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일기에 어떻게 기록할지를 미리 생각하며 그대로 행동했을만큼 난 미련한 아이라는 점이었다.


어린 나의 삶은 표리가 부동한, 부조리한 삶의 연속이었다.

엄마에겐 착한 척을 하지만 동생들에겐 야비한 오빠였고

힘 센 친구에겐 너무도 물렁한 상대였지만 나보다 약한 친구들에겐 가증스러운 또래였다.

문제는 그런 위선과 다중인격의 내 삶을 다 일기에 쓴 다면 선생님은 나를 아주 못된 아이로 생각하실 수 있겠다는 염려였다.

난 적당히 일기에 쓸 것과 숨길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을 은폐하고 매일 같은 일만 단조롭게 썼다.\

그러면서도 그게 선생님을 속이는 일인 건 또 알아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친구들과 비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걸 일기에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왜 나는 나의 모든 삶을 일기에 고스란히 일러바쳐야 하나 하는 생각이 어쩌다 들었지만, 난 우선 충실히 일기를 썼다. 그런 거라도 안 쓰면 일기에 쓸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기는 너무 짧으면 안 되었다. 짧으면 손바닥 맞을 일이 두려웠다. 체벌은 쉽게 사람의 판단을 바꾼다. 나는 맞는 일이 무서웠고 당연히, 매일 일기에 무엇을 쓸까가 항상 고민했다.

어린 내 눈에, 내 삶은 부조리하면서도 또 한편, 너무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가면 소 꼴을 베다 놓고 소를 끌고 동네 산에 올라 풀을 뜯기는 일의 반복이었다.

손님이 오지도 않으며 매일매일 다른 걸 하며 놀지도 않는 내가 어떻게 매일 일기를 쓸지 난감했다. 하지만 5줄을 넘지 않으면 손바닥을 맞아야 하므로 무엇이든 써야 했다.

일기장을 앞에 두고 앉아 연필심에 침을 아무리 오리 바르며 생각을 해도 쓸게 없어서 오줌을 마당가에서 몇 번, 요강에 몇 번 눴는지를 쓴 기억도 난다. 괴로운 일이었다.

아무튼 나의 일기장에는 나의 사소한 삶들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점점 일기장이 여러 권으로 쌓이면서 난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한참 지나고 읽어보는 내 일기가 제법 재미있었다는 점.

난 가끔 벽장에 숨겨 놓은 묵은 일기장을 꺼내 구석에서 혼자 읽곤 했다. 

그 속엔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개가 쥐약을 먹고 죽어서 어머니가 분유를 사다 먹여 기르던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강아지가 먹던 분유가 너무 먹고 싶어서 몰래 몇 숟가락 훔쳐 먹던 이야기, 그 뒤로 강아지들이 앓을 때마다 내 잘못인 것 같아 죄책감에 떨던 이야기,

교회 가서 강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이야기처럼, 아무렇지도 않던 나의 일상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떤 책들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걸 안 것이다.


손바닥을 맞지 않기 위해 시작된 나의 처절한 일기가 어느덧 내 삶을 갈무리하는 방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안 건 

강제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한참 지나서였지만 오늘 쓰는 일기를 언젠가는 내가 다시 읽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기를 쓸 때 한번 더 생각하고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겪는 미움과 두려움 같은 감정을 좀 더 순화시켜 적게 되었고

그게 결국 유치하거나 가벼운 생각보다는 좀 더 무게 있는 삶의 질문들로 이어지면서 내 생각도 함께 자랐지 싶다.

누가 그전에 이런 걸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 나의 일기는 훨씬 더 일찍 진화하기 시작했을 텐데

왜 그때 난 손바닥 맞을 두려움에 끌려다니며 일기를 써야만 했을까.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이 강제로 일기를 쓴다고 생각할까 봐 난 일기를 숙제로 내는 대신학교에서 쓰게 한다.

그리고 아이의 일기를 볼 땐 형식적으로라도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단지 나어릴 적처럼 매를 맞지 않을 뿐, 내가 모르는 두려움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걸 잘 알아내고 그 두려움을 없애주는 일이 일이 공부를 가르치는 일보다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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