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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나 Sep 15. 2024

50살까지만 살고 싶었던 청년

우울


00.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던 도중 선반 저 구석에 마구잡이로 구겨져있는 약봉지가 눈에 보였다.


친구들이 볼까 봐 어느 날인가 눈에 안 보이게 치워놨던 나의 작은 치부.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나의 지옥과 탈출에 대한 이야기.




01.

퇴사한 지 두 달쯤 되던 날,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기 싫었다.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한없이 축 처지고 포근한 침대는 그대로 나를 집어삼켜 나태의 숲으로 끌고 갔다.


그날 취미로 배우고 있던 제과제빵 수업을 이유 없이 빠졌다. 그냥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눈만 끔뻑끔뻑거리며 과거회상을 했더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고 덧붙일 말이 많은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인생에 변명을 하며 같잖은 주석을 달아놨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평소보다 잠이 많아지고,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이상하게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 무감해졌다. 이상한 하루 속에서 스스로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자각을 했던 것 같다.


퇴사와 동시에 주체성을 잃어버린 나는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몰랐다.


오만함의 끝은 실망과 자책이다. 스스로 큰 사람이라고 여기던 나는 사실,  '큰 사람'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던 미숙한 소인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인터넷상의 모든 우울증 테스트에서는 하나같이 심한 우울 상태라며 병원을 방문하라고 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부정했다.

그날 처음으로 50살까지만 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02.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낄낄거리던 내가 우울증 일리가 없다며 헛웃음을 내리 지었다. 그런데 그럼 우울증이 아니라면? 이 상황은 뭐로 정의를 내릴 수 있지?


정신과를 간다는 것이 쪽팔리기도 하고,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알게 되기라도 할까 봐 지하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에 예약을 했다.


가는 길 내내 물음표가 계속 생성돼서 지하철에서 내릴 때에는 빼곡한 물음표들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뇌파검사를 하고, 여러 가지 검사들을 했다. 자살문항만 제외하고 모든 증상이 해당된다 하더라.


어이없게도 우울증 진단이 내려지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이토록 괴로운 것은 마음이 아파서였구나.


나 아프구나.


감기가 걸리면 내과를, 뼈에 이상이 있으면 정형외과를 가는 것처럼. 마음이 다치면 정신과를 가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처음 보는 타인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약처방을 받고 병원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더웠다.


폭염에 마스크와 모자까지 눌러쓴 젊은 우울증 환자는 얼이 빠진 상태로 거리를 걸었고, 머리는 저온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뜨거웠다.


생생한 여름날의 열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03.

우울은 관계의 상실에서 찾아온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직장의 상실, 애인, 직장동료 등등 상실에서 시작되어 공허로 이어지는 것.


따지고 보면, 우울증은 우울해지는 병이 아니라 감정이 생기지 않는 병에 더 가깝다.


약을 꾸준히 먹고, 운동도 다니고, 사람도 만나고 학원도 열심히 다니면서 다시 무너진 둑을 쌓아갔다.


나는 차도가 좋은 편이라고 하셨다. 병원을 갈 때마다 내가 환자라는 것을 새삼 느껴 늘 울고 왔지만 그래도 믿어주는 가족들이 있기에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무렵 재취업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재미라는 걸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원 첫날에 했던 테스트를 다시 했던 7월의 어느 날. 정상 범주로 들어왔다는 결과를 듣고는 떨떠름했던 기억이 있다.


약 때문인 건지, 취업 때문인 건지 찝찝하긴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단단해졌으면 된 거 아닌가.


살다 보면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는 과정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숭고한 것이다.


지옥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는 고귀하다.


그러니 당신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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