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피의자'는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재심> 속에 드러난 피해자의 얼굴에 대하여

by 송희운

*이 리뷰는 2월 8일(수) 사전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일명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라 불리는 살인사건은 한 택시기사가 흉기에 여러 차례 찔려 사망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최씨 성을 가진한 청소년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범인이 아니지만 경찰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당한 사람. 즉, 경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범인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자백을 하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형을 선고받는다. 이야기를 듣는 누구나 이 부당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마련이지만, 실제 사건은 부당함이 고쳐지기까지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6년이란 시간은 한 소년이 사회에 불신을 가진 청년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 당시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고 어떠한 고통을 받았을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한번 듣고 ‘안타깝다’라고 반응하는 일회성에 그칠 뿐이었다. <재심>은 사회의 부당함과 더불어 바로 그런 ‘피해자’들의 얼굴과 감정에 주목하는 영화이다.





사실 <재심>에서 통쾌한 한 방을 기대하긴 힘들다. <재심>이 원하는 지점이 <부러진 화살>과 같은 영화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지점들과는 살짝 다르기 때문이다. <재심>을 연출한 김태윤 감독의 전작 <또 하나의 약속>이 반도체 공장 직원들의 실화를 다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심>은 그 긴 시간 동안 상처받고 아파했던 피해자의 모습을 조명하는데 집중한다. 그 모습이라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화를 통해 좀 더 극적으로 끌어 올라간 몇몇 부분들은 있지만, 영화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사회 정의 구현과 더불어 이들의 아픔도 다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재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도 이런 지점들이다. 1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세상을 불신하게 된 현우가 며칠간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준영에게 가져다주는 장면. 세상을 무조건 불신하던 사람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전 재산을 건네주는 장면이 가지는 의미는 참으로 뭉클하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자신의 재산을 다른 이에게 전부 줄 수 있을까. 혹자는 가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비난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건, 그렇지 않든 간에 내 전부를 남에게 주는 이타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실행하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다. 특히 세상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아픔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 준영에게 라면을 챙겨주는 현우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단순히 고통받는 피해자의 얼굴만이 아닌, 인간다운 따스한 얼굴을 가진 현우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우의 집이 바닷가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거대한 자연으로 불리는 바다는 모든 것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모든 것을 한없이 주기도 하는데 참으로 우리네 ‘사회’와 대조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오직 자신의 재기를 위해 사건을 맡았던 준영, 자신의 출세를 위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잡아넣었던 철기, 자신의 새로운 회사를 위해 정보를 팔아넘긴 창환 등 사회 속에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성을 찾는 것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속물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변하는 준영을 통해 아직 사회 속에서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한 줄기의 희망을 보여주려 한다.



영화가 아무리 사람들의 진정성과 인간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진심 어린 의도를 갖고 있다 해도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피하는 것을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분노하고 이 사건에 대해 ‘일회성’이 아닌 이런 부조리한 일이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킬 수는 있다. 그렇지만 감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따뜻한 감성이 사람을 품어줄 수 있지만, 그 감성이 현실의 냉정한 벽을 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영이 수정에게 찾아가 화를 내는 장면이나 현우의 어머니가 현우를 내쫓는 장면 등 현우의 상황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여러 장치들은 조금 과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그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화의 재구성과 대중들과의 소통 지점 사이에서 조금은 더 긴장감을 유지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심>은 마지막 엔딩 장면으로 인해 더욱 뜻깊은 영화로서 자리한다. 재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승소하느냐를 보여주는 통쾌한 한 방이 아닌 우리 즉, 관객들에게 과연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지를 반문하는 엔딩.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 등장하는 실화를 보기 전에도 이 사건이 얼마나 부조리하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판단을 영화에게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 판단을 내리고 우리가 정의의 선두에 선다는 것. 영화 속 부조리함은 한 용기 있는 변호사의 투쟁에 의해 고쳐졌지만, 이 세상의 부조리함은 이제 우리의 몫이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부조리함을 일깨워주며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재심>의 엔딩. 우리의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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