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러브스토리가 있다. 보통 사람들이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할 때는 남자와 여자 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남과 남, 그리고 여와 여간의 러브스토리들도 점점 더 많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캐롤>도 남과 여가 아닌, 여와 여간의 러브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여자들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떠오르기는 하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연인들 간의 격정적이고 에로스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면 <캐롤>은 좀 더 잔잔하고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조금 다른 면을 보인다.
<캐롤>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캐롤’을 바라볼 때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지는 ‘테레즈’의 얼굴이다.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리스베트’라는 나름 센 역으로 얼굴을 알린 루니 마라는 ‘테레즈’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얼굴 표정을 통해 섬세하게 잡아낸다. 특히 ‘테레즈’가 자신의 남자친구인 ‘리차드’와 있을 때와 ‘캐롤’과 있을 때의 표정 변화를 표현해내는 루니 마라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 표현을 세밀하게 세공해내듯 그려낸다.
이 영화가 ‘테레즈’가 아닌, ‘캐롤’을 이름으로 제목으로 한 것도(물론 원작 도서의 원제가 ‘캐롤’이라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지만) 나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사실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위 말하는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사는 캐릭터였다. ‘테레즈’의 대사에서도 드러나듯, 그녀는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모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캐롤’을 만난 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큰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는 자신의 새로운 성 정체성을 깨닫는 변화가 아닌,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결정권을 갖는 삶으로의 변화이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테레즈’가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지만, ‘캐롤’은 그녀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포트폴리오를 궁금해했다. 진짜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상대방을 나의 기준과 나의 가치에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고 상대방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존중해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어쩌면 <캐롤>에서는 동성 간의 러브스토리보다는 한 여자의 진정한 자아 찾기가 더 중요한 주제일지도 모른다. '캐롤'은 '테레즈'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줬고,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게 그녀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캐롤> 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때로 시대라는 험난한 벽과 마주하고, 현실이라는 지독한 가시밭과 마주하면서 잠시 주춤하지만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된다. 맨 첫 장면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마주했던 관객이라면 그저 여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일련의 모든 과정을 겪은 뒤 다시 그 장면을 만났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그들의 상태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퀴어 시네아스트로 불리는 토드 헤인즈는 동성 간의 사랑에 특별한 필터를 끼워 넣은 것 같지는 않다. 누구에게든 사랑은 공평하게 찾아오며, 그 사랑은 여성과 남성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를 끌리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인 '캐롤'을 향해 다가가는 '테레즈'의 발걸음을 나도 모르게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명확한 끝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미소에서 그들의 사랑이 이제부터 시작이었음을.
★ 매혹된 장면
: 영화 속에서 수많은 장면이 있었지만 딱 두 장면이 가장 뇌리 속에 남는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던 엔딩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테레즈'가 '캐롤'의 사진을 찍은 뒤 인화하는 장면이다. 유독 사진을 인화하는 장면은 내 마음을 잡아끌 때가 있는데 <라이프>에서 데니스 스톡이 제임스 딘의 사진을 인화할 때도 그랬고, <캐롤>에서도 역시 난 그 장면에 매혹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사람의 어떤 순간과 감정을 사진기를 통해 포착해내기 때문이 아닐까. '테레즈'는 사진기로 '캐롤'의 찰나를 담아냈고, 그 사진에 자신의 설레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때로는 이런 장면들이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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