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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Dec 02. 2015

또봇의 힘


한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와도 되냐고 묻는다.

그 말이 끝나자 한 아이가 나무란다. 야, 당연히 안 되지. 어린이집 때도 장난감 갖구 오지 말라 그랬잖아.

그러자 그 아이가 발끈한다. 야, 어린이집에는 장난감이 많았으니 그렇지. 우리 교실엔 장수풍뎅이 밖에 없잖아.

교실에 놀 거리가 부족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나도 거든다. 아이고, 그럼 선생님이 장난감 좀 구해 올까?

그랬더니 그 아이, 내가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선생님은 또봇도 없잖아요.


다음날, 그 아이가 또봇을 몇 개 가지고 온다.

적당히 변신을 시켜 놓더니 아이들에게 외친다. 야, 이거 누가 다시 차로  변신시킬 수 있는 사람?

아이 몇이 몰려와 잠시 낑낑대더니 뚝딱 맞춘다.

그러자 아이는 자기 장난감을 하나씩 들려준 뒤 또봇 놀이를 하자고 한다. 아이들이 그 놀이에 빠진다.

다음날, 그 아이는 더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온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놀이를 하거나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낸다.

그다음날엔 더 많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온다.

장난감 놀이는 시비가 많고 정신없다. 담임인 나로선 고역이다.


또봇을 가져온 아이는 학교 오는 게 즐겁다고 한다.

난 그 아이가 다른 어떤 일에서도 재미없다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운동장의 벚나무에 오를 때에도, 그네를 탈 때에도, 아이는 늘 의욕이 넘치고 자신감이 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다른 친구와 놀 때에도 자기 자신을 소중히 인정해 주는 친구와 놀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이용하려는 친구와는 잘  놀려하지 않는다.

가끔 나의 부탁으로 소외되는 친구와도 놀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도 아이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려도 자신과 무늬가 맞는 친구, 안 맞는 친구를 금방 알아본다.

이런 아이는 친구를 알아보는 눈도 예리하다.

그래서 비슷한 아이와 어울리고 싶어 한다.

자신의 자존감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심리 때문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인정할 줄 아는 아이 또한 자존감이 높은 아이여야 가능하므로

결국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그러한 아이들끼리 어울려 놀기를 좋아한다.

이런 아이들은 집단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학급의 헤게모니를 주도한다.

또봇이나 레고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도 가지고 오려고 하고

이 아이가 흉내 내는 '도찐개찐' 개그는 다른 아이들도 금세 따라 해서 우리 교실의 유행어가 된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아이는  선망받아 본 그 쾌감을 잃지 않으려 더 노력한다.


이런 아이들은 놀이에도 더 적극적인 아이가 되려 애쓰지만,

머잖아 놀기만 잘 해선 자존감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자연스레 안다.

자기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상 공부도 잘 해야 진짜 잘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발달단계 상 사춘기 무렵이면 이런 태도가 완성되는데, 그 시기는 공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다.

이처럼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도 잘 하게 된다.

공부를 잘 함으로써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을 이미 체험 한 아이는,

공부를 못하게 됨으로써 잃는 자존심도 아까운 걸 알기 때문에 아이는 자존심을 걸고 공부를 한다.

성적이 오르면 좋지만 떨어져도 그다지 좌절하지 않는다.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바꿔 다음 시험을 묵묵히 준비한다.

더 잘 하기 위해 스스로 학원을 보내달라고도 하고 책을 사 달라고 하는 대견함도 보인다.




자존감이 강해 무엇이든 자신감을 가지고 해 보려 덤비는 아이와

어른이 시키는 공부를 수동적으로 하면서 억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같은 교실, 같은 학교, 같은 나라 안에 서로 뒤섞여 경쟁을 하고 있다.

얼핏 초기엔 엄마 말 잘 듣는 수동적인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찍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초등학교에서의 일일뿐, 정작 이 아이들이 대학 갈 나이가 되면

자존감이 약한 아이들은 상위권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스스로 참고 버텨내야 하는 공부. 그게 원래 그토록 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밀려 공부해서 잘 살고 있는 어른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자존감이 높은 아이가 결국 상위권에 드는 까닭과, 이런 아이가 결국 세상의 리더가 되는 까닭은 같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이런 아이로 기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보다 일찍 글자와 셈을 가르치고 또 뭔가를 익히게 한다.

남들보다 한 발짝 먼저 나가 있어야 리더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놀이조차도 공부와 관련된 걸 시키고 아이의 시간을 쪼개 여기저기로 돌린다.

한참 친구들과 놀아야 할 시기지만 아이는 부모의 욕망에 부응하느라 정작 자기 욕망을 이해할 여유가 없다.

부모의 판단에 친구들과 놀리는 것보다 학습을 하면서 노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모 자신은 어린 시절 해가 지도록 골목길에서 놀면서 자랐고

그 과정에서 양보와 타협, 승리와 좌절을 학습한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유독 엄마 품 바깥으로 몰아치는 현실의 이면엔, 이웃집 아이와의 경쟁구도가 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다 하는데 자기 아이만 덩그러니 놀이터에서 놀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알음알음으로 정보를 얻고 자기 아이를 그 자리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가슴으로 간절히 외친다. 제발 리더가 되어라. 빨리 배우거라. 너만 일등 하거라.

그러나 어쩌랴. 아이들의 자존감은 그런 방식으로는 자라지 않으니.

늘 다른 아이들 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는 듯 보이는 아이들이나

늦게 출발한 아이나 결국 대학입시라는 같은 시간대에 모이게 된다.

그때 가서는 일찍 출발한 아이가 아니라, 더 열심히 한 아이가 더 높은 위치인 걸 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그리 가혹하게 몰아치며 기르려 했을까.



남보다 일찍 시작해서 어떻게든 밀고 나가면 그래도 남보다 앞서겠지 믿는 부모는,

몇 년 늦더라도 아이 스스로 결심하고 공부하는 아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성취의 쾌감으로 인해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걸 모른다.

부모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공부하는 아이는 처음엔 앞서는 듯하지만

어느 날, 자기보다 쳐지던 친구가 치고 나가는 것을 보면 당황한다.

자신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친구들도 포기하고 공부만 했는데

할 것 다 하고 노는 것 같기만 하던 아이가 자기를 능가하는 것에 좌절한다.

중 고등학교에 가면 이렇게 공부 안 하는 것 같으면서도 공부 잘하는, 이상한 아이가 주변에 점점 늘어난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로 먹고사는 나 또한 가능하면 나의 아이들도 자존감 강하게 기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강제로 공부를 시키지 않아야 했다. 그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선행을 하기 위해 방학을 희생하고, 그래서 학교가 재미없다는 아이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아이가 끝내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적당히 끌어주면서 기다려야 되는 건 아닐까? 그럼 어느 정도까지, 뭘 끌어주지?

많은 전문가들이 책을 가까이하게 해 주라고 권했다.

그리고 항상 아이의 생각을 물어주라고 했다.

자존감은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경험을 통해 자기를 잘 파악할 수 있어야 생기는 거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익혀야 하는 세상에서 사색이라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막상 아이를 기르는 내 입장에서 너무 모호했다.

모호함은 불안을 부른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 아이들과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는 날은 도서관 앞에서 외식을 했다.

아이들과는 무슨 책을 빌릴까 보다 오늘은 떡볶기를 먹을까 붕어빵을 먹을까를 의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식의 즐거움이 우선이던 초기와 달리 점점 책의 재미에 빠져갔다.

난 이걸 또한 나의 학부모들에게 끝없이 권했다.

그들은 담임인 내 앞에선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말을 불안해했다.

오히려 나를 타이르는 분들도 있었다. 선생님 아이는 이제 갓 초등학교 입학했잖아요. 고등학교 가 봐요. 세상이 안 그래요.

그들은 언제나 반신반의했다. 이웃의 아이들은 너무 앞서가고 있다며 두려워했다.

모호해서였다. 난 때론 답답해하고 때론 그들을 이해했다. 그리고 마음 아팠다.

난 이런 실상을 나의 교실에서, 책에서, 그리고 EBS의 다큐들을 통해 배웠지만

끝내 나의 학부모들을 설득시키지 못 했다. 죄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의 학부모들은 예전보다 내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내 아이가 고등학교에서 전교 일등이더라는 소문 때문이다.

내 아이가 초등학교 때는 공부가 어떠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독서 덕분이었는지 아는 것이 많다는 말은 몇 번 들었으나 시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가서는 서서히 눈에 띄었다. 독서의 힘은 그렇게 늦게 나타나나 보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야 나더러 당신이 옳았나 보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선생인 당신이 뭔가 특별한 교육을 한 거 아니냐고 묻는다.

내 아이가 일등이 아니었다면, 과연 나의 학부모들이 내 말을 믿어 줬을까.

또 자존감 강한 아이로 자라면 모두 일등을 하고 서울대를 가고 의사나 판검사가 되어야 하는 걸까.

만약 아이가 반드시 성공한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삶의 질을 위해 좀 더 느슨하게 기른다면 잘못인 걸까.

아이가  일등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생의 권면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의 이면에 여전히 오늘도 여기로 저기로 바쁘게 치이는 아이들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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