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태국 도망기 17

사람과 만나다

by Chiang khong

6/15/수


무작정 집을 나선 시각은 12시쯤.


밤새 잠을 뒤척이다 새벽 6시쯤에야 겨우 잠든 후였다.
요구르트와 사과, 파인애플을 먹고 집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1밧 체중계에 올라서니
세상에!!!!!!!!!!!


66kg!!


굶다시피 한지 8일 만에 3kg 가 훌러덩 빠져 버렸다.
몸을 꾹꾹 누르며 어느 부위가 어떻게 빠졌나 확인했다.
얼굴도 나름 갸름해진 것 같고 울퉁불퉁했던 등살도 조금 편편해진 것 같고.


역시 조금 먹는 게 최고구나!

신이나서 남친에게 보여주려고 증거 사진을 찍었다.


자, 오늘은 어디로 갈까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 대니

이곳은 바로 창뿌악 버스 터미널이었다.


집 근처에 버스 터미널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 심심할 때마다 시외로 나가고 싶으면 남친 도움 없이
여기서 썽태우를 룰루랄라 타면 되겠구나 싶어 또 한번 신이났다!


하지만 나는 태국어를 모른다.
저번처럼 아무 썽태우나 잡아 타고 있는 사람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서
그곳에 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알아낸 곳이 항동과 람뿐.
꽤 쏠쏠하게 잘 타고 다녔다.

인터넷에 가서 좀 더 정보를 캐봐야겠구나 마음먹은 뒤
정말 아무 썽태우나 덥석 잡아 탔다.


운전사가 부리나케 뛰어와 묻는다.
할 말이 없는 나는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가 씨익 웃는다.


-와로롯?
으레 중국인 관광객으로 오해받는 나는 다시 한번 씨익 웃는다.
-네! 와로롯이요!

해서 예정에도 없는 와로롯에 오게 된 것이다.


와로롯 마켓은 치앙마이에 있는 큰 재래시장이다.
옷, 과일, 잡화, 옷감과 화장품 가게도 여럿 있고
특히나 고산족들이 한 땀 한 땀 만든 수공예품도 많이 판다.

작년에는 심심하면 이곳에 왔기에 아주 우리 동네 사당 1동 시장만큼이나
훤하다.
너무 잘 아니 이제는 볼 것도 궁금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와서 기웃기웃 대는 것이다.
다들 잘들 있나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나올 때면 뭔가가 꼭 손에 들려있다.


오늘은 드림캐쳐.
요새 잠도 잘 안 오는데 드림캐쳐를 만들면 아주 잠이 솔솔 올 것만 같다.

돌아오는 길은 항상 어디서 썽태우를 잡아 타야 되는지 몰라서
미 대사관과 맛무앙 과일 야채 시장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구린 발음으로 신나게 라짜밧,라짜밧을 외쳐 겨우 한대 잡아 타고 오니
3시가 넘어간다.


집 근처 20밧짜리 오믈렛 가게에서 포장을 주문하니
아저씨는 아무리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쳐도 웃으며 국을 싸주시더니
그만 수저는 잊어 버리셨다.
하는 수없이 손으로 밥을 조용히 퍼먹고는 아 잠이 솔솔 오는구나
싶어 침대에 늘러 붙는 그 순간!


띠링띠링~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왔다!

-준비 다 됐어?

준비?
준비라니... 무슨?


소짱이었다.


며칠 전 소짱은 수요일 700주년 기념 경기장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 소식을
넌지시 알렸다.
나는 집 근처 치앙마이 체육관인 줄 알고 흔쾌히 가마 했는데
알고 보니 저~멀리 대중교통의 사각지대인 치앙마이에서
썽태우를 대절하기 전에는 갈 수 없는 700주년 기념 경기장이라는 게 아닌가.

만약 네가 나를 데려다주지 않으면 나는 갈 수 없다 라고 한 수 던지자
돌아오는 묵묵부답.
아. 그럼 뭐... 하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고 이것은 무언의 거절이다
라고 알아듣고는 끝나 버렸는데
준비라니?

그가 말한 알았어 의 뜻이 바로 그래 내가 너를 데려다 주마, 인심 한번 쓰마
의 뜻이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씻지도 않고 대충 양치만 하고 와로롯 다녀와서
오믈렛 손으로 퍼먹고 그 손도 슥슥 대강 휴지로 닦고
한 마리 개처럼 퍼질러 잘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갑자기 이게 무엇이더냐!

나는 10분 내로 가겠다는 그의 말에 정신없이
떡진 머리를 모자로 가리고 세수를 하며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거대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었다.


옳거니.


마음 한켠 아쉬운 마음도 있었으나 뭐 이렇게 된 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 삼아 잠이나 퍼질러 자야지
(이러므로 내가 밤새 잠을 설치는 거다, 이놈의 초저녁 잠!)
하다가 혹시 몰라 싶어 신나게 샤워를 하니 비가 그친다.

부리나케 내려가 기다리니 온다던 소짱은 오지 아니하고
그렇게 물고기랑 놀다 새랑 놀다 올라오니 지금 왔단다.

아아... 어찌하면 이리 타이밍이 딱딱 맞아 떨어진단 말입니까!

다시 내려가 보니 그가 묻는다.
남자친구는?


소짱과 나 그리고 남자 친구는 모두 자이언트 게스트하우스 동기생이다.
내가 먼저 와 죽치고 있었고 7월 10일쯤 소 짱이 7월 말쯤 남자 친구가 왔다.
소짱은 영어와 태국어를 동시에 배우며 알차게 치앙마이에서 살다가
그만 타 장기 체류자가 그러하듯 푹. 빠져 버렸다.
해서 미얀마로 라오스로 일본으로 가끔씩 오가며 비자를 받아서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남자 친구가 치앙마이로 돌아온 것이다.


-남자 친구는 미얀마에 갔어. 18일쯤 온대.


일본에서 최신 유행 스타일로 다듬었다는 2:8 가르마를 말없이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축구팀 유니폼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깨끗한 양말과 운동화.
가지런한 머리와 반듯한 안경.
소짱은 정말인지 모범생 같았다.


우리는 헬맷도 쓰지 않고 도로를 달렸다.
게임 시작이 6시라는데 이미 6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헬맷도 안 쓰는 거 보니 태국인 다 되었다고 내가 놀리니
(사실은 내가 헬맷이 없어 불안했다, 내가!)
그는 멋쩍은 듯 깜빡 잊었다고 한다.


스마트폰의 도움으로 700주년 기념관에 들어서자
의외로 멀리서 함성 소리가 힘차게 들려온다.

사람이 많다.
부랴부랴 티켓을 80밧에 끊어 들어가니
저 멀리서 외국인 할아버지와 태국인 할아버지가 소짱을 반긴다.


우리는 커다란 북을 두드리며 핏대를 새우고 소리를 질러대는
응원석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경기는 치앙마이팀과 타 도시 팀.
사실 나는 스포츠엔 영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사람!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밥을 먹고 싶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엄청난 사람이 둘러싸고

어마어마한 소음이 들려오는 곳에 앉아 있으니
나의 미치도록 고요한 방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아이구야.
이놈의 변덕!
부글부글 죽 끓이는 이놈의 변덕!


오래간만에 실컷 대화도 나누니 살맛도 나고
해서 음료수도 마시고 튀긴 어묵도 먹으며
간간히 터지는 골에 응원도 하니 훌쩍 9시가 넘어섰다.

경기는 페널티킥을 5번이나 하고서야
5 대 4로 치앙마이 팀이 이겼다.


치앙마이에서 호텔을 한다는 태국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며
18일에는 더 큰 게임이 열린다고 꼭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자.
밥이나 먹으러 갈까.


소짱의 제안에 나는 그럼 치앙마이 게이트로 가고 싶다고 했다.


보고 싶었다.
작년 7개월이나 머물렀던 자이언트 게스트 하우스가 나는 참 보고 싶었다.


도착하니 아무도 없는 시커먼 건물은 소름 끼치는 폐가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밤새 파티하며 웃고 떠들고 요리를 해 먹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야말로 매일매일 드라마를 찍어대던
모두의 게스트 하우스가 며칠 만에 이토록 변할 수 있다니.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하는구나.
새삼 느끼며 돌아서려는 찰나.
소 짱이 문을 열었다.

한번 열리나 해서 열어봤는데 그냥 열리니 이거 구경이나 해볼까 싶은 마음에
시커먼 어둠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갔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 들어가 보니
소파며 컴퓨터 생활 집기들이 빠져나간 곳은 그냥 쓰레기장 같았다.
녹조가 시퍼렇게 낀 어항속 물고기가 생각나
아직도 있나 싶어 살펴보니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허무해진다.
이렇게 버려져 버린 모습이 거짓말 같아 그만 허무해진다.


우리는 그냥 나오기로 한다.
그러다 발견한 도자기 모빌!

작년 깜띠앙에서 내가 20밧 주고 샀는데 집에 가져갈 수 없어
나뭇가지에 걸어놨던 물고기 모빌!
애처롭게 여전히 걸려있다.

저거 저거!
까치발로 내가 가리키며 안타깝게 손을 휘저으니
친절한 소 짱이 도와준다.


누가 이토록이나 꽁꽁 싸맸단 말인가!


마침 가위고 뭐고 자를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소 짱이 라이터로 지져서 불꽃 비를 맞으며 겨우 풀었다.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내가 고마워 고마워 를 연발하며 받아 들자 마자
툭.
라이터로 지져서 간당간당한 손잡이가 불에 타 툭.
도자기라 와장창 깨지고 우리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고맙다가 갑자기 네가 라이터로 지져서 이렇게 되었다로 바뀌려는 찰나.
정신을 차리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근처 치앙마이 게이트 야시장에서 30밧짜리 다코야키를 먹고
망고 패션 플루츠 주스를 마시며
아주 매운 고기 덮밥을 먹는 소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앙마이 얘기며 남자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리고 네가 먹는 덮밥은 참으로 매워서 나는 먹고 싶지 않구나 하는 얘기까지.

자꾸 하품을 하는 그에게 묻자 지금이 잘 시간이란다.


11시.
나는 새벽 5시가 되어야 잘 수 있다 라고 하니 그가 그럼 싼티 땀에서 커피를 한잔 하잖다.

싼티 땀?

싼티 땀은 치앙마이 현지인들의 놀이마당~
꽤나 늦은 밤까지 흥청 대는 곳이다.


그가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 자리를 잡고는 스무디 두 잔을 시켰다.
겨우 3kg를 뺐건만 오늘 먹은 이 어마어마한 음식들은
과연 내게 얼마만큼의 절망을 돌려줄 것인가로 머리가 조금 복잡했다.


졸린 그를 상대로 나는 주절주절 떠들어 댄다.
그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온 한국 남자를 상대로도 주절주절 떠들어 댄다.

사람과 있다는 게 이토록이나 감사한 일일 줄이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렇게 살맛 나는 일일 줄이야.

소짱은 나라도 아무 아는 사람 없이 홀로 있다면 외로울 꺼라며
내게 친구를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내가 묵는 숙소나 자주 가는 식당에서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친구들이 생겨날 거라고.


5월 태국에 온 이후로 나와 타케루는 단 둘.
24시간 내내 숨 막히게 붙어 다녔다.
나는 점 점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고
그가 없는 단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하게 되어 그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갈 때
다행히 비자 만료로 그는 미얀마로 떠나고 나는 태국에 남았다.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그를 보내주기로 한다.


그는 자고 나는 깨어 있는 밤으로 돌아가야 한다.

친절하게도 소짱은 집에 데려다준다.
나보고 충분히 괜찮다고 너무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지 말라는 당부도 아끼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나 얘기도 실컷 하고 이곳저곳 데려다준 그에게 나는 참 고맙다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오늘 밤은 잘 잘 수 있겠지.
경쾌하게 계단을 올라가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혼자였다.


-다음날 몸무게는 67.3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자 친구는 빠르면 17일 밤, 늦어도 18일엔 온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가 돌아오면 이번엔 그에게 충분한 자유시간을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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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축구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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