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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Dec 24. 2015

1학년 앨범을 만들다


앨범을 만들었다.

성인이 되어 학부모가 된 제자들을 만나면 지금도 가끔 문집을 보며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고 한다.

나에게 어떤 공부를 배웠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 나고 문집만 기억난다고 한다.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그 문집을 보면 기운이 난다고도 한다.

나는 그래서 그 뒤로도 아이들에게 문집을 만들어 준다.


예전에 문집을 만드는 일은 제법 힘이 들었다. 어쩌면 귀찮은 일이었다.

아이들의 글이며 그림을 모으는 것도 일이었다.

고학년 아이들은 자기 흔적이 문집으로 묶여 다른 친구들과 공유되는 걸 싫어해서 설득하느라 애먹었다.

그렇게 모은 원고를 시내 복사가게에 가져다주면 그걸 학생 수만큼 복사해서 제본으로 묶어 주었다.

기껏 해 봐야 몇 십 쪽짜리 흑백이었다.

인쇄 질이 안 좋아 어떤 아이의 글은 허옇거나 꺼멓게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천 원, 이천 원씩을 걷어서 비용을 충당했다.

수업과 잡무 틈틈이 별도의 시간을 내야 하는 일이어서 수없이 문집을 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기억이 난다.

원고를 통째로 잃어버려 못 만든 적도 있다.

어떤 해에는 미리 준비를 못 해 아이들이 졸업하고 나서 다시 연락해서 나눠주기도 했다.


난 카메라를 샀고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아무리 찍고 또 찍어도 아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사진에 남았다.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하고 그곳에 아이들 사진과 글을 올렸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뒤섞여 일 년의 시간을 채워갔다.

인터넷 포털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그 카페는 아이들에게 문집이 될 것이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만드는 과정이 수월해졌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아이들의 글이나 그림을 찍어서 포토앨범북을 만드는 회사에 주문만 하면 일주일 후 학교로 보내준다.

복사기로 복사해서 묶는 방식이 아니라 칼라 포토 프린팅이다.

아이들에게 문집을 만들어 줄 정도의 돈도 학교에서 대 준다.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학교는 올해 20만 원을 학급 운영비로 지원했다.

이 돈은 학급을 운영하면서 담임이 재량껏 사용할 수 있다.

생일파티를 하거나 학년말에 독특한 행사를 기획할 때 사용해도 된다.

올해 난 이 돈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백여 쪽에 가까운 제법 두툼한 앨범에는 아이들이 쓴 글, 그림, 사진이 들어 있다.







제자의 표현처럼, 정말 나중에 저 아이들이 힘들 때 이걸 보고 힘을 낼 수 있을까.

성인이 되어 버거운 현실을 만났을 때, 정말 어린 시절 사진 몇 장이 희망이 될 수도 있나.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고르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줄만한 걸 골랐다.

그리고 맨 뒷장에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 앨범이 너희들 삶에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가당치 않은 바람일지 몰라도 지금 내 마음은 그러하다.

앨범 속에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도 써넣었다.

아이들의 1년을 기록해서 선물하고 싶었다고. 바람대로 되어 기쁘다고.




앨범을 받자마자 아이들이 사진을 보며 낄낄댄다.

지금 아이들을 웃게 하는 건 사진 속 친구들의 표정이나 재미있는 포즈다.

점차 아이들이 자라 나이가 더 들면 그 속에 담긴 자신감과 따뜻함도 읽어내주었으면.

그래서 정말로 기운이든 뭐든 얻고 힘을 내서 살아가준다면야.






아이들의 글씨도 일부러 여러 장 넣었다.

입을 앙다물고 얼굴에 잔뜩 힘을 준 채 작은 손으로 또박또박 힘들여 쓴 글씨들.

이 글씨들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캘리그래피들 보다 훌륭하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특히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하는 사진 위주로 넣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여럿이 함께 해서 더 쉽게, 힘들 줄 모르고 배웠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 힘든 일을 만나도 혼자 고민하지 말았으면 해서.





이 아이는 더 이상 글씨를 이렇게 쓰지 않는다.

저 글 이후 몇 달이 지난 지금, 저 아이의 글씨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라는 계통에 더 가까워졌다.

이 사진을 나중에 보고 자기가 1학년 때 얼마나 가파른 성장을 했는지 자부심을 가지길 바랐다.

그래서 혹시라도 누가 무시해도 상처받지 말았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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