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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20. 2015

장난감의 힘

1학년 아이들과 장난감의 관계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는데 한 아가 마침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를 불쑥 내밀며 명령조로 나온다. 선생님, 이거 라발(장난감 이름) 좀 맡겨(맡아) 주세요. 꼭요. 알겠죠.

척 봐도 제법 비싸 보이는 장난감이다. 와, 이거 어서 났어?

아이는 내 말에 답도 안 하고 무조건 잘 맡아 달라는 말만 몇 번을 다짐하더니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며 운동장으로 놀러 나간다.

얼결에 아이의 장난감을 책임지게 된 나는 이걸 교사 케비넷에 넣어 놓고 교무실에 일을 보러 간다.


잠시 후, 교무실 문을 빼꼼 열고 그 아이가 소리친다. 선생님, 내 라발 누가 갖구 갔어요. 빨랑 찾아줘요.

아, 니 장난감 선생님이 잘 보관해 뒀어라고 말을 하려는데 아이는 벌써 울기 시작한다.

난 허겁지겁 아이 손을 잡고 교실로 와서 장난감을 꺼내 준다. 아이 얼굴에 눈물이 가신다.


아이의 장난감을 본 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다들 부러운 표정이다.

가져 온 아이는 장난감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그걸 듣는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만져보기도 하고 뭐라고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하나 같이 시선은 모두 장난감에 모아져 있다.

잠시 후 장난감을 가져 온 아이가 자기 자리로 가더니 가방에서 뭔가 설명이 적혀 있는 종이를 가져온다.  설명서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설명서로 모인다. 설명서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부품 그림이 빼곡하다.


저 로봇을 가져 온 아이는 며칠  전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와도 되냐고 물었다. 난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한 번 더 물었다. 아, 그러니까요. 정말, 진짜로 가지고 와도 되냐니깐요.

아이가 재차 묻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담임인 내가 가져와도 된다고 하는데도 충분히 안심이 되지 않아서다.

교실로 가지고 오는데 담임인 나 말고, 아이가 또 누군가의 동의를 받아야 할 대상이 있기라도 한 걸까.

아이는 부모에게 로봇을 가져가도 되냐고 먼저 물어 봤을 것이다. 부모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안될 것 같구나. 그런 거 가져가면 선생님이 싫어하실지도 몰라.

그런데 막상 담임은 가져와도 된다고 하니 아이는 의아했을 것이다. 

내가 장난감 가져가는 것에 대해 너희 엄마가 걱정하시지? 물으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걱정하는 건 장난감 때문에 공부가 안될까 봐 그러실 거야. 엄마가 그런 염려를 하신다면 선생님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 쉬는 시간에만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엄마 말도 잘 듣겠다는 말로 엄마를 설득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왜 자꾸 학교에 뭔가를 가지고 오려고 하는가.

아이들이 집에선 안 그러는 거 같은데 왜 학교에서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데 한 눈을 파는가.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새끼 사자가 처음 홀로 초원에 놓였을 때 느낄법한 그런 불안. 당장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1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이런 걸 경험한다.

이 때, 아이들은 자기 존재의 독립을 도와 줄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필요로 한다.

즉, 엄마 대용을 원하는 것이다. 자신과 엄마를 연결해 주는 끈 역할의 그 무엇.

늘 안고 자던 곰인형처럼. 자기에게 익숙한 대상. 그런 구체물이 아니면 엄마 사진을 전화기 바탕화면에 넣어서라도.


엄마 품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을 때까지 오랫동안 맘껏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가기 위해 서너 살, 혹은 그 이전부터 엄마에게 강제로 분리되는 경험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리로 인한 상처는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고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에게 충분히 독립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입학한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학교는 적응과정을 두고 있다. 이 시간엔 집중적으로 담임과 친구, 학교를 알아가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부모 대용으로 담임을, 형제자매 대용으로 친구들을, 곰인형 대신 학교 놀이터에 정을 붙여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교육과정이 모든 1학년 아이들의 성장에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마음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의 깊이에 따라 되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내향적이고 소심하며 분리불안이 큰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에게 필요한 건 아이가 심리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자신을 엄마와 연결해 줄 끈이다.

그런 역할은 담임이나 친구처럼 사람이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감 같은 대체물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런 대상에게  애착을 주고 또 상대로 하여금 인정받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게 잘 안되면 아이들은  불안해한다. 불안은 아이를  성장시키기보다 뒤로 퇴행하고 싶게 만든다.

학교에 와 있으면서도 다시 엄마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울거나 배가 아프다며 아예 학교에 가는 걸 꺼리는 건 이래 서다.

엄마를 떨어져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라고 학교에 보내진 아이들이, 정작 그걸 거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혼자서 살 수 없고, 누군가와 교류하고 의존해야 한다.

이 의존이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 만큼 커지면 문제가 생긴다.

의존은 불안에서 온다. 불안은 인류가 동굴에서 맹수를 경계하던 때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불안을 느껴야 위험을 감지할 수 있고, 그래서 위험을 피해 살아남아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 테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남아 있던 불안이, 더 이상 불안할 필요가 없어진 현시대에도 남아 1학년 아이들을 괴롭히는 지도 모른다.

원시시대 아이와 마찬가지로 요즘 아이들 또한 자기를 지켜주고 외로울 때 의존을 받아 줄 대상을 갈구한다.

다행히 이런 갈구는 구슬을 좋아하는 친구, 혹은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처럼 또래집단 속에 속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인간의 몸이 상황에 맞게 진화하듯 심리 또한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사이에서 불안을 공유하며 잊는다.

그 사이에 엄마와 떨어져 있는 불안감을 서서히 이겨내며 자신이 홀로 관계를 주도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걸 원만하게 해 내지 못하면 또래 관계에 정상적으로 끼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는 성인이 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문제는 의존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출발점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는 이미 어른스럽고, 그래서 분리불안도 별로 없고, 그래서 딱히 의존의 대상을 찾을 필요도 없으니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고 공부에도 애착이 생기고 학교생활도 즐겁다고 느끼는 반면,

어떤 아이는 학교라는 곳은 자신의 존재를 항상 위협당하는 곳이고 친구들이 자기를 놀리거나 괴롭힐 것만 같아서

그런 학교에서 자기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엄마가 항상 옆에서 지켜줘야 하는데

엄마는 자기더러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고 거기다 공부까지 잘하라고 하니 감당이 힘든 것이다. 


이런 아이는 학교에 와 앉아 있어도 공부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늘 주변을 경계해야 하느라 바쁘다.

정작 아무도 이 아이에게 따로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본인이 상황을 그렇게 설정해 놓은 것이다.

아이는 자기가 설정한 불안을 방어하느라 늘 힘겨워한다.

이럴 때 작은 무언가라도 아이의 주머니 속에 있다면, 그래서 아이의 불안과 강박의 마음을 덜어줄 수 있다면, 아이는 숨통이 열릴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수호신으로 담임인 나 대신 장난감을 지정한다.


아이들이 총이나 칼 같은 장난감을 갖고 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흉기류의 장난감은 아이를 폭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1학년 아이들을 보면, 저 아이들은 그저 자기를 지킬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남자아이들이 장난감 칼 가지고 왔을 때, 왜 하필이면 칼이냐고 물어 보았다. 영화에서 칼로 막 싸우면 팅팅 소리가 난단 말이에요. 그럼 멋있단 말이에요. 그럼 나쁜 놈이 도망간단 말이에요. 귀신도 도망가겠죠.

그 귀신이 어떤 귀신이냐고 물어보았다. 비 오는 날, 교실이 깜깜하잖아요. 그때 귀신이 오겠죠.

결국 아이를 학교에 편안하게 머물지 못하게 하는 그 불안한 기운. 아이들은 그걸 무찌르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감에 대해 보이는 애착은 이런 까닭이다. 그러니 내 어찌 감히 장난감을 금지할 수 있을까.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장난감이며 인형을 가지고 오고 싶어 하고, 담임인 나 역시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오지는 않는다. 그런 아이들은 더 이상 의존의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져오고 싶은데 못 가져 오는 아이도 있다. 엄마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임인 내가 된다고 하는데도 허락하지 않는 엄마의 무의식엔 아이의 불안과는 다른 또 다른 불안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가게 되면 그것에 정신이 팔려 공부나 친구관계가 소홀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장난감 가지고 가는 걸  한두 번 하락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아이들의 요구가 더 커질 것이고

그럴수록 엄마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면 사춘기 때 엄마와의 힘겨루기가 힘들어질 일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결국 장난감의 존재가 아이를 성장시킬지 퇴행시킬지 불확실한데 그걸 엄마인 자기는 감당하기가 불안한 것이다.

그 엄마 역시 유년기를 보내면서 어떤 불안을 겪었을 것이다. 아이 또한 그런 엄마에게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나는 아이에게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이에 대한 엄마의 권위를 지켜주고 싶어서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엄마에게 젖을 먹고 생명을 의탁하면서 강력한 의존관계가 만들어진 채 자라다 학교든 유치원에든 갈 나이가 되면

그 전부터 서서히 엄마에게서 아이의 삶이 분리되기 시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준비 없이 아이들이 갑자기 엄마에게 분리되면서 아이들은 불안을 겪게 되는데,

이 때 아이는 자신과 엄마는 비록 떨어져 있지만 엄마와 자기를  연결해 줄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분리불안이 큰 아이, 그래서 상대적으로 독립의지가 적은 아이일수록 이런 물건에 집착한다.

독특한 핸드폰 고리, 딱지, 만화영화 캐릭터 같은 수호신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 아이가 더 자라 사춘기가 되면 장난감 대신 이성친구에게 의존한다.

그마저도 안되면 자기가 의존할만한 친구들을 찾아 그 관계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느라 사춘기의 화려한 젊음을 즐기지 못한다. 공부 또한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런 상태로 어른이 되면 또 그 의존의 대체물이 배우자나 자식으로 치환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배우자보다 통제가 쉽고 만만한 자식에게 집중된다.

그래서 자식의 모든 걸 통제하려 한다. 물론 사랑, 또는 모성애라는의 이름으로.

자식이 자기 뜻을 따르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는다. 의존은 그래서 집착의 다른 말이다.


불안과 의존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이 극복되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아이는 놓여나지 못한다.

술, 담배, 도박, 성욕처럼 가면만 바꿔 쓴 의존 대상들은 주인공을 더 이상 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혼자 골방에 있게 만든다.

평생을 홀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는 상태로 어른이 되어 부모가 되었을 때, 그런 부모를 둔 자식은 무슨 죄일까. 그 아이들의 삶은 어쩌나.


수업이 시작되자 아이는 장난감을 소중히 들고 와서 교사용 책상에 올려 놓았다.

공부시간엔 장난감에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약속은 제법 지켜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가끔, 아이가 나의 설명을 듣는 대신 장난감을 멍하니 쳐다보는 경우도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장난감을 치우게 하거나 다시는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게 맞지만, 모른 척 한다.

장난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아이의 명예를 왠지 지켜주라고. 난 아이를 지적하는 대신 아이 근처로 가서 장난감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와, 이거 엄청 멋있는 장난감이네. 정말 멋지다. 이거 있으면 선생님은 하나도 안 무섭겠네.


저 아이의 의존을 달래 주는 건, 그래서 어서 어른으로 자라게 해주는 건, 담임인 내가 아니라 장난감 같았다.

저 아이는 지금 엄마에게서 자신을 분리해서 또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나는 중이다.

엄마 손을 잡고 세상 속으로 걸어나가다 이제 엄마의 손을 놓고 혼자의 힘으로 홀로 서는 과정에서 아직 다리의 힘이 모자랄 때, 저 장난감은 다리의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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