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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03. 2015

1학년 아이들도 가난을 안다

1학년 아이가 자신의 불리함을 극복할 오기를 배워 가는 과정


아침. 1학년 교실.

그림일기를 그리던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내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 내 크레파스 봤어요? 살구색 크레파스요. 아, 그거 찾아야 되는데... 지붕을 파랗게 칠하고 나서 사람을 칠하려고 보니 살구색이 안 보였나 보다. 아이의 표정이 하도 절박해 보이니 나도 엉겁결에 상기된 표정을 하고 그 아이 책상 속과 자리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그곳에도 없다. 아이는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하고 친구들에게 말한다. 야, 니네 내 크레파스 갖구 간 사람 빨리 내놔! 나 그거 잃어먹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러자 한 아이가 별일 아닌 걸로 소란이냐는 듯 퉁을 준다. 야, 니네 아빠한테 사 달라 그러면 되지. 으이구. 잘 한다. 그 아이도 지지 않는다. 오늘 비가 와서 우리 아빠가 돈 벌러 안 갔으니 그러지. 넌 그것도 몰르냐. 그러자 아이들이 그 아이를 보며 헐. 니네 아빠 짤렸어? 쩐다! 그러자 그 아이도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래서 내 크레파스 잃어 먹으면 안된다구. 선생님, 빨리 찾아줘요! 아이들 모두 그 아이의 말에 공감하는 표정을 하더니 그림일기를 하다 말고 각자 교실 여기저기를 찾아 나선다.


1학년 아이들은 자기 집 형편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그네를 타면서, 복도를 오가며, 심지어 공부시간에도 기회만 되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누가 어제 엄마 말 안 듣다가 쓰레받기로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누구네 아빠가 술 먹고 엄마를 발로 찼는지, 누구네 할아버지가 술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논두렁에 빠졌는지 안다.


어른들이 알면 당혹스러울만한 가정사도 1학년 교실에서는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오간다. 말하는 아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듣는 아이 역시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1학년 아이들은 아직 남에게 자랑으로 말해야 할 것들과 숨겨야 할 부끄러운 가정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타인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머리를 자르고 오면 집에 가서 선생님의 머리 얘기를 하고, 자기네 엄마가 아빠와 싸우면 또 그 얘기를 나에게 와서 한다.


어떤 아이는 친구들에게 해 준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나에게 와서 또 얘기한다. 그러면 친구들이 그 아이를 나무란다. 야, 넌 그런 걸 왜 선생님한테 말하냐. 으이구. 쪽팔리지도 않냐? 자기들끼리는 각자의 삶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담임에게는 가려서 이야기한다. 내가 자기 엄마에게 일러 줄까 봐 그러는지 모른다. 그래서 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부모에게는 모른척한다. 나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이들의 삶과 비슷하게 꾸며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도 자기와 비슷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안도하는 것 같다.


*

크레파스가 안 나오자 한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어제 선생님이 교실 쓸었잖아요. 거기에 딸려 갔으면 어떡해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재빨리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뚜껑을 열고  뒤적뒤적한다. 바로 안 나오자 아예 교실 바닥에 그 큰 쓰레기통을 엎는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까지 달려든다. 순식간에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난 제자의 크레파스를 쓸어버린 매정한 담임이 되어 아이들의 눈총을 받는다.


쓰레기통에서도 크레파스가 나오지 않자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보통의 1학년 아이답지 않게 저 아이는 자기 물건에 대해 애착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크레파스 한 개 쯤은 별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일에 손해를 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잘 참는다. 싸워서 명예 회복을 하는 대신 패배를 감수해야 하는 부담보다 아예 참아버리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기르기가 편하다. 형제들과도 갈등이 적고 부모의 부족한 손길에 대해서도 투정하지 않고 잘 참아서일 테다. 이런 아이들은 성격이 좋다, 순하다는 말을 듣는다. 성격이 좋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맞춰주는 아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아직 없는 것이다. 한편,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수업시간에 과제를 끝까지 해내지 못한다. 안 하고 있으면서  교사가 해주길 기다리 편이다. 막상 하려고 하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뛰어들지 못한다.


결국 부모 입장에서 좋은 아이는 당장 성격 좋고 순한 아이가 아니라, 까다로워도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자기 삶을 알아서 헤쳐나가는 아이다. 저 아이는 그런 아이다. 색깔이 선명하고 의지가 강하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를 안다. 불편한 게 있으면 나에게 와서 또박또박 자신의 입장을 얘기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크레파스도 아낄  수밖에.


아이가 계속 울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위로한다. 야, 그냥 아무 색이나 칠해. 아님 내꺼 빌려줄게. 그걸로 하든지. 그러나 친구들의 호의도 아이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는지 그 아이,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난 모르는 척 아이들이 엎어 놓은 쓰레기를 쓸어 담는다. 쓰레기를 다 쓸고 나서 나는 아이들에게 수학 책을 꺼내라고 말한다.

한 아이가 따지듯 나를 힐난한다. 선생님,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크레파스를 못 찾았잖아요? 그런데 수학 공부를 하잖아요? 그럼 쟤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 상황에 공부를 하게 생겼느냐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웅얼거린다. 크레파스는... 다시 사면 되잖어. 그러니 지금은 공부를 해야지. 선생님은 공부 가르치려고 학교 왔는데 너네는 크레파스에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른 아이가 대든다. 으이구, 선생님! 쟤 크레파스 못 산다니깐요! 쟤네 집에 돈 없어요. 왠지 알아요? 지난번에 오이 값이 똥값이었단 말이에요. 그럼 돈을 못 벌었겠죠? 그래서 아빠가 돈 벌러 나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빠가 짤렸잖아요? 돈이 어디 있겠어요, 돈이!


아빠가 비 와서 하루 일을 못 나간 걸 두고 아이들은 자기 수준에서 이해 가능한 서사로 치환해서 걱정한다. 일부러 국어시간에 가르치려고 해도 힘든 영역인데, 아이들은 크레파스 하나로 배우는 것 같다. 난 또 못 알아듣는 척 딴 얘기를 꺼낸다. 음... 그럼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크레파스 하나 새로 갖다 줄까? 그 말에 아까 그 아이가 나선다. 안 되죠, 그건. 왜냐? 학교 꺼는 다시 돌려줘야 되잖아요. 선생님이 쟤한테 아주 가지라고 줄 거 아니잖아요! 난 그 말에 우물거린다. 그럼... 학교 꺼니깐 다 쓰고 학교에 돌려줘야지. 그래야 다음에 또 다른 아이가 잃어버리면 빌려줘야 되니까. 그러자 내게 돌아오는 말, 거 봐요. 그러니깐 선생님이 새로 사 줄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마요. 괜히 기분만 나빠지니깐요.


1학년 아이들도 가정경제를 안다. 자기네 집에 왜 돈이 없는지, 왜 자기 집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집과 다른지 안다. 같은 동네 사는 친구들 사이에도 누구네는 돈이 많고 누구네는 가난한지 안다. 자기에겐 낡은 장난감 몇 개 밖에 없는데 어떤 친구는 터닝메카드가 여러 종류 있는 걸 보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다행이라면 사회적 빈부격차를 당연한 듯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청소년기와는 다르게 아직 1학년 아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부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일을 하는 한 자기는 가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환상은 몇 해가 지나 고학년이 되면 깨진다.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 가는 수학여행을 자기는 못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어떤 친구는 싫증 난다고 조금 입고 버리는 비싼 점퍼를 자기는 한 번도 못 입어 보리라는 것도 안다. 문제는 지금 자기가 가난한 환경을 어떻게든 극복해서 자기의 삶을 개선하려는 희망을 갖도록 가르치는 일인데, 이걸 가르치는 일이 받아쓰기를 가르치는 일보다 더 힘들다.



*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신문 배달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식당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도와 학비라도 벌어보자는 계획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와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면 가끔은 졸리기도 하던 그때, 돈을 버는 일은 만만한 게 없다는 걸 모를 나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내가 그 일을 힘겨워 한 건 신문대금 수금이었다.


신문 보급소 사장은 수금을 언제나 강조했다. 수금한 돈을 갖다줘야 그중에서 내 월급을 덜어 주었다. 수금을 못하면 월급을 제 때 주지 않았다. 문제는 수금을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신문 돌리면서 수금을 부탁드리면, 아침부터 애새끼가  재수없게 돈 달라냐고 욕을 하는 구독자가 있었다. 신문배달하는 형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구독자였다. 다들 그 집을 꺼리니까 나한테 떨어진 집이었는데 나 역시 몇 달 째 신문값을 못 받고 있었다. 아침에 못 받은 신문값을 받으려고 학교 다녀와서 저녁 때 다시 가보면 집이 비었거나 퇴근 전이어서 또 받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니 주말에 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또한 핑계가 많았다. 은행이 문을 닫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집은 꽤 좋은 집이었다. 돈을 주지 않거나, 주더라도 늦게 주려는 구독자와 돈을 받아야 월급을 받는 나의 관계가 피로했다.


그렇다고 수금을 안 하자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월급은 못 받게 되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돈에 비해 신문값을 주는 걸 더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금원이 만만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난 결국 수금이 안된 집 앞에서 주인이 올 때까지 영어 단어라도 외우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려 주인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난 꾸벅 인사를 하고 불쌍한 표정을 하며 조심스레 신문값 얘기를 꺼냈다. 주인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에 오라고 반말을 내뱉었다. 난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아, 이번엔 꼭 받았어야 하는데 생각하니 애가 탔다. 그러나 다시 가서 달라고 할 생각까지는 못 했다. 다음에 오라고 했으니 다음에 가면 주겠지 믿어보는 게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한 일이었다.


무조건 막무가내로 버티면 백 퍼센트 줄 수밖에 없으니 문 앞에서 그냥 드러누우라고 같이 신문 돌리는 형들이 말했지만, 약해 빠진 내 성격에 그럴 용기를 낸 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돈 줄 생각을 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할까. 난 그 부끄러움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결국 보급소 사장에게, 그렇게 빙신쪼다처럼 하다가 니 인생 앞으로 어찌 먹고 살끼고? 하는 걱정까지 들었고, 결국 그 달치 월급을 받지 못 했다. 월급을 받지 못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내가 왜 돈을 못 받았는지, 또 이 시각에 왜 잠을 못 자는지 생각해 보았다. 몇 달치 신문을 다 보고도 돈을 안 주는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한 밤중에 잠도 못 자고 끙끙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낭패감과 절망에 빠뜨린 건 순전히 그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왜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야 하는가. 나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다시 그 집으로 갔다. 제법 늦은 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벨을 눌렀다.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난 즉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계단을 서너 개 올라 현관 문으로 갔다. 잠시 후 뭔가 짜증스러운 소리와 함께 주인이 나와서는 대뜸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라리며  재수없는 새끼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욕을 고스란히 다 듣고 나서, 난 최대한 차분하게 신문값 얘기를 꺼냈다. 신문을 이미 다 보셨으니 다음 달에 끊더라도 이번 달 수금은 제발 부탁드린다고 했다. 신문을 봤으니 돈을 내야 한다는 나의 말에 그의 양심이 자극되었을까, 그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금세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면서 경멸하듯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새끼한텐 안 준다, 씹쌔꺄. 꺼져.


남자에게 맞을까 봐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 내 눈에 거실에서 내 쪽을 쳐다보는 그의 가족들이 보였다. 그 집 아이가 내  또래쯤 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기세에 겁이 나기도 하고 또 가족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당혹스러워 나도 모르게 멈칫 물러섰다. 더구나 그의 욕이 계속 이어지자 난 나도 모르게 계단을 내려와 마당 끝 대문까지 걸어갔다. 마치 뭔가를 잘못한 사람이 제 풀에 부끄러워 달아나는 것처럼. 차라리 신문대금을 못 받아도 좋으니 그 상황을 벗어나고 숨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 없었던 일처럼 잊고 싶었다. 그런데 대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발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손이 갑자기 막 떨리면서 눈물이 핑 도나 싶더니 곧바로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더니 토하듯 끅끅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내가 왜, 내가 왜 이 시각에 여기서 울고 있어야 하는가. 이대로 돌아가면 난 또다시 잠이 안 올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난 내 월급을 받아야만 하겠다.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꼭 그래야겠다는 오기가 난데없이 들었다. 난 여전히 무서웠지만 다시 현관 문 앞으로 올라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여전히 끅끅거리는 울음과 함께. 가족들이 날 쳐다보거나 말거나. 잠시 후 나온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내였다. 안에서 바깥의 소동을 다 본 그분은 나를 보더니 다시 들어가 돈을 가져왔다. 난 그 뒤로 배달을 위해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했지만 그 집에 신문을 넣진 않았다. 구독자가 줄면 그만큼 내 월급이 깎여야 했다. 아깝지 않았다.


그 집을 지날 때마다 나에게 욕을 하던 남자와 마주칠까 봐 겁이 나서 가능하면 새벽시간에 그 집을 지나도록 배달 순서를 바꿨다. 그리고 그 집 아이가 학교에 갈 만한 시간엔 일부러 그 집을 지나가지 않았다. 또다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배달 시간이 반 시간이나 더 걸려야 했다. 그만큼 잠을 못 잤다. 그 남자가 무섭고, 아이에게 신문을 안고 뛰는 나를 보여주는 참담함이 더 싫었다. 하지만 그 집을 여러 달 지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엔 그 남자를 마주쳐도 별로 무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그 남자가 날 때리려고 달려들어도 내가 힘으로 밀리지는 않을 거라고, 오히려 나의 옆차기 한 방이면 그 남자도 꼼짝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 아이를 만나면 참담할 것 같던 생각도 바뀌었다. 나는 나대로,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살면 될 테니. 그 생각이 든 뒤로 난 다시 배달 순서를 예전으로 바꿨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자가 무서워 나 스스로 피해 다니던 몇 달 전 내 모습이 가엽게 느껴졌다.


그토록 겁에 질려 있었으면서도 나를 다시 그 집 현관 문 앞으로 이끌었던 그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 나의 절박한 삶 어딘가에서 그 마음은 오기의 한 모습으로 항상 나와 함께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삶의 구석으로 몰려 스스로 이를 악물 때까지 말없이 내 속에서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오기 덕분에 그 집뿐 아니라 다른 집도 수금을 했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뒤로 나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오기가 있음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물러 터진 성격으로 살고 있지만, 필요할 때마다 가끔씩 그 오기를 불러낸다. 그때 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울음이 나오려고 하면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내 마음을 차분히 응시한다. 그러면 오기가 '난 여전히 여기 있어'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


그림일기를 끝낸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놀러 나갔는데도 저 아이는 혼자 울고 있다. 아이의 울음 속에서 어릴 적 내가 끅끅거리던 생각이 난다. 나에게 있던 오기는 저 아이에게도 있을 것이다. 겨우 1학년이지만. 아이가 그걸 찾는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려면 저 아이가 너무 구석에 몰려 스스로 이를 악물 고 일어설 때까지 값 싼 동정을 베풀지 않고 참아야 한다. 그게 저 아이가 극복해야 할 현실이니까. 그런데 지금 난 저 아이가 가엽다. 나의 어릴 적  생각이나서 더 그런 것 같다. 저 아이의 가난이 어찌 저 아이의 책임인가. 그깟 크레파스 한 개가 뭐라고, 아이가 아침부터 저렇게 홀로 울어야 하나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래, 이번만, 이번만 그냥 넘어가게 달래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 아이의 환경이라면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지 않을까. 그러면 오기도 알게 될 텐데. 아직 1학년 담임인 내가 너무 저 아이의 삶에 냉혹하게 개입하려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의 크레파스와 똑같은 학교용 크레파스를 열어 살구색 크레파스를 꺼내고 있는데 아이가 외친다. 선생님, 찾았어요!


의자에 벗어놓은 아이 외투 주머니로 굴러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슥 눈물을 닦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밖으로 놀러 나갔다. 하마터면, 내가 성급한 연민으로 아이의 성장을 늦출 뻔했다. 아이 보다 내가 더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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