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살며시 다가올 것, 심연 속의 악

<23 아이덴티티>와 <해빙> 속 인간의 무의식과 악에 대하여

by 송희운

<23 아이덴티티>, <해빙>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란 무엇일까. 사회적 규범과 통념을 모두 벗어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나쁜 것. 살면서 우리는 사실 절대적인 을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게 악에 잠식된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의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은 언제 자신을 드러낼까. 그 악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 악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왠지 그 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아주 평범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최근 극장에서 개봉했던 <23 아이덴티티><해빙>을 본 뒤에 든 생각이었다.

<23 아이덴티티>는 최근 몇 년간 홀대받았던 M. 나이트 샤말란이 다시 감을 되찾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사실 <23 아이덴티티>는 소재 면에서는 새로울 바가 없는 영화이다. 이미 관객들에게는 반전 영화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아이덴티티>가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고,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는 영화가 아니어도 드라마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해빠진 소재였다. 놀랍게도 <23 아이덴티티>는 다중인격을 흔한 소재로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과 악에 대해 탐구해나간다.


비슷한 시기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해빙><23 아이덴티티>와 유사하게 인간의 정신을 플롯의 전면에 내세운 영화이다. <23 아이덴티티>가 처음부터 분열된 인격을 전면에 내세우며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 영화였다면, <해빙>은 내러티브 자체에서 이를 숨긴다. 일종의 맥거핀을 통해 관객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다 영화의 중반 이후에 모든 것을 드러내며 충격을 선사한다.(고 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언뜻 두 영화는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가면서 이를 스릴러의 형태로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23 아이덴티티>는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반면 <해빙>은 관객들로부터 싸늘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두 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연출력의 차이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단순히 어떤 영화가 더 잘 만들었고, 더 못 만들었다는 것을 떠나서 두 영화가 인간의 무의식과 악에 대해 어떠한 방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리는 어떻게 ‘악’을 ‘악’이라 할 수 있을까?


<23 아이덴티티>(개인적으로 이 제목보다는 원제인 <스플릿>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에서 가장 제일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여자아이들 3명이 납치당한 이후로 케빈(메인 인격이 케빈이므로 이후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캐릭터를 통칭할 때는 케빈이라고 부르고자 한다)의 집이 제대로 보이는 순간은 영화의 엔딩 때뿐이다. 그전까지 케빈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이 갇힌 공간이 어디 있는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공간의 일부분까지는 보이더라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관객들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 공간이 왜 영화 러닝타임 내내 바깥에서 비치지 않는지, 여태껏 숨겨져 왔던 비스트의 인격이 왜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간을 통해 모든 것이 단번에 설명된다. 이 부분은 조금 더 뒤에 가서 설명하기로 하고, 그전에 먼저 케빈의 공간 내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케빈이 소녀들을 납치한 이유만큼 공간도 상당히 모호하다. 창문 하나 없는 갑갑하고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케빈은 수많은 칸을 나누고 그 공간을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한다. ‘데니스의 공간, ‘패트리샤의 공간, ‘헤드윅의 공간 등 비스트를 불러내기 위해 모인 악한 인격들만큼이나 어둡고 음습한 지하의 공간은 밝은 햇빛 하나 드는 곳 하나 없이 그저 폐쇄된 공간일 뿐이다. 소녀들이 있는 공간은 최소로 필요한 물품만 채워져 있고, 이것저것 많아 보이는 다른 공간들도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필요 물품만 있을 뿐이다. 물건이 많아 보이는 이유는 인격마다 사용하는 물건들이 다르기 때문이지 그 공간 자체는 인간이 삶을 사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들만 존재하는 생존터이다. 그 공간은 외부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공간이며, ‘케빈의 다른 인격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다른 이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도록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그들은 왕처럼 군림하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어나간다.


<23 아이덴티티> 스틸 / 케이시


사실 애초에 연약해 보이는(연약한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린 10대 소녀들도 그들이 기획했던 완벽한 제물이었다. 그들은 비스트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10대 소녀들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자 했었고, 그녀들이 제물로 바쳐지고 난 뒤에는 그들은 새롭게 태어난 비스트를 통해 케빈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영화 속에서 마치 잉여처럼 보이는 케이시 때문이다. 내러티브 속에서 케이시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 제대로 흡수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잔여물과도 같이 보인다. 어릴 적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맹수를 사냥하는 방법과 케빈이 정말로 맹수가 되어가는 순간까지 영화는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바로 케이시때문이다. 내러티브 속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던 케이시는 엔딩에 가서야 비로소 그녀의 역할에 대해 설명을 부여받는다. 바로 비스트와 그녀가 마주하는 순간이다. 어린 소녀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녀들의 살점을 취했던 비스트는 그녀를 계속해서 공격하다가 그녀를 마주한 순간 그녀를 살려둔 채로 나가는데, 이는 그녀가 비스트=케빈과 마찬가지로 학대받은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를 본 순간 ‘Your heart is pure. Rejoice! The broken are the more evolved’고 말하는 것도 이 영화 자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자신의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 이와 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23 아이덴티티> 스틸


영화는 초자연적이 것이 섞여 들기 시작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믿는 대로 될 수 있다는 인격들의 이야기와 인간에게 내재된 다른 인격이 기본 인격이 갖고 있지 않은 특성들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은 비스트를 등장시키기 위한 복선이라 할 수 있다. 그 복선들로 인해 비스트는 인육을 섭취하고 인간들보다 한층 더 위대한 존재라고 스스로 믿으며 벽을 기어 다니고 샷건으로 맞아도 끄떡없는 모습을 보이며 의 완벽한 현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왜 하필 의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비스트라는 동물의 이름을 가진 것일까. 정말 자신이 믿는 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비스트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의 이름을 빌어 오는 것이 더 위대해 보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케빈의 거주 공간과 연관되어 있다.

<23 아이덴티티> 스틸 / 비스트


케빈이 살고 있던 곳은 수많은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동물원 우리 지하였다. 어머니에게 학대당했던 케빈에게 안전한 장소는 어머니의 손이 닿지 않았던 침대 밑이었고, 이로 인해 그의 조각난 인격들이 깨어나는 시발점이 된다. 그의 안에서 다른 인격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리숙하고 나약한 케빈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데니스’, ‘헤드윅’, ‘패트리샤는 아무도 해치지 못하고 쉽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맹수들의 이빨과 강인한 악력을 보고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비스트, 짐승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을 선택한다.


<23 아이덴티티> 해외 포스터


개인적으로 케빈과 다른 인격들이 머무르는 공간은 단순히 집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마치 케빈의 정신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자의 역할에 따라 수십 개로 나누어진 방들. ‘패트리샤의 부엌, 인질들을 가두고 있는 데니스의 창고(같은 느낌의 방), 창문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 데니스의 방 등. 이중 어디에도 비스트케빈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에서 케이시가 비스트로부터 온 힘을 다해 도망칠 때 드러나는 배수구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공간과 조명 하나 제대로 들지 않는 아치형 지하는 케빈의 마음속 깊숙이 묻혀 있던 무의식과도 같다. 틀에 박힌 해석같이 보일지는 몰라도 케빈과 다른 인격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은 프로이트의 말대로 나눈 인간의 의식 3 구조 중 가장 하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 포스터는 이 영화를 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서진 내면 속에서 올라오는 수십 개의 다른 인격과 방어기제들. 가장 깊숙한 곳 웅크리고 있던 가장 강한 인 비스트가 이제 깨어나는 순간, ‘케빈은 비로소 완전해진다.


<23 아이덴티티> 스틸


흥미로운 지점은 케빈의 이드는 동물들이 있는 곳 보다 한층 더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불구불하고 곳곳이 어둠에 둘러싸인 지하실은 아직 완전히 탐구되지 않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비유와도 같이 보이며, 길들일 수 없는 맹수들보다 한 층 더 위험한 것처럼 묘사된다. 가까스로 도망쳐서 스스로 감옥과도 같은 우리에 들어간 케이시는 마치 맹수를 사냥하듯 그를 향해 샷건을 조준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두 인간이 서로를 마주한 순간, 그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맹수와 사냥꾼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평범한 인간으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감을 받지 못했던 케빈은 자신과 같은 흉터와 아픔을 간직한 케이시를 본 순간, 그녀의 외형을 통해 진정으로 공감받는다. 플레처 박사는 케빈의 분리된 인격들을 모두 존중했지만, 이는 상담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었고, ‘데니스가 납치했던 클레어와 마르샤는 그를 조롱하고 희롱했던 복수할 대상에 불과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 스스로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아넣었던 케빈비스트가 되고 나서야 자기 자신과 같은 처지를 만나서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내내 여과되지 못했던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던 케이시의 역할도 이 장면에 이르러서 설명된다. 사실 샤말란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장면도 어떤 분리된 인격이나 스릴러와 같은 장르적인 부분이 아니라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관객들 어느 누구도 케빈을 단순한 악역이라 치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드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며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악역을 설정해놓았던 샤말란 감독은 과연 이 사람을 단순한 악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하며 어쩌면 무력한 희생자로 남아있거나 또 다른 악이 될지도 모르는 케이시의 미묘한 얼굴을 비추고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해빙>에서도 영화 속 인간의 의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공간들이 등장한다. 바로 정육식당과 승훈이 살고 있는 원룸이 있는 건물이다. 이 공간도 끼워 맞추듯이 프로이트의 이드, 에고, 슈퍼에고 이렇게 세 가지 층으로 나누어볼 듯 있으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 공간 모두를 하나의 무의식으로 역전시켜 버린다. 먼저 정육식당이라는 공간 자체는 공간이 풍기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인해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욕망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라던지 혹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이면이 드러난다던지 모든 도덕과 사회적인 규율을 벗어난 것 같은 말 그대로 짐승과도 같은 공간이다. 짐승<23 아이덴티티>에서 드러나는 비스트의 짐승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해빙>에서의 짐승과도 같은 단어가 선사하는 느낌은 인간의 원시적이고 정제되지 욕망에 가깝고, <23 아이덴티티>비스트는 인간을 초월한 순수하면서도 강함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 순수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이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가 판별되지 않는 그 자체로 순수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비스트는 순수한 악의 형태와도 같다. 다시 <해빙>으로 돌아와서 만일 프로이트의 이야기처럼 이드, 에고, 슈퍼에고 이렇게 나눈다면 승훈이 있는 공간은 슈퍼에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런 통념을 모두 뒤집어버린다. 사실 <해빙>에서 정육식당뿐만 아니라 그 건물 자체가 인간의 모든 원초적인 욕망이 살아있고 발현되는 이드의 공간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승훈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과, 이 모든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이 화성이라는 것도 일맥상통한다. 승훈은 우리 사회에서 지성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 직업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 말종과 다름없는 사람이다. 프로포폴에 중독된 승훈은 결국 사채까지 손을 대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의사라는 사회적인 명함과 지위를 벗겨내고 나면 그도 결국 건물 하단에 위치한 정육식당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이는 성근, 정노인과 같은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승훈의 특징에 대해 영화는 공간 속에서 힌트를 남겨 놓는데, 승훈의 방에 위치한 거울이다. 온통 커튼으로 닫힌 채 어둡고 캄캄한 승훈의 방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물은 거울이다. 무언가를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거울은 화장실에 있는 거울처럼 어딘가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놓여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우지 못해서 이렇게 널브러져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승훈의 방에 있는 거울은 좀 더 특별하다. 영화 속에서 승훈의 방을 비출 때 종종 거울이 보이는데, 그 거울 안에는 어떤 사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붉은 색상만이 비친다. 그 붉은 색상은 이 공간이 단순한 공간이 아님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정확하지는 않지만 불길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한 가지 더 특이한 지점은 냉장고를 또 하나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정육식당에서나 승훈의 집에서나 냉장고는 모두 두렵고 끔찍한 것들을 감추는 공간이다. 시체의 일부분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공간. 정육식당의 냉장고와 승훈의 집에 있는 냉장고는 같은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승훈이 계속 의심했던 정육식당의 지하실은 사실 승훈이 자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무의식 속으로 끌어내려버린 죄의식의 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승훈은 스스로 죽인 인간의 머리를 자신의 집 냉장고에 보관해왔음에도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죄의 일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죄의 흔적이라고 믿어버린다.


<해빙> 티저 포스터


화성이라는 지리적 특성도 이러한 주제들을 강화시킨다. 한때 벌어졌던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공포스러운 곳이 되어버린 화성. 영화의 첫 시작 부근에서 승훈이 아파트 개발 공사 현장 옆의 굽이 굽은 길을 돌아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은 마치 무의식 깊은 곳에 가둬놓았던 인간의 원초적인 악이 다시 발굴되는 느낌을 준다. 불길했던 것을 수면 아래 묻어버리고 다시 꺼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수면 밑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해빙처럼 얼어붙었던 강이 녹고 수면 밑에 감춰놓았던 시체가 떠오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이라는 것은 열이 가해지면 쉽게 녹아버린다는 특징을 가졌다. , 승훈이 쓰고 있었던 위태로운 평범함이란 가면은 계절이 바뀌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붕괴되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해빙>은 욕망이란 이름으로 감춰졌던 인간의 악이란 쉽게 숨길 수 없는 것이며, 그 악은 언제든지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엔딩에 다다라서는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해소되지 못했던 모든 궁금점들이 풀린다. 정노인과 성근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는가, 미연은 정말 프로포폴을 빼돌렸는가. 영화 속에서 허술한 내러티브를 표방하며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의문들. 정노인과 성근은 정말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 맞았고, 승훈뿐만 아니라 미연도 병원의 프로포폴을 빼돌리고 있었다. <23 아이덴티티>는 진정한 악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모호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이란 존재의 복잡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해빙>에서는 이와 반대로 모든 인간에게는 악이 내포되어있다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악은 욕망이란 외피를 두른 채 단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을 뿐이며, 얼음이 녹으면 다시 시체가 떠오르듯 아슬아슬한 평범함이 깨지고 나면 언제든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사실 <해빙>에서 이러한 지점들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스릴러의 형식을 잘 활용하여 이를 좀 더 긴장감 있게 보여줬더라면 영화는 충분히 수작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한 부분들이 좀 느슨하게 이어져있어서 그랬는지 좀 아쉬운 지점들이 많이 보였다.






사실 단 두 편의 영화만을 갖고 인간의 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엄청난 오류이며, 자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다양한 얼굴들 중에서도 악에 대해 주목한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악을 좀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몰랐던 부분들을 알아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악을 대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일지도 모른다.


** 사족 : 근데 <23 아이덴티티>나 <해빙>이나 충분히 잔인한 것 같은데 어떻게 둘다 15세 관람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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