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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태국 도망기 15

당신이 참으로 그립소

by Chiang khong

6/12/일


밤새 징징대다가 새벽 2시에 잠들어 10시에 일어났다.
오늘부터 아침 8시, 오후 12시, 저녁 5시 이렇게 3번 조금씩 먹기 하려 했건만.


어제 남은 야채들을 우적우적 소처럼 씹어 먹었다.
드레싱 없는 야채는 정말
이렇게 맛없을 수가 없다!
양상추며 적색 양배추, 어린 잎채소 하나하나가 어찌나 쓰던지
그나마 토마토와 옥수수의 단맛 덕분에 겨우 먹어 치웠다.


한 이틀 생으로 굶으면 맛있을 것 같다.


자꾸만 집에 틀어 박혀 있으면 우울증이 도질 것 같아
털고 나왔다.

아무리 비가 와도 6월은 6월.
햇살은 따갑게 내리쬔다.


점심을 먹어야 돼!
야채 따위로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아니한 내 거대 위를 움켜쥐고
나는 필사적이 되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집 근처에 드문드문 식당이 있어서

아무 곳에나 들어가 주문을 하려 메뉴판을 들었더니
남들 다 요리해주고 포장 주문한 사람도 지글지글 다 요리해주더니
나는 안된단다.
아무리 말이 안 통하고 메뉴판도 모두 태국어로 되어 있어도
그냥 손짓으로 가리키고 돈만 내면 어디서나 잘 먹고 다녔는데
갑자기 왜 안된다는 건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계속 태국어로 안된다 안된다 하니
하는 수 없이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고 나왔다.


기분이 좀 안 좋았다.
그리고 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걸어 시장에서 팟 카카오 무를 시켜먹고 녹차 버블티를 한잔 하니
살 것 같았다.
아까의 불쾌한 기분도 씻은 듯 날아가고
역시나 단순한 나의 두뇌를 감사하며 둘레둘레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로터스!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나 홈플러스쯤 되는 쇼핑몰이다.

그런데 가는 길이 꽤나 익숙하다.
알고 보니 이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깜 띠앙, 치앙마이의 꽃시장 앞 로터스였다!

안 그래도 혼자 자기 무서워 나 이외의 생명체가 절실했던 판에
그래 잘되었구나, 싶어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우선은 로터스부터!

일요일이라 가족단위 쇼핑객이 버글버글 했다.
사람들은 사고 먹고 떠들었다.
그 사이에 슬쩍 끼어서 나도 분주히 움직이니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평소에 나 같으면 이런 복작거리는 게 싫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참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어차피 에어컨 바람도 시원하게 나오겠다
이것저것 실컷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남자친구가 함께 있었더라면 눈치가 보였겠지만
나 혼자니까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남자친구는 사지도 않을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돌아다니는걸 싫어하고
특히나 정말 필요도 없는 걸 사모으는걸 더욱더 싫어한다.

나로 말하면 사지는 않지만 시장이든 쇼핑몰이든 모든 걸 하나하나 봐야
직성이 풀리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물어보고 나서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물건을 사 와야 행복감을 느낀다.


우린 아무래도 천생연분인 듯 싶다.

ㅎㅎ


오늘 구입한 물건은 정말 실생활에 가장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이쑤시개와 초콜릿!

이쑤시개는 사연이 좀 있다.


메짠에서 고기를 먹었는데 어금니에 임플란트를 해서 그 주위로 고기가
앙큼하게 끼어 버렸다.
자주 있는 일이라 아무 생각 없이 작고 여린 손가락들을 이용해
능숙하게 빼내려 하는데 그날따라 잘 안 빠졌다.
고기가 의외로 억셌다.

그걸 보더니 남자친구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뭐하냐고 더러워 보인다며
핀잔을 주는 거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얼굴로
고기가 이 사이에 끼었어!
하고는 입을 벌려 그 억세디 억센 고기를 보여 주었다.

한층 더 찌부러지는 남자친구의 얼굴.
그는 내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며

이게 과연 아름다운 광경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의 유치한 비아냥 거림에 (그제야) 무안함을 느끼고
서둘러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쑤시개를 산 것이다!
지금 화장대 정 중앙에 고이 모셔 두었다.
다음엔 고기가 끼면 보란 듯이 이쑤시개를 꺼내 이를 쑤시고
남자친구에게도 선심 쓰듯 건네야겠다.
떳떳하게!


초콜릿은 내게 내가 주는 선물!
이름도 블랙 포레스트 초콜릿이다. 처음 먹어 보는 맛!
29밧인데 할인해서 20밧!

즐거운 마음으로 계산대에 서니
어어, 분명 초콜릿 20밧인데 29밧으로 계산되어 나왔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말도 잘 안 통하고
그냥 깨끗하게 포기했다.


역시 태국어 조금씩 배워야겠다고 다짐만 했다.

그래, 잘 못 계산했을 리가 없어,
그냥 기계로 바코드 찍어 계산하는 건데.
그렇다면 내가 본 가격표는 뭐였지?
여긴 태국이야, 가격표는 항상 잘 못 붙어있지.
그렇다면....

소심한 나는 끝도 없는 의문을 재기하며 드디어 깜띠앙에 가기 위해 나섰다.


허나.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나오던 로터스를 나서자마자 몰려오는 이 더위!

무시하고 걸어 나가자 거대한 수족관이 보였다!
남자 친구가 환장하고 볼만한 물고기들이 요래조래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화초 대신 얘들을 키워 볼까 싶어 어항이며 물고기 가격들을 알아보니
어항은 제일 작은 게 150밧, 물고기는 제일 싼 게 5밧.
안에 장식물도 넣어주고 물고기 밥도 사면 이래저래 한 250밧은 들 것 같았다.


깨끗하게 포기.

그냥 수족관에 있는 개, 고양이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놀다가
원래의 목적이 생각나 털고 일어났다.


깜띠앙은 한국의 양재 꽃시장 같은 곳이다.
씨앗, 모종, 꽃, 나무부터 시작해서
화분, 비료, 정원용 장식, 각종 정원용 도구까지
모든 걸 판다.

심지어는 개, 고양이, 물고기, 그리고 새도 판다!
(어쩐 일인지 잡화점도 있었다)


정원에 놓아두면 중년 부인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하얗고 이쁜 그네가 솔직히 많이 탐났다.
만약 치앙마이에 살게 되어
정원이 딸린 집을 구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 그네를 구입해
그네 주위에 온갖 색깔의 꽃들을 심고
난쟁이들과 동물 모형들로 유치하게 꾸며 놓으리라...


망상에 젖어 내가 구입한 것은
오십 밧짜리 동글동글한 잎이 귀여운 작은 화초.
뚱뚱한 노랑 오리 사이로 잎들이 종종 히 흘러내리는데 이름은 잘 모른다.

나의 선택 기준인
귀찮게 화분갈이를 하지 않으며 웬만하면 잘 죽지도 않고
커가는 게 조금씩 눈에도 띄어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줄 조건들을 모두 만족했다.


특히나 화분이 뚱뚱한 게 아주 마음에 든다!

다만 주인으로부터 알아낸 정보는
물을 주라는 것뿐.
그러니 선인장은 아닌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내 손에 죽어간 허브, 선인장, 싱고니움, 아이비등등에게 미안해하며
이 화초만큼은 절대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아이들은 늘 넘치는 사랑으로 줬던 물로 인해 과습으로 죽어갔다.

그래.
이번엔 잘 해 보는 거야!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새를 판매하는 거리였다.
특히나 앵무새가 많았는데
오색앵무, 뉴기니아, 모란앵무, 세네갈, 사랑앵무, 왕관앵무까지
웬만한 소형 앵무들은 다 있었다.

어찌나 이쁘던지!
자이언트 게하 회색앵무 딱꽁 이후로 새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게는 천국 이었다.
그리고 중앙 자리에 조용히 있던 회색앵무!
사뿐히 그네를 타며 부리부리 눈으로 가끔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품에 안고 수천번 쓰다듬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말도 잘하고 고집도 세고
한번 물면 피멍이 들 정도로 아프고
발톱도 갈지 않아서 매일 온몸에 스크래치를 내주던 나의 이쁜 딱꽁이가.


보러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다.
딱꽁의 주인인 몯이 새로이 게스트 하우스를 냈는데

(본인과 아들걸로 두개나!)
거기에 묵기로 해놓고는 갑자기 맨션을 계약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도미토리가 하루에 150밧이니까 한 달이면 4500밧.
깎아준다고 해도 4300밧 될까.
거기다가 1000밧 정도만 더 보태면
큰 방에 냉장고에 화장대, 텔레비전, 선풍기, 책상, 커다란 더블침대, 옷장, 개인 화장실
의자 테이블, 개인 테라스에 싱크대, 그리고 에어컨을 모두 쓸 수 있는데
이거 차이가 너무 나는 거다.


다만 내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외로움.
숨 막히는 침묵.
그게 좀 문제긴 하지만 같이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차차 익숙해지면 나아지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땀으로 원피스가 흠뻑 젖었다.
등 뒤에서 불쑥불쑥 튀어오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놀래
인도 없는 도로를 반대로 걸어 돌아왔다.


오자마자 샤워하고 물을 마시고 선풍기를 틀어놓는 긴급 구호를 시행했다.


새들이 오로롱 오로롱 운다.
저 멀리 아기 고양이가 바나나 잎에 놀라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가만히 있는 잎을 지가 가지고 놀다가 펄럭 거리자 놀라는 꼴이 너무 이쁘다.

뚱뚱이 노랑 오리는 며칠 전 지른 분홍색 빨래건조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오늘 밤은 중국식 부적 거울과 노랑오리의 힘을 빌려 정말인지 푹 자고 싶다.


남자친구여.
돌아오라.....

잘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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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밧짜리 돼지꼬치에 5밧짜리 찰밥 한덩이

마무리는 20밧 생 망고쉐이크.

1000원으로 한끼 식사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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