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 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 우리, 마음껏 실망하자. 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보통의 언어들 p. 22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들만 듣고 내 맘대로 미워하고 오해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상대방의 모습에서 전혀 나올 수 없는, 나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전해 듣고는 그 괴리감에 며칠을 미워했는지 모른다.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해보지도 않고 마음속에서 판사라도 된 마냥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 어리석음에 고개를 숙였다.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착각했으면서 멋대로 실망을 하고 멋대로 상처를 받는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헤어짐에 있어서는 각자의 멋대로의 연속이다.
술 한잔 곁들이며 나는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상대는 그것 또한 이해라고 하였다.
그저 일부분만 보고 이게 이 사람의 전부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던 나는 줏대 없는 갈대였다.
본인은 그렇게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며, 복합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며 소주잔을 쥐어들던 당신.
진지해지는 와중 농담을 계속 던지며 무거워지지 않게 얘기를 꺼내는 모습에 또 줏대 없이 좋아졌다.
서로에 대해 환상이 깨진 김에 더 깨부수자고 온갖 얘기를 하며 두꺼운 막을 쾅쾅 두드리던 어느 밤.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 그제야 그 관계는 형태가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 마음껏 실망시키고, 실망하자.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