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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zi Apr 20. 2022

013.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글은, 결국 쓰는 것(Writing)에 대한 글이 되었다.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계약한 시간 대비, 쏟는 시간과 감정적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꼼꼼한 편이라 ‘이렇게 해도 되나?’하는 의문점들이 마음속에 많다. 그럴 때마다 동료나 상사에게 확인받은 뒤 추진하고 싶은데, 매번 그러기에 혼자서 이 정도도 판단 내리고 결정 못하는 의존적인 사람으로만 비칠까 봐 겁이 난다. 또는 너무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두렵다. 더군다나 솔직히 이야기하면 사람한테 연락하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장단을 맞춰 스트레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내 시간과 생각, 감정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할 상 이런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매번 마주친다. 내 첫 직장에서도 그랬다. 그때는 이벤트/프로모션 PD 였는데 강한 성격의 팀장님을 모시고 업무를 진행했다. 팀장님과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하는 것들은 재밌었다. 문제는 그 이후, 이 일들을 업체에 넘겨주며 계속 소통하고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내 선에서 일단 할 수 있는 굵직한 사항들은 전달을 하고 업체 사장님을 믿고 기다려보자 했는데 기한 안에 처리되지 않거나 혹은 중간중간 생각이 바꿔 변경사항들을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것들이 너무 건건이라 내가 다 기억하고 전달하기에 벅차기는 했지만, 문서를 만들거나 전화를 하며 여러모로 애써 노력해보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상대방에게 일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면서 ‘이 사람이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떡하지?’, ‘우습게 알면 어떡하지?’, ‘날 귀찮아하면 어떡하지?’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찬다. 이런 생각이 어떤 감정을 몰고 오겠는가? 후회와 자괴감, 자책 가득한 감옥을 만든다. 안 그래도 여기, 저기서 내리는 지령들로 일들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는데 이런 생각과 감정까지 더해지니 내 상태가 어떠했겠는가? ㅠㅠ 나와 같이 일했던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하루는 나한테 와서 그랬다. “우리가 집에 가면서 그런 얘길 했어요... 왜 쏭 누나는 멀티가 안되지…?”. 이미 나는 나보다 몇 살 어린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에게도 간파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하는 나는 언제나 어딘가 모자라고, 불안하고, 불분명하고 그렇게 불쌍한 누군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나를 계속 견디기 어려웠고, 때마침 29살을 맞아 내 삶을 내가 주도하고 싶어졌다. 결국 2년 만에 퇴사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있었다. 이후에도 종종 이때 같이 일했던 팀장님을 만나곤 했는데, 그 팀장님은 나랑 일했을 때 참 좋았다는 거다. 그리고 나보고 일을 잘했다고 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그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주저리 이야기하면, 그건 처음 그 일을 접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다 겪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그렇게 안보이던데?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내가 다르니 좀 혼란스러웠다.


그러고 난 뒤,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교회를 통해 의료봉사 NGO의 간사를 맡게 되었는데, 재밌게도 이때 나는 다시 예전의 모습과 비슷한 역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료진들, 봉사자들, 관련 교회 분들을 관리하고 필요를 충족시키며 활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물론 직업은 아니라 봉사가 이뤄지는 날이 가장 바빴지만, 그래도 틈틈이 필요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종종 긴장을 타며 있어야 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것은 싫었다. 그렇지만 내 공부와 활동이 어우러지며 묘하게 균형을 잡아 나가는, 새롭게 펼쳐진 이 삶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꼈다. 때로 보람도 느꼈다. 이 일은 4년 정도 계속했다.


이후 나의 정체성은 예술치료사로 보다 공고해져 갔다. 한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 전속 치료사로 소속되어 비교적 꾸준히 일을 할 수 있었다. 2년 동안에는 대전에서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때 이전의 나처럼 ‘간사’의 역할을 하는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일했다. 나에게 그 일이 얼마나 부담이었고 버거웠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를 얘기하면 해결해주었던 그들이 너무 고마웠다. 당시 종종 다른 사람들은 자기 지역 스텝들과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해 맞춰주는 게 더 편한 데다가 같이 일했던 분들도 굉장히 잘 맞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대전에서의 2년을 지금도 행복하게 추억하고 있다.


이렇게 다져진 나의 정체성을, 4년 뒤 나는 스스로 흔들어 놓았다. 지금 보니 그렇다. 한 사업에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있으니 뭔가 지루해졌고, 발전이 없게 느껴졌다. 마침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허파에는 외국에 대한 환상과 바람이 가득 찼다. 그래서 콜롬비아에 해외봉사단원으로 갔다. 즐거웠고 괴롭기도 했던 2년간의 첫 해외 살이 생활이 끝날 때 즈음, 나는 뭔가 프리랜서로 흩어져 있는 치료사들의 허브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그런 생각이 머리와 마음에서 돋아났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외봉사단원으로 현장에 있으면서 때로는 나 자신이 무용지물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는데(언어도 안되고 문화도 어렵고 등등의 이유로…),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악을 써서 세운 뜻 혹은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한국에 와서 복귀를 하고 난 뒤, 나는 우연찮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사업의 연구개발 전담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아, 그때는 가슴이 뛰었다. 가까웠던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도 했다. 원서를 냈고 면접을 봤다. 나는 조직으로 다시 들어왔고 다시 ‘간사’가 되었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의 지금은 이러하다. 현재 나는 치료사 일은 접었다. 처음에는 치료사와 간사 업무 두 가지를 병행했다. 하지만 둘을 함께 하니 스트레스가 점차 쌓이고 치료사 일에 집중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주 2일 간사로만 살기로 했다. 그러면 삶은 더 가뿐해졌는가? 아니. 주 2일을 주 5일로 늘여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정신이 종종 매여있는 경우도 있고, 업무추진이 늦어지면 나중에 큰일 날까 봐,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면 더 힘들어질까 봐 자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일 하고 있는 나를 보기도 한다. 간사로, 연구원으로, PM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뭔가를 보조하는 건 비교적 편안하지만 때때로 진행을 하거나 리드하는 역할을 맡을 땐 참 불편해한다. 내가 내 역할을 확실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번에 영상팀과 일을 같이 하면서, 지난주는 일의 속도와 생각했던 업무 추진 방식이 달라 이를 수습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내가 할 말을 제대로 못 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좌절이 컸다. 확인되지 않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눈치도 엄청 본다. 나는 이렇게 다시 마음고생의 산을 스스로 만들어 힘겹게 짊어지고 있다.


글 초반에 내가 내린, 나에 대한 정의를 다시 꺼내본다. 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 이렇게 자기 시간도 못 지키고,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크고 작은 일과 피드백에 휘둘리는 나는 서툴고 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잠깐, 그런데 또 생각해본다. 갑자기 떠오르는 다른 업체와의 경험들. 처음에 같이 업무를 시작했을 때 그때도 뭔가 남모를 마음의 어려움이 많았다.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 불안해지고 하는 위에 쭉 적은 그런 비슷한 류의 걱정과 고민들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쪽 업무 담당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만큼 어렵지 않다. 서로 답답한 순간들도 많이 겪었고, 어찌 되었든 확실하게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믿음도 있어서 내가 좀 이상한 짓을 해도, ‘에휴, 뭐 어쩌겠어. 다음번에는 제대로 전달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비교적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스트레스들도 결국 이 업무, 업체와는 처음이라 자연스럽게 오는 시행착오 혹은 성장통일까? 이것도 계속 서로 스치다 보면 생긴다는 신뢰의 굳은살 징조인 걸까? 아니면, 살면서 스스로 이와 비슷한 역할을 여러 번 선택해 왔으나, 거 봐라, 40이 넘어도 여전히 너는 이런 고통을 받고 있지, 그러니 이 길은 네 길이 아니니 물러나라 하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류의 신호인 걸까? 휴우우…. 내 직관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어서 다시 글을 돌아본다.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하다. 나는 부족한 역량을 보완하려고 최선을 다해 미국에서도 밤낮 가리지 않고 누군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노력하며 애쓰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자기 시간을 못 지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기에 결국 상상했던 파국적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닌가?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경험이 하나 있다. 첫 직장을 퇴사하기 전, 청계천 광장에서 1일 프로모션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새벽까지 무대도 점검하고, 각 부스들도 점검하고 다 했는데 정말 지옥 같았다. 어떤 부스는 인쇄한 현수막이 크기에 맞지 않아 문제를 해결하라는 날카로운 호통을 듣고 새벽에 인쇄소에 다니는 이모에게 울며 전화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아침이 되니 더 큰 건을 발견했다. 무대가 좀 높았는데 세상에.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는 것이다. 디자인 회사 실장님도, 우리 쪽 직원도 너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사회자는 비품을 넣어두는 무른 종이 상자를 밟고 올라가 시간 내 행사를 마무리해줬다. 그래, 상황이 어려워도 임기응변으로 해결하며 살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도 지금 아무 문제없이 괜찮다.


그렇다면 이 글은 나의 완벽주의 성향이 자신을 잊거나 무시하지 하지 말고 계속 주목해달라며 악을 쓰며 매달리는 목소리의 기록. 완벽주의는 스스로 괴로웠었나 보다. 이해받고, 인정받고, 동정과 관심 그리고 연민과 사랑이 필요했었나 보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주저리 쓴 글이 나에게 가치가 있는가? 물론이다. 쓰고 나면 비로소 보이니 말이다.


비온 뒤 무지개 처럼, 쓰면 비로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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