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버스를 타고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있지만 두 개의 차이는 어떤 터미널에서 타는지에 따라 달랐다.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서울고속버스터미널로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서울 남부터미널로 도착하게 된다.
어차피 비슷한 위치이지만 시외버스에서 타면 같은 가격에 더 넓은 우등좌석을 탈 수 있어서 나는 시외버스에서 타는 것을 좋아했다.
서울에 올라가면 신림에 고시원을 구해야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가지고 올라왔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수중에는 50만 원가량의 돈과 이불과 책들을 챙겨 왔다.
명확한 계획 없이 그저 재수를 하게 되었고 재수를 했음에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냥 성적에 맞춰서 갈 수도 있었고 본가 근처에 있는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이유 그 당시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꼭 서울에 있는 대학교가 아니라 부모님에게서 하루빨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주교대나 전북대에 가게 되면 부모님의 손아귀에서 못 벗어났을 것이 분명했다.
다들 얽혀있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었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감시카메라처럼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고 숨 막히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능 공부를 더 하기는 싫었다.
앞이 막막했지만 어떤 걸 해도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신림에 십만 원대 방들이 있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왔지만 막상 방을 구하러 돌아다녀보니 아니었다. 결국 28만 원짜리 고시원 방 한 칸을 얻었다.
오전 차를 타고 왔는데 방을 얻으니 벌써 해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고시원 방은 작은 매트리스 하나가 있었고, 나름 책상과 옷장 티브이 냉장고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바로 옆에 신원시장이 있어서 신원시장에서 장을 봐와서 끼니를 챙겼다.
그리고 알바를 구하기 시작했다.
알바 경험이 없다 보니 아무데서도 써주려 하지 않았다.
가까운 닭발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여기는 주급으로 아르바이트비를 계산해주어서 수중의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알바를 구할 때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법적 근로기준에 맞게 시급을 주는지 여부를 따져봤고, 요식업 계열에서 일하고 싶었다. 요식업계에서 일하면 조금이라도 식비를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일 년가량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끼니는 햄버거로 대체했고 지출을 최대한 아낄 수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는 그리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절박했다.
무엇보다도 돈을 모으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보살펴주거나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알바들을 풀타임으로 일하며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한 달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