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불이 날 뻔했다
어떻게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어제는 재택근무하는 날이었다. 몇 주 뒤면 출산에 들어가기 때문에 업무를 이어받는 담당자에게 그동안 진행되었던 일들과 앞으로 진행될 일들을 인수인계해주는 회의가 잡혀있었다. 같은 시간 남편은 사촌 형과 함께 부엌에서 뭔가를 고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문, 방문을 모두 닫고 일을 했다.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 나눌 이야기들도 많았고 알려주고 공감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평소 같으면 1시간 정도로 마무리되는데 어제는 3시간 정도 마라톤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간에 밖에서 삐이삐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거슬렸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밖에서 일하다 나는 소리이겠지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도 먹지 않고 쉼 없이 말로 달린 뒤 중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깨끗한 거실과 주방이 눈에 보였다. 형부는 이미 일을 마치고 댁으로 돌아가신 뒤였다. 코에는 알싸한 연기 냄새가 났다. ‘난 밥도 못 먹고 일했는데… 이 사람들 나 몰래 맛있는 거 먹었나? 좀 가져다 주지. 무슨 훈제 스테이크 이런 거 사 먹은 거 아냐?’하는 섭섭함이 들었다. 심술 섞인 걸음으로 냉장고에 가서 문을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남편에게 물었다. “저녁 뭐 먹었어?” 그랬더니 돌아온 말. “불날뻔했어…”?!!
상황은 이랬다. 내가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남편과 형부는 필요한 게 있어서 잠시 외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가면서 전기레인지 위에 뭘 올려놓고 나갔던 거다. 시간이 지나 냄비 안 음식들이 졸아들고 타기 시작하면서 집 안에 연기가 자욱해졌다. 담배 연기 한 껏 머금은 흡연자의 입 속처럼. 더 아찔 했던 것은 그날따라 남편과 형부 둘 다 스마트폰을 두고 나가셨다는 거다. 남편 집 레인지 위에는 안전 카메라가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문제가 생겨도 스마트 폰으로 확인하고 외부에서도 곧바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같이 있었던 우리 집 반려견 누렁이는 낌새를 챘을 것 같은데… 이것도 타이밍이 참 그랬다. 어제 이야기하는데 누렁이가 계속 내 옆에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보챘다. 원래도 그렇기는 한데 어제는 유독 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렁이를 방문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니 그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나만의 세상에 빠져 살았던 것이다.
뒤늦게 내가 본 상황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상태였다. 불도 꺼졌고, 문제가 되었던 그릇도 옮겨져 있었고, 그을렸던 부분들도 말끔히 닦여 있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경보음 소리를 듣고 밖에 나와봤으면 어땠을까? 일찍 나왔으면 상황을 빠르게 확인하고 불을 껐을 것 같다. 늦었다면? 부른 배를 부여잡고 이미 연기 자욱한 부엌을 뚫고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진 못했을 것 같다. 일단 뒷 문으로 누렁이와 함께 도망쳐 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폰을 들고 가지 않았다고 하니 연결은 되지 않았겠지?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혹시 남편과 형부가 그 안에서 질식하지는 않았을지 무서워서 고래고래 소리쳤을 수도 있겠다. 한국 로밍폰으로 911에 연락을 했을 수도 있다. 급한 마음에 맨 발로 소방서로 뛰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와중에 나 자신에게 너무 놀랐다. 평소에 그렇게 예민하다 유난을 떨면서, 이렇게 큰일이 바로 코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나와 훈제 스테이크 운운했던 것 아닌가? 이렇게 무심하고, 이토록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줄이야!!! 맘먹고 하나에 꽂히면 이렇게도 상황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어 나 자신이 무서웠다. 철석같이 밖에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일상은 의심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돌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커다란 착각, 그리고 환상이었다.
여러모로 어제는 타이밍이 모두 맞지 않았다. 큰 일 나려면 정말 큰 일 날 수도 있었던 저녁이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론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았다. 상황은 겪었으되,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긴장감을 갖고 911을 기억하고, 전기레인지에 대한 경각심, 스마트폰을 항상 휴대하고 다닐 것 등등 평소 지킬 기본 수칙을 다시 상기했다. 나 역시 감각을 좀 더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맡기기보다, 나 자신과 내 생활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확인하고 습득하며 조금씩 익숙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