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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Dec 03. 2015

마법의 장화

장화 한 켤레가 1학년 아이를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관한 이야기

아침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한 아이가 달려온다. 선생님, 저 오늘 장화 신고 왔다요. 아빠랑 샀죠. 비 오면 신을라구. 근데 요즘에 비가 잘 안 와서 못 신었잖아요. 

다른 아이가 샘난 목소리로 끼어든다. 얘, 지금 자랑할라구 그러는거예요. 너는 오늘 비도 안 오는데 장화를 신고 오냐. 너 자랑할라 그러지?

아이도 지지 않고 맞선다. 오늘 비 온다 그랬어. 내가 테레비에서 봤다니깐. 

그 아이, 어이없다는 듯 하늘을 가리킨다. 야, 저렇게 해가 났는데 비가 오겠냐. 너 장화 샀다고 잘난 척하지 마. 

아이도 하늘을 보더니 한 풀 꺾인다. 


공부 시간. 

한참 공부가 진행 중인데 아이가 창밖을 보더니 갑자기 내게 묻는다. 선생님, 쫌 이따 비 올 거죠? 밖에 보란 말이에요. 흐렸잖아요. 

난데없는 질문에 공부가 끊어진다. 난 못 들은 척하며 계속 이어가려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뛰어가더니 까치발을 하고 손을 쭉 뻗어 창문을 확 연다.

창문이 창틀에 쾅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바깥의 찬 바람이 훅 들어온다.

아이들이 그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야, 너 공부시간에 왜 시끄럽게 해. 우리 춥잖아. 너 비 오면 장화 신고 잘난 척하려고 그러지? 다 알어. 


공부 보다 바깥을 보는 아이도, 그 아이의 장화에 대해 시기심이 많은 아이들도 문제인 것 같아 한 마디 할까 하다 그만둔다. 

흐리긴 했지만 아직 비가 안 오는 걸 확인 한 아이는 창문을 닫고 시무룩하게 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억울하다는 듯 말한다. 야, 테레비에서 오늘 비 온다 그랬어. 내가 어제 봤다니깐. 

한 아이가 그 아이를 아기 달래듯 말한다. 야, 그래도 공부시간에는 공부를 해야지. 으이구, 그러다가 비 오면 그때 장화 신고 나가면 되니깐. 

아이들 말싸움을 말려 보려고 내가 끼어든다. 이따가 점심시간에 비 오면 좋겠네. 장화 신고 나가게. 

그러자 그 아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게 소리를 버럭 지른다. 오늘 비가 안 올까 봐 그런다구요. 오늘 비 안 오면 내가 장화를 어떻게 신냐구요! 

의외의 반응에 다른 아이들이 놀라서 모두 내 쪽을 쳐다본다. 선생님에게 소리를 질렀으니 저 아이를 어떻게 혼낼지 지켜보겠다는 반응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막상 아이의 말투에서 어떤 필사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야단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있다. 

그런 내가 안돼 보였는지 한 아이가 나 대신 그 아이를 나무란다. 야, 너 왜 버르장머리 없이 선생님한테 까불어. 잘한다, 아주 잘 해. 너 장화 갖구 그렇게 잘난 척하지 마. 나는 뭐 장화 없는 줄 아냐. 야, 니네 중에서 장화 있는 사람 전부 손들어.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든다. 그러면서 자기 장화를 누가, 언제, 어떤 색으로 사 줬는지 떠드느라 바쁘다. 

그 정도면 떠들 만큼 떠든 것 같아서 다시 분위기를 공부로 돌리려고 내가 한 마디 한다. 우리 다음에 진짜로 비 오면 전부 다 장화 신고 오기로 하고 아까 공부하던 거 다시... 

이번에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아이가 울부짖는다. 다음번에 나는 장화 못 신는다구요. 장화가 너무 짝아져서 발에 안 들어가니깐요...! 


아유, 저 노무새끼를 그냥. 

그깟 장화 하나 갖고 공부시간을 다 망가뜨리네 싶어 나는 슬슬 화가 난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내자니 그러면 다시 공부로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거 같았다. 

대신 누가 나 대신 그 아이에게 야, 그깟 장화 하나 갖구 쯩쯩대지 좀 마. 니가 지금 유치원이냐라고 일갈해주길 기대하며 아이들을 둘러보는데 웬걸. 

아이들의 눈빛은 그 아이를 나무랄 생각이 없는 듯하다.

공부는커녕, 그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간에 잠시 어지러운 대화가 오간다. 


- 헐. 장화가 짝아져? 와, 쩐다. 너 그거 언제 샀는데. 그 사이에 발이 컸냐. 

- 어... 그러니깐 내가 병설유치원 다닐 때 샀으니깐... 일곱 살 때 샀지. 아빠가. 비올 때 신으라구. 

- 나도 장화 얼마 못 신었는데. 비가 안 와서. 한 번 비올 때 신을라 그랬는데 엄마가 못 신게 했어. 

- 헐. 왜 못 신게 해. 그럴라면 왜 사 줬는데. 와, 니네 엄마 쩐다. 

- 내가 지난번에 짝아진 장화를 신고 개울에 들어갔단 말이야. (갑자기 양말을 벗고 책상 위에 발을 척 올리고 엄지발가락을 가리키며) 그런데 여기가 엄청 아펐단 말이야. 니네도 조심해. 

- 장화가 짝아지면 양말은 안 신어야 돼. 그러면 발이 쪼금 아퍼. 

- 야, 니네 내 노란 장화 봤지? 그거 짝아져서 지금은 못 신는단 말이야. 근데 우리 엄마가 지난번에 그거 신고 빨리 학교 가라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내 발가락이 꼬부라지고 엄청 아펐단 말이야. 

- 헐. 장화 짝으면 얼마나 아픈데 그걸 신으라 그래. 와, 니네 엄마 쩐다. 


아이들에게 장화는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갑옷과 같다. 

어른의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불안이라는 빗물을 막아주는 갑옷. 

장차 그 세계를 누비고도 남을 발가락들이 갑옷 안에서 꼬물거리고 있다. 

장화를 신은 아이들은 어김없이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찾아 달려든다. 

물속으로 들어가도 내 발이 젖지 않는 그 순간의 짜릿함을 즐기고 싶어서다. 

그 안에서 흠뻑 바지를 적신 아이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내게 징징댄다. 

마음껏 물장난을 하고 나서 호기롭게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표정에 지질함은 없다.

엄마들도 아이의 젖은 옷을 벗기고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유쾌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옷을 갈아 입혀주는 엄마들이 있는 한, 아이들의 갑옷은 뚫리지 않을 것이다.

엄마라는 갑옷을 지닌 저 아이들. 어찌 비를 안 기다릴까. 



아까 그 아이의 울부짖음이 천기를 움직였을까, 점심시간이 시작되자 비가 쏟아진다. 아이는 점심을 평소보다 빨리 먹는다.

그리고 준비 된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가는 가수처럼 하늘색 장화를 신은 아이가 비를 향해 유유히 걸어나간다. 

비 웅덩이를 향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갑옷 입은 장수 같아 보인다. 

시골 아이들이어서일까,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은 유난히 비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비를 기다린 이유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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