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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ul 15. 2020

단편적으로 스친 외로움에 대하여

<패신저스> 단평

※ <패신저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신저스>는  미래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우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역동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심리 변화에 집중하는 영화이다. 새로운 개척 행성으로 떠나는 초호화 우주선을 타고 가던 평범한 남자 짐은 정말 우연히 벌어진 사고로 인해 홀로 깨어난다. 그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다시 잠들려고 하지만, 그 노력은 역부족이고 초호화 우주선 안에서 약 1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보낸다. 감정이 극한으로 치달아 자살하려던 그는 우연히 발견한 오로라를 보고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아나가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깨우고 만다.


 영화 속에서 인간이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짐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은 살아있지만, 그와 결코 대화를 나눌  없다는 측면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새로운 낙원으로 도착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90년이란 시간이 걸리지만, 마치 신이 개입한 것처럼   없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짐은  넓은 우주선에 홀로 남았다. 짐은 어떻게든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우주선 내에 있는 모든 시설들을 이용하고 안드로이드인 아서와 함께 하기도 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에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이며, 동시에 어떤 대상도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을 나눌  없다는 공포에 가깝다. 결국 이 외로움은 다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짐을 이 우주선 속에 살아있는 죽은 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외로움이란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짐은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존재인 오로라를 깨운다. 짐이 깨어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결과였지만, 오로라가 깨어나게 된 것은 짐의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오로지 짐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다. 짐의 행동은 결과로만 보았을 때, 당연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외로움만을 위해 멀쩡히 자신의 목표대로 가고 있는 다른 사람을 그 궤도에서 끌어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외로움이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든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것으로만 보인다.


'외로움'은 오직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인간다운 감정이지만, '외로움으로 인해 촉발된 행동이 과연 인간다운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게 만든다. 하지만 이 질문을 바로 나 자신에 던졌을 때, 나는 과연 '인간다운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내가 만약 짐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닥쳤을 때, 나는 다른 누군가를 꺼내 그 사람이 낙원으로 갈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90년이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와 소통을 포기하고 그 외로움을 견디면서 살아갈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정말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일까? <패신저스> 극한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외로움을 보여주고자 하였지만,  외로움의 근본은 다루지 못한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로맨스로만 끝을 맞이하고 만다. <패신저스> 조금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 깊이 다뤘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그것은 할리우드 영화  정해진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스토리가 아니라, 영원히  끝을   없는 열린 결말로 일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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