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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Nov 19. 2015

그림일기를 쓴다는 것

아이의 삶을 기록하는 방법


목과 코, 귀, 눈동자가 없고 손가락과 발이 없는 그림.
아직 사물에 대한 인지력이 덜 발달된, 전형적인 1학년의 그림이다.
아이가 색칠을 한 것과 하지 않은 부분을 보면
아이가 현재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인다.

1학년 아이들은 그림일기를 싫어한다. 힘들어서다.

그래서 정작 일기에 들어가야 할 내용 대신 자기가 그리기 쉬운 내용을 골라 쓰기도 한다.

일기의 본래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글씨가 서툰 아이들이 그림으로라도 자기 삶을 기록하는 게 그림일기다.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자기 삶의 기록인 것이다.

그림일기를 쓰라고 하면서 그림을 가득 채우라고 하거나

심지어 바탕까지 칠하라는 요구가 1학년 아이들에게 왜 폭력일 수 있는지는

아이들이 이걸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보면 안다.

그 지경이면 아이들에게 일기쓰기는 힘든 노동이 된다.

힘들게 써야 하는 일기를 누가 좋아할까.

결국 아이는 일기 뿐 아니라 쓰는 것 모두를 싫어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그림에 치우쳐 칭찬을 하면 아이는 그림이 될만한 내용 위주로 그림일기를 쓴다.

어떤 부모는 그림일기를 위해 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내기도 한다.

그림일기를 잘 해서 담임에게 칭찬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것이다.

다행히 그 아이가 미술을 좋아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아이라면 일기가 얼마나 고역일까.


그림일기에서 아이는 숫자와 글자를 혼용하고 있다.

그림만으로는 자기 삶이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아이들은

그림으로 그리다 미처 그리지 못한 이야기들을 글로 쓴다.

하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글씨 또한 제한적인 까닭에 글로도 기록하지 못한 삶은 내게 말로 해 준다.

어제 개에게 밥을 줬는데요, 이름이 홍순이고요.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에요.  묶여 있어요.

난 아이들이 말로 해 주면 그걸 받아서 써 준다. 나중에라도 자기가 기록한 삶을 이해하라고.

아이가 글씨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5월 14일.

개에게 밥을 주었어요.

우리 집에는 강아지 이름은 홍순이입니다.
홍순이는 장애인이에요.
사람처럼 말을 못하니까 장애인이죠.
홍순이는 여자 강아지예요.
홍순이는 제 말을 잘 안 들어요. 

어떤 땐 저 보고도 막 짖는다니깐요.
홍순이는 줄에 묶여 있어요.

그래서 밥그릇을 집 안에 놓아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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