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부모님의 영정사진
- 요즘은 영정사진이 아니라, 영생 사진이라고 한대. 영정보다는 영생이 조금 더 밝은 느낌이라고 단어가 바뀌었다고 하더라. 사진은 영원히 남으니까...
일에 치여 살던 어느 7월의 주말이었다. 갑작스레 잡힌 일정 때문에 가족행사에 참여하지 못해 속상해하던 차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
할머니 칠순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사진관에 간 김에 영정사진도 같이 찍었다고 하더이다.
통화하면서 말 끝을 흐리던 엄마의 심정을 지금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마음이 싱숭생숭 하셨겠다며 툭 뱉어보는 말에 애써 화두를 돌리던 마음도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내 앞에서 영정 사진을 찍는다는 건.
같이 한 추억을 기억해 달라는 것.
나는 이제 세발자전거의 등 뒤를 미는 것을 멈출 터이니,
너는 없이도 나아갈 준비를 하라는 것.
요양병원 원무부 일을 하면서 다 커버린 자식들과 이제는 품이 조금 작아지신 부모님들을 많이 봐왔었다. 내게 부모님 뻘인 보호자들은 그저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다.
부모자식 간의 상관관계는 세월이 지나도 관계 위치는 변함이 없다는 것에 있다. 부모는 여전히 자식 앞에서 부모고, 자식은 부모 앞에서 한낱 자식을 뿐이다.
죽음은 무뎌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는 대성통곡을 하던 보호자와 같이 부여잡고 운 적도 있었고, 라포가 쌓였던 보호자가 슬퍼하는 모습을 볼 때면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리며 사망진단서에 도장을 찍었던 적도 있었다.
죽음은 무뎌지지 않았고 늘 새롭게 나를 괴롭혔다.
허나, 감정만은 반복된 슬픔 속에서 닳아졌다.
여린 마음에 굳은살이 배겨 감정의 쓰나미에 쓸려가지 않을 만큼의 고목이 되었다.
고목이 된 이후부터는 많은 이들의 죽음을 위로해 주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주고, 다독여주고. 감정을 쏟아낼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버팀목이란 어떤 존재인가.
남겨진 사람은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한다. 또래에 비해 죽음에 대한 간접경험이 많다고 생각했던 나조차 가까운 이의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깜깜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누구든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는 미숙하다.
영정과 영생이라는 단어는 참 생소한 조합이다. 영정사진을 찍는 부모님의 부모님. 영정사진을 영생사진이라고 바꿔 말하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을 부모님.
말속에 논리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 사진기사님의 말에 편을 들어주고 싶다.
사진으로 간직한 기억은 잊을 때마다 꺼내어 보며 추억할 수 있으니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