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박스> 단평
※ 본 리뷰에는 <버드박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해프닝>이란 영화를 보면서 '공포의 근원을 알수 없다는 점에서 더 이상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영문을 모른 채 사람들이 계속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공포는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만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지 약 12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임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가 성행하기 이전 넷플릭스에서 처음 공개된 <버드박스>를 보았다. <버드박스>는 <해프닝>처럼 정확한 근원을 알수 없는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두 영화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해프닝>에서는 근원을 알수 없는 재난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버드박스>는 재난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군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 재난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를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고, 이에 대한 각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언제 어디서 감염자가 나올지 모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많이 떠올리게 했다.
<버드박스>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는 살아남은 인간들이 모이는 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그곳에서 임신한 맬러리 뿐만 아니라 경찰대생, 나이 든 여성, 괴팍한 노인, 동양인, 건장한 흑인 청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집에 먼저 들어와있었던 나이든 남자 더글라스는 자신의 아내가 맬리러를 구하려 갔다가 사고를 당하자 그녀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이고, 이로 인해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유발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맬러리와 나이든 남자간의 갈등은 커져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질서 속에서 생활을 이어나간다.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는 혼란한 세상은 '친절'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인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친절'은 괴팍한 더글러스가 말했던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톰은 슈퍼마켓에서 누군가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해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로 인해 찰리를 잃고 말았다. 길을 잃고 헤맸던 올림피아는 자신이 홀로 떠돌아다니던 시절을 생각하고 게리를 집안으로 들여보내줬지만, 게리로 인해 집안은 끔찍한 곳으로 변모한다. '친절'은 이 세계 속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맬러리는 쉽게 사람을 믿지 않았고, 자신이 낳은 아이와 자신이 거둔 아이에게도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 그것이 언제 자신과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올가미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맬러리는 어리석은 것으로만 치부되었던 '친절'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무전을 듣고 그것이 함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까지 잃고 궁지에 몰린 상황 속에서 맬러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험난한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정체를 알수 없는 공포를 직접 마주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넘어드는 순간, 맬러리는 마침내 다른 이의 '친절'로 인해 살아남는다. 맬러리가 가까스로 도착한 곳은 시각장애인들이 모여있던 센터였고, 그곳에서는 모든 이들이 서로를 도우고 돌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엔딩을 보면서 어쩌면 <버드박스>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친절한 것은 곧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최악과 절망의 순간에서도 친절을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작정 모든 인간이 착해야 한다고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순간에서도 타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 인류애 즉 '사랑'이 남아있을 때, 비로소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맬러리는 톰을 잃었지만, 톰의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맬러리가 자신의 자식과 다른 이의 자식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감싸안음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포스트 코로나라고 칭하는 지금 이 시대 속에서 <버드박스>의 엔딩은 묘하게 와닿는다. 거리를 나서는 순간부터 누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언제 어디서 바이러스가 더욱 번질지도 모르는 공포스러운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것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행동인 '사랑'이라고 <버드박스>는 미리 우리에게 답을 보여줬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