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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7. 2015

1학년 아이, 시계를 볼 줄 알게 되는 과정

1학년 아이들이 시계의 낯설음을 극복하는 과정

                                                                                                                                                                                                                                                                          



아이들에게 장난감 시계를 하나씩 나눠 준다.

뒷면의 손잡이를 돌리면 따르륵 소리가 나면서 바늘이 돌아가는 시계다.

나는 시계를 나눠주면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라고, 잠시 후에 발표해보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긴 바늘과 짧은 바늘이 있어요.

숫자가 1부터 12까지 있는데 12는 맨 위에 있고 6은 맨 아래에 있어요.

숫자와 숫자 사이는 5개의 촘촘하게 생긴 선으로 구분되어 있어요.

길고 짧은 바늘은 각각 어떤 숫자를 가리키는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아이들의 발표를 미소로 칭찬하며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이다.

짧은 바늘은 시를 가리키고 긴 바늘은 분을 가리킨단다.

숫자는 5분의 간격을 지니고 있으며 12까지 긴 바늘이 한 바퀴 도는 동안을 한 시간이라고 한단다.

교사가 되기 전에, 난 이렇게 배웠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시계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럼 실제 교실의 실상은 어떨까.


아이들에게 장난감 시계를 하나씩 나눠 준다.

뒷면의 손잡이를 돌리면 따르륵 소리가 나면서 바늘이 돌아가는 시계다.

나는 시계를 나눠주면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라고, 잠시 후에 발표해보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나에게 시계를 받자마자 뒷면의 손잡이를 좌우로 빠르게 돌려서 따륵따륵 소리를 낸다.

교실은 따륵따륵 시계 소리로 가득 찬다. 아이들은 서로 큰 소리를 내려고 경쟁적으로 돌린다.

나는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 내지 말고 먼저 자세히 보라고 말한다. 순한 아이 몇은 내 말을 듣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난 좀 더 크게 그만!이라고 외친다.

아이들은 내 말에 잠시 멈칫한다. 하지만 또다시 따륵따륵 시계를 돌린다.

난 특히 큰 소리를 내는 몇 아이를 향해 그만하라고 주의를 준다.

하지만 따륵따륵 하는 소리에 내 말은 금세 묻힌다.

여기서 내가  책상을 꽝 내리치거나 '말 안 들으면 혼난다!'라고 소리를 크게 지르면 아이들의 장난은 간단히 끝나고 바로 수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갑자기 무서워진 선생님을 보고 장난칠 생각을 쉬 포기하고 공부로 돌아오고 학습목표는 쉽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집에 가서 우리 선생님이 나한테 소리 지르고 책상도 꽝 쳤어라고 말할 것이 두려워서다.

폭력 교사로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선생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다.

난 소리를 내는 아이들에게 나눠 준 시계를 다시 다 뺏어 모은 다음, 따륵따륵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일일이 받은 다음에야 다시 나눠준다.

어떤 아이는 내가 다시 줄 걸 알고 미리 내게 시계를 던지기도 한다.

그 아이는 다시 시계를 받고 나서 여전히 따륵따륵 소리를 낸다.

난 그 아이의 시계를 뺏을까, 생각하다가 조금이라도 수업 시간을 벌기 위해 참는다.


시계를 다 나눠주고 돌아서는데 어떤 아이가 나눠준 시계를 반으로 쪼갠다.

쪼갤 때 힘을 너무 줘서 시곗바늘이 교실 바닥에 흩어진다.

내가 그 아이를 쳐다보자 히죽 웃으며 말한다. 전 잘못 없어요. 따륵따륵 소리 안 냈잖아요. 선생님이 쪼개지 말란  말도 안 했잖아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보며 깔깔 웃는다.

난 그 아이를 째려보며 빨리 주우라고 목소리에 힘을 준다.

아이는 내 표정에 겁을 먹었는지 흩어진 부품들을 주우러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아이가 내게 소리 지른다. 선생님 바늘 하나가 없어요. 선생님이 빨리 찾아줘요. 빨랑요.

그 말에 나머지 아이들도 자기가 찾아 주겠다고 다들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간다. 이렇게 수업시간이 흘러간다.


시계를 쪼갠 아이는 일부러 나의 수업을 지연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다른 공부시간에도 비슷한 장난을 치곤한다. 교실엔 이런 아이가 늘 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종아리를, 또는 손바닥을 한 대 때리거나, 적어도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인다면 이 아이는 수업시간에 이렇게까지 방해를 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이가 집에 가서 우리 선생님이 날 때렸어라고 말할 것이 두려워서다.

아이가 교사에게 맞았다는 말을 듣고 아이구, 니가 또 무슨 장난을 했길래 선생님이 화가 나셨다냐라며 오히려 아이를 나무라던 부모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아이가 교사에게 혼나고 왔을 때, 너는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는 부모가 많지 않다.

교사가 학생을 혼내다니, 그런 정신 나간 교사는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자기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못하면, 요즘 선생들은 도대체 수업을 어떻게 하길래 애들 실력이 갈수록 떨어지냐고 학교를 비판한다.

난 그 아이에게 다른 시계를 하나 준다. 그리고 흩어진 시계 부품은 이따 쉬는 시간에 찾아보자고 말하고 수업을 시작한다.

그 아이는 시계를 새로 받았지만 수업에 집중을 하지는 않고 바늘을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결국 난 다른 아이들을 상대로 수업을 한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난 그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오후에 남겨서 수학 공부를 보충해도 되겠느냐고 카톡을 보낸다.

잠시 후, 죄송한데 아이에게 오후 일정이 있으니 그냥 보내주시라는 답장이 온다.

난 쉬는 시간에 아이를 불러 시계 읽는 방법을 가르친다.

쉬는 시간에 놀지 못하고 내게 불려 온 그 아이는 얼굴에 노여움이 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하지 않고 연신 노는 아이들을 쳐다본다.

쉬는 시간이 3분 정도 남았을 때, 난 아이를 놓아준다.

그렇지 않으면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는 원망을 들을까 두려워서다.

아이도 이걸 안다. 그래서 적당히 내 앞에서의 시간을 버틴다.

그런 아이를 가르쳐야 먹고사는 나와, 그렇게라도 배워야 살 수 있는 아이의 신세가 비슷하다.

나 혼자 30여 명 가까운 1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의 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는, 요즘 나의 1학년 교실은 사뭇 다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들이 수학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형님들처럼 우리도 수학 골든벨을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도시의 1학년이 아이들도 수학을 쉽게 생각하긴 하지만 이 아이들만큼 좋아하진 않는다.

비슷한 유형의 숫자만 바꾼 문제를 끝도 없이 풀어야 하는 문제집 때문에, 그리고 또 학원에 가서 2학년 때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수학이 싫다고 하는 도시 아이들과는 다른 반응이다.


1학년 수학엔 10이 넘지 않는 수의 덧셈과 뺄셈, 크기 비교를 위주로 하는 연산과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의 도형 입문이 나온다.

이런 것들은 보통 유치원에서 수 세기나 도형 기초학습이 이뤄진데다 아이들이 평소 생활에서 흔히 접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해낸다.

공부에 관한 한, 1학년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건 한글 읽고 쓰기, 1부터 100까지 안 보고 세기, 받아 올림 계산하기, 시계 읽기 정도다.

주로 국어, 수학 교과와 관련이 있다. 다른 교과들은 아이들의 실생활에서 이미 체득된 것들을 자료로 공부하기 때문에 쉬운 편이다.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은 가장 어려운 공부인 시계 읽기를 배우고 있다.

1학년 수학 교과서에는 정각 읽기와 30분 읽기 두 가지가 나온다.

긴 바늘이 12에 가 있으면 정각, 6자에 가 있으면 30분이다.

긴 바늘은 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짧은 바늘이 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런 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다.

긴 바늘이 12에 가 있고 짧은 바늘도 12에 가 있으면 아이들은 12시라고 읽는다.

하지만 긴 바늘이 여전히 12에 있고 작은 바늘이 3에 가 있으면 아이들은 12시 3분이라고 읽는다.

긴 바늘을 먼저 인식한다. 바늘이 기니까.

시를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긴 바늘이 맡아야지, 왜 짧은 바늘이 맡느냐고 아이들은 내게 따진다.

아이들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긴 바늘이 12에 있고 짧은 바늘이 3에 있는데 이걸 12시 3분이라고 읽는 것과 3시라고 읽어야 하는 것. 어느 게 더 쉬울까.

당연히 아이들의 생각처럼 12시 3분이라고 읽는 게 쉽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가르쳐야 하니 문제다.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나는 12부터 시작해서 긴 바늘이 한 바퀴 돌면 한 시간이 올라가는데 이걸 작은 바늘이 가르쳐 주는 거라고 말해준다.

아이들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벌떡 일어선다. 헐. 긴 바늘이 돌아요? 쩐다. 왜 짧은 바늘은 한 칸만 가는데요? 많이 가면 되잖아요.

한 아이가 공부하기 싫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묻는다. 그데 왜 긴 바늘이 숫자 1부터 가야지 왜 12부터 가요?

그러자 옆 아이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지적을 한다. 야, 12가 맨 꼭대기에 있잖아. 거기부터 가야지 넌 그것도 몰르냐.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다른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이런 시계는 누가 만들었어요? 차라리 핸드폰 시계를 만들지. 그럼 바로 읽잖아요.


인간이 12진법에 기초해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고 일 년을 12달로 구분해냄으로써 비로소 시간이라는 추상적 공간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미래와 과거라는 시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철학적 배경, 시간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간결하게 통일해준 도량형의 위대함을 저 1학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난 나대로 아이들의 질문에 쩔쩔맨다. 내가 질문에 헤매는 만큼 저 아이들에게도 시계는 어려운 공부일 것이다.


결국 난 긴 바늘을 12에 고정해 놓고 짧은 바늘만을 움직이며 시간을 따라 읽게 한다.

그냥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자 아이들은 금세 시간을 읽는다.

난 또 긴 바늘을 6에 고정해 놓고 짧은 바늘을 숫자와 숫자 가운데 놓고 몇 시 30분을 따라 읽게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따라 일제히 시계를 읽는데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박자 앞서, 그리고 더 큰 목소리로 읽는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더 빨리, 큰 목소리를 낸다.

참다못한 한 아이가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 야, 너 왜 잘난 척해. 선생님, 얘 하지 말라 그러라구요.

그러자 나머지 아이들도 그 아이의 편을 들어 크게 읽는 아이를 나무란다.

이번엔 친구들의 공격을 받은 아이가 내게 억울해한다. 쟤네들은 지네가 몰르는 거면서 저더러 하지 말라 그러잖아요.

아이들의 다툼에 공부가 또 중단된다.


그 아이는 벌써 시계 읽는 방법을 먼저 공부 한 아이다. 그 과정이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힘들게 배운 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친구들의 공격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기죽을까 봐, 수업을 못 따라갈까 봐 선행학습을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이런 상황을 만든다.

아이가 선행학습은 했지만, 자기가 미리 배워 알고 있는 걸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참는 겸손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친구들에게 배척을 받고 잘난척하는 아이라는 오명을 얻는다.

선행학습을 하기 보다 차라리 그날 공부한 걸 다시 복습하는 후행학습을 했더라면, 저 아이의 어린 시절이 저리 부대끼진 않을 텐데.


난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모든 원리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선생으로 되고 싶지만 한번도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시계 읽는 법, 길이, 무게, 부피 등의 모든 단위들, 물리와 화학의 법칙들, 수에 근거한 공식을 이해하는 법.

아이들은 끝없이 묻는다. 그런 법칙은 도대체 왜, 누가 만들어 냈느냐고. 그래서 자기를 머리 아프게 하느냐고.

왜 배워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억지로 떠밀려 배우 된 아이들의 당연한 투정이다.

오로지 생존에 필요 사냥감에 대한 정보 외에는 특별한 지식이 필요 없던 원시의 시대가 너무 길었던 때문일까, 아이들은 배우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든 피해 가려고 한다. 공부가 싫어서 배가 아프다고 우기고, 일부러 연필을 떨어뜨리고 책을 감춘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또 이와 반대여서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부족이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그 사회를 유지 번성시킬 시민이 필요하게 되었을 테고, 그래서 학교는 생겨났을 것이다.

그 학교에서 가장 악역은 가르친다는 당위성을 무기로 아이들에게 군림해야 하는 교사다.

인간이 인간을 가르칠 권리는 누가 주었는가, 인간이 인간을 가르쳐 교화 시키는 게 가능한가, 인간은 과연 배우면 변하는 존재인가 하는 실존의 물음 앞에서 난 항상 고개를 저으면서도 나는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이럴 때, 아이들이 바라보는 교사는 얼마나 미운 역할일까.

아무리 잘 봐 주려 해도 잘 봐주고 싶지 않은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내일 또 봐요. 히히. 하며 웃는 아이들이야말로, 신의 대리인이 아닐지.

미안하고 또 고마워 이왕이면 아이들에게 덜 미운 선생이 되고 싶다.


나는 바구니에 시계와 피구공을 담아 들고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퀴즈를 낸다. 긴 바늘은 6에 있고 작은 바늘은 2와 3 가운데 있으면 왜 2시 6분이라고 읽지 않고 2시 30분이라고 하냐고. 이 퀴즈를 맞히면 다 같이 피구를 할 거라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2시 6분이라 그래야 되는데 왜 자꾸 선생님은 2시 30분이라 그래요. 존나 짜증 나게.

아이의 기세에 눌린 나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러게. 선생님도 2시 6분이라 그러면 좋겠는데 수학 책에는 2시 30분이라 그러니깐...

내가 약하게 나가자 그 아이가 쐐기를 박듯 말한다. 그러니깐 수학 책을 만든 사람이 잘 못 만들어서 그렇단 말이에요. 으이구.

아이들은 그 아이의 대답을 정답으로 하기로 했는지 벌써 피구공 있는 곳으로 몰려간다.

나도 고집스럽게 버틴다. 미안하지만 돼. 수학 책을 잘 못 만들 수는 있어도 2시 30분이라고 읽는 건 틀린 게 아니거든.

내 말에 아이들이 짜증을 낸다. 한 아이는 당장 피구를 못 하는 게 억울한 지 울상이다. 아이들이 생떼를 쓰든 말든 난 버틴다.


내가 이렇게 세게 나가자 아이들은 잠시 소강상태가 된다.

어떤 아이는  시계에 답이 있을까 하고 뚫어져라 시계만 들여다보고, 어떤 아이는 벌써 피구공 옆에 가 있고, 아예 처음부터 내 주변에서 그냥 조르는 아이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모르는 척 버틴다.

잠시 후, 시계를 들여다보던 아이가 긴가민가 한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가서 말한다.  6의 반이 3이잖아. 3에다가 0을 붙이면 30분이잖아.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내게 이끌고 몰려온다.

아이의 논리는 정확하게 맞다. 하지만 교과서에 이렇게 나오지는 않는다. 아이가 혼자 생각해낸 것이다.

하지만 난 바로 인정하지 않고 삐딱한 시비를 걸어 본다. 야, 그럼 긴 바늘이 6에 있을 때 30분이면, 4에 있으면 4의 반은 2니까... 2에 0을 붙여서 20분이라고?

순간 아이들이 당황한다. 아이들은 아직 20분은 배우지 않아서 그게 맞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호기롭게 나갔을까. 아이들은 다시 뒤숭숭한 분위기가 되는데 그때 한 아이가 아까 그 잘난척하던 아이를 부르더니 긴 바늘이 4에 있으면 20분이냐고 묻는다. 그 아이가 맞는다고 하자 아이들이 환호를 한다. 그리고 선생님, 우리가 퀴즈 맞혔죠? 하더니 피구공을 향해 뛰어간다.

하지만 잘난 척하던 아이는 함께 뛰어가지 않는다. 아이들 쪽을 쳐다보기만 한다. 같이 놀고 싶은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저 아이도 껴서 같이 하라고 말해주려다 멈칫한다. 자기의 잘난척하는 행동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저 아이도 배워야 할 것이다.

어차피 그 아이가 없으면 피구 짝이 안 맞으니 곧 부를 것이다.

잠시 후, 과연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한 듯 같이 가서 피구를 한다.

누구는 시계 읽는 방법을, 또 누구는 겸손을 배운 수학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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