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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2. 2015

라바를 위하여

1학년 아이들이 논쟁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

                                                                                                                                                                                                                                              


1학년 아이들은 자연다큐를 아주 좋아한다.

난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여준다.


파리가 어떤 식물의 잎에 앉는다.

잠시 후 그 식물의 그곳이 닫혀 파리가 잡힌다.

파리가 갇히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헐. 파리 디져따.

그러자 한 아이가 재빨리 그 아이를 내게 이른다. 야, 너 왜 디져따구그래. 선생님, 쟤 나쁜 말 써요.

아이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다. 야, 그게 무슨 나쁜 말이냐. 우리 할머니도 디져따라구 잘 그러는데.

그 아이도 지지 않는다. 디져따라그러면 안 되고 돌아가셨다 그래야지. 니네 할머니도 몰르구 그러는 거야.

보다 못한 다른 끼어든다. 야, 무슨 파리가 할아부지냐. 돌아가셨다 그러게? 죽었다라면 몰라두. 

대벌레가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있다.

잠시 후 카멜레온이 등장해서 긴 혀로 대벌레를 날름  잡아먹는다.

그 장면에서 아이들은 또 탄성을 지른다. 헐. 카멜레온 혀 개 길다. 쩔어.

아까 그 아이가 또 나무란다. 야, 너 왜 개 길다 그래. 그건 니네는 쓰면 안 돼.

뭐가? 우리 누나도 개 길다 그러는데 왜 안 돼?

그건 니네 누나가 규칙을 어기니깐 그렇지. 니네 누나는 4학년이면서 그런 말을 쓰면 어떡해.

너 우리 누나한테 다 말할 거야.

바다에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들을 쫓고 있다.

위기에 몰린 작은 물고기들은 급기야 물 밖으로 지느러미를 펴고 날기 시작한다.

그 장면을 본 한 아이가 외친다. 헐. 날치다. 완전 개 빨라. 쩐다.

그 말에 다른 아이도 외친다. 저 큰 물고기는 청새치야. 저것도 개 빨라.

그러자 다른 아이가 퉁을 준다. 저게 뭐 청새치냐. 돌고래지.

또 다른 아이도 끼어든다. 아냐, 범고래야. 돌고래보다 범고래가 더 쎄.

아까 청새치를 말한 아이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라바에서 봤는데 날치가 엄청 멀리 날아.

아이들이 일제히 그 아이를 본다. 라바? 헐. 아직도 라바라니. 쩐다. 넌 애기냐. 라바를 보게.

순간 당황한 아이가 바로 변명을 한다. 아, 아니, 내가 애기 때 봤다니깐. 지금 본 게 아니고.

동영상 보느라 아이들의 대화를 못 들은 다른 아이도 라바라는 말에 반응을 한다. 헐. 개 쩐다. 1학년이 라바를 보다니.

한 아이가 그 아이 편을 든다. 라바는 애기때만 보는 게 아니고 아무 때나 봐도 돼. 그쵸, 선생님?

난 멍한 표정으로 슬쩍 논쟁에서 비껴 난다. 라바가 뭔데?

그러자 한 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내뱉는다. 헐. 선생님은 라바도 안 봤어요? 야, 선생님은 라바도 모른대. 헐. 쩐다.

아니 뭐... 난 테레비가 없으니깐... 라바가 나오는 줄도 몰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내를 제쳐놓고 다시 자기들끼리 떠든다.

순식간에 한 아이는 아직도 라바를 보는 애기로, 그 아이 편을 들어주려던 나는 라바도 모르는 바보로 결론 나고 만다.

그 사이에 아이들의 대화 소재는 벌써 자연다큐에서 라바를 보기에 적당한 연령은 몇 살인가로 바뀌어 버린다.


아이들의 대화는 이렇게 정신이 없지만, 그 안에는 치열한 개개인의 논리가 켜켜이 살아 있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떠든다. 잠시도 조용히 있지 않는다.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다. 

아이들은 그러면서 타인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능력을 기른다. 그 능력은 자라서 논리를 만들어 낸다.

그 논리는 금세 반대 논리를 만나 힘겨루기를 하고, 그렇게 어느 하나가 깨지면 그 아이는 또 다른 논리를 만들어 덤빈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키 큰다는 격언은 이런 과정을 긍정적으로 보는 예가 아닐까.


아이들이 서로 알고 있고 있는 내용이 다르면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게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논쟁을 하려면 사실만을 가지고 대화해야 하는데 아직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논쟁을 감정싸움처럼 한다.

어느 사실을 두고 친구와 겨루던 아이들은 자기들이 불리할 것 같으면 나에게 와서 이른다.

선생님, 쟤  거짓말해요. 쟤가 나보고 틀렸다고 무시해요. 쟤가 지 혼자 자꾸 우기고 소리 질러요.

아이들이 좀 더 자라 고학년이 되면 논점이  다원화되기도 하고 아예 모든 논점을 무시하는 양비론이나 그 반대인 양시론을 차용해서 토론하기도 하지만, 

1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두 개의 주장을 중심으로만 대부분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맞다, 틀리다의 두 편으로 나뉘어 말싸움을 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두 편의 주장을 각각 대표하는 아이가 나오게 마련이다. 아이들이 인정하는 똑똑한 아이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편이 갈려 각자의 논리를 보태며 대표 아이를 편든다.

다만 의견이 서로 교차하지 못하고 동시에 막 퍼붓는 형태다 보니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럴 때, 아이들은  나더러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서 자기들끼리 논쟁하던 주제의 사실 여부를 알아내라고 요구한다.

난 그럴 때마다 아이고, 선생님이 지금 엄청 바쁜데 니네가 집에 가서 찾아보고 내일 서로에게 알려주면 되잖어하며 다음으로 떠넘긴다.

내가 모른 척 하면 아이들 바로 다른 학년 형님들에게 달려가 물어보기도 하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다음 날 알아오기도 한다.

내가 아이들의 논쟁에 끼어들어 너무 쉽게 결판이 나 버리면 아이들은 논쟁의 힘을 잃을 것이다.

교실이 아수라장이 되든, 그 소음으로 내가 귀머거리가 되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고 치열하게 겨뤄야 자랄 것이다.


그래도 고학년들에 비하면 1학년 아이들의 논쟁은 오래가지 않는다.

논쟁과 감정싸움이 구분되지 않다 보니 서로 감정이 상해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논쟁에서 이기려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반박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압도하는 논리가 나와줘야 한다.

아직 이게 잘 안 되는 1학년 아이들은 이 때 주로 인신공격을 한다.

상대가 무슨 의견을 내면 이 쪽 편 아이가, 니 까짓 게 글씨도 잘 모르는 게 그걸 어떻게 아냐? 고 빈정거린다.

그러면 무시를 당한 상대 아이는 그러는 너는 시간도 못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받아치다 보니 마음이 상한다.

결국 마음이 상한 아이들은 나에게 몰려와 울면서 서로를 일러바친다. 1학년 아이들의 논쟁은 대부분 그렇게 끝난다.

난 가능하면 이 상황을 좀 오래 끌어봄으로써 아이들이 좀 더 긴 논쟁을 해 보도록 유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우세를 유지하면서 논쟁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가정에서 형제나 사촌, 부모와 평소 자주 대화를 하는 아이들이다.

이들 중 어떤 아이는 벌써 상대의 대화 패턴을 읽어내기도 한다.

자기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를 미리 예측해내고 일부러 유도신문을 만들어 내는 수준에 도달한 아이도 있다.

형제가 있어서 일상 속에서 논쟁의 경험이 많은 아이다.

이 점에서 형제가 없는 아이들은 불리하다. 형제가 없는 아이들은 이럴 때 엄마를 상대로 논쟁을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걸 다 알고 져 주는 싸움을 하는 엄마와,  인정사정없이 공격하는 형제와의 논쟁 연습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형제가 없는 외동이 들은 그래서 어떻게든 친구들과 어울리고 겨루고 말싸움을 하게 할 필요가 있다.


논쟁을 열심히, 그리고 잘 하는 아이들은  논쟁뿐 아니라, 다른 일에도 적극적인 아이가 된다.

그 원천엔 승부욕이 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아이들은 상대를 이기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자기  주장뿐 아니라, 그걸 뒷받침하는 근거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책을 열심히 읽고 뭔가 지식이 될만한 것들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다.

그 상태에서 싸움닭처럼 모든 시시비비에 참견하고 끼어든다.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어야 논리력을 갖춘 아이로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가 공부를 하는 줄도 모르고 공부를 하는 셈이다.


관찰해보면, 교실에서 그런 아이들은 주로 친구들에게 논쟁거리를 먼저 제공한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가 대화에 주저하지 않는 자신감 때문이다.

자기가 제공한 논리로 논쟁을 하다 보니 이길 만한 주제를 제공하게 되고, 그렇다 보니 논리 싸움에서도 유리한 것이다.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고 나니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게 흥분도 덜 한다.

그 아이는 매일 새로운 걸 알아다 친구들에게 말해준다.

문어와 오징어의 다리 수가 같은지 다른지, 거북선은 어느 장군이 만들었는지를 이 아이는 친구들에게 재미 삼아 알려준다.

자연스럽게 교실의 이야기꾼이 된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지식의 내용이 많을 뿐 아니라 그 책에 나오는 수준 높은 어휘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친구들이 서로 맞다 틀리다를 놓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그 아이는 그럼 우리 차례대로 자기 생각을 말해보고 투표를 하자고 근사한 제안을 한다.

그 아이의 세련되고 매끄러운 말솜씨가 다른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다. 뭔가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처럼 우러러보기까지 한다.

내 생각엔 그 아이의 내용이 맞고 틀리고 보다 그 아이가 사용하는 어휘의 품격과 논쟁하는 모습에서 오는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것 같다.

책 읽는 아이는 그래서 교실의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가 빛난다. 그리고 또래들에게 '똑똑한 친구'로 인식된다. 자연히 교실 분위기를 이끄는 아이가 된다.

 

논쟁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더 발전하는 대신 답보상태의 말싸움으로 와해될 즈음, 난 슬며시 화면을  정지시킨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떠들어서 선생님이 화 났기 때문에 동영상을 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논쟁을 시작한 두 아이를 성토하기 시작한다. 야, 니네가 떠들어서 선생님이 동영상 껐잖아.  책임져.

그러면 방금 전까지 논쟁을 이끌던 아이는 잠시 주춤한다.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조용해지면 다시 동영상을 튼다.

잠시 후, 주춤한 아이들 말고 다른 아이가 또다시 동영상에 대해 자기가 아는 걸 먼저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새로운 판을 주제로 한 논쟁인 것이다.


가끔 논쟁이 너무 크게 벌어져 아이들의 감정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 논쟁이 익숙하지 않은 1학년 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이런 경우, 나는 슬쩍 끼어들어 분위기를 바꾼다.

끼어 들 때는 특정한 아이 편을 들지 않는 대신 전혀 다른, 그러나 엉뚱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낸다.

저 동영상에서 막 날아가는 물고기, 저게 날치라고? 선생님 보기엔 미꾸라지네. 저런 건 추어탕을 끓여 먹어야 되는데. 추릅.

그러면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뜨악한 표정을 하며 야만인 보든 한다. 선생님은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으이구.

아이들의 그 말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아이들은 내 말이 왜 말이  안 되는지를 내게 알려주기 위해

미꾸라지가 왜 바다에 살지 않는지에 대한 또 논쟁을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방금 전 까지 떠들던 말싸움은 한풀 가라앉는다.

1학년 아이들이 이런 논쟁을 끝없이 할 수 있는 까닭은 아직 누구도 아직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토론의 끝은 지식의 완결성에 있는데 1학년 아이들 누구도 답을 모르고 있으니 끝없이 논쟁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난 이 점이 1학년 아이들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의심과 회의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의심할 수 있는 천진함과 상대의 의심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반복적으로 체험되어야 호기심이 만들어지고 논쟁을 통해 세상을 자기가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걸 배운다.


이런 논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다른 친구들이 모여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이 아이들은 주로  한쪽 구석에서 딴짓을 하거나 논쟁하는 아이들을 구경만 한다.

교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체가 논쟁으로 떠들썩한데 모르는 척 하는 아이들이다. 여자 아이들이 더 많다.

이 아이들은 평소에도 자기 주장을 거의 내세우지 않는다. 친구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편을 들기도 한다.

내가 일부러 그 아이가 잘 알만한 주제를 슬쩍 언급하며 그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줘도 그 아이는 생각만큼 적극적이지 않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걸 걱정한다.

자기 아이가 집에서는 말도 잘하고 책도 꽤 읽는데 왜 학교에서는 소극적인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기 아이도 논쟁에 끼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담임 입장에서도 이런 요구를 들어드리는 일은 고역이다. 아이가 나서기 싫어하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이목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논리가 상대의 공격을 받아 무참히 깨지는 것을 감당하기가 힘들 수도 있고,

친구들과 맞설 만큼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이가 타고난 성격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1학년 땐 그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논리는 드러내되, 깨질 필요는 없는 상황, 즉 말로 싸우는 토론이 아니라 글로 쓰는 논술에서는 자기 역량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가 꾸준히  준비하고 있으면, 아이가 스스로 지닌 가능성의 빛은 언젠가 그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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