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학년 교실.
그림일기를 그리던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내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 내 크레파스 봤어요? 살구색 크레파스요. 아, 그거 찾아야 되는데... 지붕을 파랗게 칠하고 나서 사람을 칠하려고 보니 살구색이 안 보였나 보다. 아이의 표정이 하도 절박해 보이니 나도 엉겁결에 상기된 표정을 하고 그 아이 책상 속과 자리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그곳에도 없다. 아이는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하고 친구들에게 말한다. 야, 니네 내 크레파스 갖구 간 사람 빨리 내놔! 나 그거 잃어먹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러자 한 아이가 별일 아닌 걸로 소란이냐는 듯 퉁을 준다. 야, 니네 아빠한테 사 달라 그러면 되지. 으이구. 잘 한다. 그 아이도 지지 않는다. 오늘 비가 와서 우리 아빠가 돈 벌러 안 갔으니 그러지. 넌 그것도 몰르냐. 그러자 아이들이 그 아이를 보며 헐. 니네 아빠 짤렸어? 쩐다! 그러자 그 아이도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래서 내 크레파스 잃어 먹으면 안된다구. 선생님, 빨리 찾아줘요! 아이들 모두 그 아이의 말에 공감하는 표정을 하더니 그림일기를 하다 말고 각자 교실 여기저기를 찾아 나선다.
1학년 아이들은 자기 집 형편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그네를 타면서, 복도를 오가며, 심지어 공부시간에도 기회만 되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누가 어제 엄마 말 안 듣다가 쓰레받기로 머리를 얻어맞았는지, 누구네 아빠가 술 먹고 엄마를 발로 찼는지, 누구네 할아버지가 술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논두렁에 빠졌는지 안다.
어른들이 알면 당혹스러울만한 가정사도 1학년 교실에서는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오간다. 말하는 아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듣는 아이 역시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1학년 아이들은 아직 남에게 자랑으로 말해야 할 것들과 숨겨야 할 부끄러운 가정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타인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머리를 자르고 오면 집에 가서 선생님의 머리 얘기를 하고, 자기네 엄마가 아빠와 싸우면 또 그 얘기를 나에게 와서 한다.
어떤 아이는 친구들에게 해 준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나에게 와서 또 얘기한다. 그러면 친구들이 그 아이를 나무란다. 야, 넌 그런 걸 왜 선생님한테 말하냐. 으이구. 쪽팔리지도 않냐? 자기들끼리는 각자의 삶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담임에게는 가려서 이야기한다. 내가 자기 엄마에게 일러 줄까 봐 그러는지 모른다. 그래서 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부모에게는 모른척한다. 나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이들의 삶과 비슷하게 꾸며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도 자기와 비슷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안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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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가 안 나오자 한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어제 선생님이 교실 쓸었잖아요. 거기에 딸려 갔으면 어떡해요? 그러자 한 아이가 재빨리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뚜껑을 열고 뒤적뒤적한다. 바로 안 나오자 아예 교실 바닥에 그 큰 쓰레기통을 엎는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까지 달려든다. 순식간에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난 제자의 크레파스를 쓸어버린 매정한 담임이 되어 아이들의 눈총을 받는다.
쓰레기통에서도 크레파스가 나오지 않자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보통의 1학년 아이답지 않게 저 아이는 자기 물건에 대해 애착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크레파스 한 개 쯤은 별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일에 손해를 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잘 참는다. 싸워서 명예 회복을 하는 대신 패배를 감수해야 하는 부담보다 아예 참아버리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기르기가 편하다. 형제들과도 갈등이 적고 부모의 부족한 손길에 대해서도 투정하지 않고 잘 참아서일 테다. 이런 아이들은 성격이 좋다, 순하다는 말을 듣는다. 성격이 좋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맞춰주는 아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아직 없는 것이다. 한편,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수업시간에 과제를 끝까지 해내지 못한다. 안 하고 있으면서 교사가 해주길 기다리 편이다. 막상 하려고 하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뛰어들지 못한다.
결국 부모 입장에서 좋은 아이는 당장 성격 좋고 순한 아이가 아니라, 까다로워도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자기 삶을 알아서 헤쳐나가는 아이다. 저 아이는 그런 아이다. 색깔이 선명하고 의지가 강하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경계를 안다. 불편한 게 있으면 나에게 와서 또박또박 자신의 입장을 얘기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크레파스도 아낄 수밖에.
아이가 계속 울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위로한다. 야, 그냥 아무 색이나 칠해. 아님 내꺼 빌려줄게. 그걸로 하든지. 그러나 친구들의 호의도 아이에겐 위로가 되지 못했는지 그 아이,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난 모르는 척 아이들이 엎어 놓은 쓰레기를 쓸어 담는다. 쓰레기를 다 쓸고 나서 나는 아이들에게 수학 책을 꺼내라고 말한다.
한 아이가 따지듯 나를 힐난한다. 선생님,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크레파스를 못 찾았잖아요? 그런데 수학 공부를 하잖아요? 그럼 쟤 기분이 어떻겠어요? 이 상황에 공부를 하게 생겼느냐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웅얼거린다. 크레파스는... 다시 사면 되잖어. 그러니 지금은 공부를 해야지. 선생님은 공부 가르치려고 학교 왔는데 너네는 크레파스에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른 아이가 대든다. 으이구, 선생님! 쟤 크레파스 못 산다니깐요! 쟤네 집에 돈 없어요. 왠지 알아요? 지난번에 오이 값이 똥값이었단 말이에요. 그럼 돈을 못 벌었겠죠? 그래서 아빠가 돈 벌러 나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빠가 짤렸잖아요? 돈이 어디 있겠어요, 돈이!
아빠가 비 와서 하루 일을 못 나간 걸 두고 아이들은 자기 수준에서 이해 가능한 서사로 치환해서 걱정한다. 일부러 국어시간에 가르치려고 해도 힘든 영역인데, 아이들은 크레파스 하나로 배우는 것 같다. 난 또 못 알아듣는 척 딴 얘기를 꺼낸다. 음... 그럼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크레파스 하나 새로 갖다 줄까? 그 말에 아까 그 아이가 나선다. 안 되죠, 그건. 왜냐? 학교 꺼는 다시 돌려줘야 되잖아요. 선생님이 쟤한테 아주 가지라고 줄 거 아니잖아요! 난 그 말에 우물거린다. 그럼... 학교 꺼니깐 다 쓰고 학교에 돌려줘야지. 그래야 다음에 또 다른 아이가 잃어버리면 빌려줘야 되니까. 그러자 내게 돌아오는 말, 거 봐요. 그러니깐 선생님이 새로 사 줄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마요. 괜히 기분만 나빠지니깐요.
1학년 아이들도 가정경제를 안다. 자기네 집에 왜 돈이 없는지, 왜 자기 집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집과 다른지 안다. 같은 동네 사는 친구들 사이에도 누구네는 돈이 많고 누구네는 가난한지 안다. 자기에겐 낡은 장난감 몇 개 밖에 없는데 어떤 친구는 터닝메카드가 여러 종류 있는 걸 보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다행이라면 사회적 빈부격차를 당연한 듯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청소년기와는 다르게 아직 1학년 아이들은 언젠가 반드시 부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일을 하는 한 자기는 가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환상은 몇 해가 지나 고학년이 되면 깨진다.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친구들이 다 가는 수학여행을 자기는 못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어떤 친구는 싫증 난다고 조금 입고 버리는 비싼 점퍼를 자기는 한 번도 못 입어 보리라는 것도 안다. 문제는 지금 자기가 가난한 환경을 어떻게든 극복해서 자기의 삶을 개선하려는 희망을 갖도록 가르치는 일인데, 이걸 가르치는 일이 받아쓰기를 가르치는 일보다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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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신문 배달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식당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도와 학비라도 벌어보자는 계획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와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면 가끔은 졸리기도 하던 그때, 돈을 버는 일은 만만한 게 없다는 걸 모를 나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내가 그 일을 힘겨워 한 건 신문대금 수금이었다.
신문 보급소 사장은 수금을 언제나 강조했다. 수금한 돈을 갖다줘야 그중에서 내 월급을 덜어 주었다. 수금을 못하면 월급을 제 때 주지 않았다. 문제는 수금을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신문 돌리면서 수금을 부탁드리면, 아침부터 애새끼가 재수없게 돈 달라냐고 욕을 하는 구독자가 있었다. 신문배달하는 형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구독자였다. 다들 그 집을 꺼리니까 나한테 떨어진 집이었는데 나 역시 몇 달 째 신문값을 못 받고 있었다. 아침에 못 받은 신문값을 받으려고 학교 다녀와서 저녁 때 다시 가보면 집이 비었거나 퇴근 전이어서 또 받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니 주말에 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또한 핑계가 많았다. 은행이 문을 닫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집은 꽤 좋은 집이었다. 돈을 주지 않거나, 주더라도 늦게 주려는 구독자와 돈을 받아야 월급을 받는 나의 관계가 피로했다.
그렇다고 수금을 안 하자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월급은 못 받게 되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돈에 비해 신문값을 주는 걸 더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금원이 만만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난 결국 수금이 안된 집 앞에서 주인이 올 때까지 영어 단어라도 외우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려 주인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난 꾸벅 인사를 하고 불쌍한 표정을 하며 조심스레 신문값 얘기를 꺼냈다. 주인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에 오라고 반말을 내뱉었다. 난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아, 이번엔 꼭 받았어야 하는데 생각하니 애가 탔다. 그러나 다시 가서 달라고 할 생각까지는 못 했다. 다음에 오라고 했으니 다음에 가면 주겠지 믿어보는 게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한 일이었다.
무조건 막무가내로 버티면 백 퍼센트 줄 수밖에 없으니 문 앞에서 그냥 드러누우라고 같이 신문 돌리는 형들이 말했지만, 약해 빠진 내 성격에 그럴 용기를 낸 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돈 줄 생각을 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돈을 달라고 할까. 난 그 부끄러움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결국 보급소 사장에게, 그렇게 빙신쪼다처럼 하다가 니 인생 앞으로 어찌 먹고 살끼고? 하는 걱정까지 들었고, 결국 그 달치 월급을 받지 못 했다. 월급을 받지 못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내가 왜 돈을 못 받았는지, 또 이 시각에 왜 잠을 못 자는지 생각해 보았다. 몇 달치 신문을 다 보고도 돈을 안 주는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한 밤중에 잠도 못 자고 끙끙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낭패감과 절망에 빠뜨린 건 순전히 그 사람 때문이었다. 내가 왜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야 하는가. 나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다시 그 집으로 갔다. 제법 늦은 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벨을 눌렀다.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난 즉시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계단을 서너 개 올라 현관 문으로 갔다. 잠시 후 뭔가 짜증스러운 소리와 함께 주인이 나와서는 대뜸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라리며 재수없는 새끼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욕을 고스란히 다 듣고 나서, 난 최대한 차분하게 신문값 얘기를 꺼냈다. 신문을 이미 다 보셨으니 다음 달에 끊더라도 이번 달 수금은 제발 부탁드린다고 했다. 신문을 봤으니 돈을 내야 한다는 나의 말에 그의 양심이 자극되었을까, 그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금세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면서 경멸하듯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새끼한텐 안 준다, 씹쌔꺄. 꺼져.
남자에게 맞을까 봐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 내 눈에 거실에서 내 쪽을 쳐다보는 그의 가족들이 보였다. 그 집 아이가 내 또래쯤 되는 것 같았다. 그 남자의 기세에 겁이 나기도 하고 또 가족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당혹스러워 나도 모르게 멈칫 물러섰다. 더구나 그의 욕이 계속 이어지자 난 나도 모르게 계단을 내려와 마당 끝 대문까지 걸어갔다. 마치 뭔가를 잘못한 사람이 제 풀에 부끄러워 달아나는 것처럼. 차라리 신문대금을 못 받아도 좋으니 그 상황을 벗어나고 숨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 없었던 일처럼 잊고 싶었다. 그런데 대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발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손이 갑자기 막 떨리면서 눈물이 핑 도나 싶더니 곧바로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더니 토하듯 끅끅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내가 왜, 내가 왜 이 시각에 여기서 울고 있어야 하는가. 이대로 돌아가면 난 또다시 잠이 안 올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난 내 월급을 받아야만 하겠다.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꼭 그래야겠다는 오기가 난데없이 들었다. 난 여전히 무서웠지만 다시 현관 문 앞으로 올라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여전히 끅끅거리는 울음과 함께. 가족들이 날 쳐다보거나 말거나. 잠시 후 나온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내였다. 안에서 바깥의 소동을 다 본 그분은 나를 보더니 다시 들어가 돈을 가져왔다. 난 그 뒤로 배달을 위해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했지만 그 집에 신문을 넣진 않았다. 구독자가 줄면 그만큼 내 월급이 깎여야 했다. 아깝지 않았다.
그 집을 지날 때마다 나에게 욕을 하던 남자와 마주칠까 봐 겁이 나서 가능하면 새벽시간에 그 집을 지나도록 배달 순서를 바꿨다. 그리고 그 집 아이가 학교에 갈 만한 시간엔 일부러 그 집을 지나가지 않았다. 또다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배달 시간이 반 시간이나 더 걸려야 했다. 그만큼 잠을 못 잤다. 그 남자가 무섭고, 아이에게 신문을 안고 뛰는 나를 보여주는 참담함이 더 싫었다. 하지만 그 집을 여러 달 지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엔 그 남자를 마주쳐도 별로 무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그 남자가 날 때리려고 달려들어도 내가 힘으로 밀리지는 않을 거라고, 오히려 나의 옆차기 한 방이면 그 남자도 꼼짝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 아이를 만나면 참담할 것 같던 생각도 바뀌었다. 나는 나대로,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살면 될 테니. 그 생각이 든 뒤로 난 다시 배달 순서를 예전으로 바꿨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자가 무서워 나 스스로 피해 다니던 몇 달 전 내 모습이 가엽게 느껴졌다.
그토록 겁에 질려 있었으면서도 나를 다시 그 집 현관 문 앞으로 이끌었던 그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아마 나의 절박한 삶 어딘가에서 그 마음은 오기의 한 모습으로 항상 나와 함께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삶의 구석으로 몰려 스스로 이를 악물 때까지 말없이 내 속에서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오기 덕분에 그 집뿐 아니라 다른 집도 수금을 했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뒤로 나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오기가 있음을 스스로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물러 터진 성격으로 살고 있지만, 필요할 때마다 가끔씩 그 오기를 불러낸다. 그때 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울음이 나오려고 하면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내 마음을 차분히 응시한다. 그러면 오기가 '난 여전히 여기 있어'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
그림일기를 끝낸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놀러 나갔는데도 저 아이는 혼자 울고 있다. 아이의 울음 속에서 어릴 적 내가 끅끅거리던 생각이 난다. 나에게 있던 오기는 저 아이에게도 있을 것이다. 겨우 1학년이지만. 아이가 그걸 찾는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려면 저 아이가 너무 구석에 몰려 스스로 이를 악물 고 일어설 때까지 값 싼 동정을 베풀지 않고 참아야 한다. 그게 저 아이가 극복해야 할 현실이니까. 그런데 지금 난 저 아이가 가엽다. 나의 어릴 적 생각이나서 더 그런 것 같다. 저 아이의 가난이 어찌 저 아이의 책임인가. 그깟 크레파스 한 개가 뭐라고, 아이가 아침부터 저렇게 홀로 울어야 하나 싶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래, 이번만, 이번만 그냥 넘어가게 달래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저 아이의 환경이라면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지 않을까. 그러면 오기도 알게 될 텐데. 아직 1학년 담임인 내가 너무 저 아이의 삶에 냉혹하게 개입하려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의 크레파스와 똑같은 학교용 크레파스를 열어 살구색 크레파스를 꺼내고 있는데 아이가 외친다. 선생님, 찾았어요!
의자에 벗어놓은 아이 외투 주머니로 굴러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슥 눈물을 닦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밖으로 놀러 나갔다. 하마터면, 내가 성급한 연민으로 아이의 성장을 늦출 뻔했다. 아이 보다 내가 더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