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어요]에 대한 짧은 단상
※ [나, 여기 있어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미투가 일어나기 전까지 성폭행 피해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성폭행을 저지른 가해자에 대해서만 분노할 줄 알았을 뿐, 이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나와 상관없는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서지현 검사님, 김지은 님의 미투 등 세상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미투 사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보고 싶은 세계만을 보고 살아왔구나. 내가 모르고 관심 가지기를 원치 않았던 세계가 이렇게 많이 존재하고 있었구나' 정확하게 그 이후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후 성폭행 사건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기사를 더욱 주의 깊게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건 주변에는 항상 수많은 목소리가 '피해자 다움'에 대한 의문이 제기하는 것을 많이 봐왔는데, 왜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는지 화를 내면서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왜 그러한 '피해자 다움'을 강요해서는 안되는지 정확히 잘 몰랐었다.
미투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SNS를 통해 웹툰계의 미투 사건을 다룬 [나, 여기 있어요]라는 책을 발견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웹툰계의 미투에 대해서는 너무나 생소했기에,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책을 주문했고 순식간에 다 읽어 내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여성'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나 자신조차도 '피해자 다움'으로 피해자의 삶을 내 멋대로 판단해왔다는 생각이었다.
[나, 여기 있어요]는 만화협회 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정한섭 작가의 문하생으로 일했던 '현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들을 중시하는 폭력적인 집안에서 도망치듯 유명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지만, 거기서 '현지'가 받았던 것은 작가의 멸시와 폭력, 성희롱, 성추행 등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끔찍한 행위였다. 친구와 함께 그 수난을 겪으면서 그저 참아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현지는 어느 날 다른 친구가 현지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거 범죄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정말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 이후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고소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소를 진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협회에서는 피해자인 '현지'를 걱정하고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입장을 강요했고, '현지'와 작가의 성추행 사건을 그들 사이의 개인적인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현지'의 주변에서는 그와 그의 친구가 꽃뱀이라고 소문이 났고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겨우 열린 재판에서 정한섭 측 변호사는 '현지'에게 무례하고 모욕적인 질문들만 던지며 그를 정신적으로 압박했다. 결국 고통스러운 시간들 속에서 '현지'는 합의를 하였고, '현지'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현지'를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리게 만들었지만, '현지'가 그 시간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만화 속에서 직접적인 가해를 가한 정한섭 외에도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현지를 더욱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인터넷 상 폭로한 글에서는 현지와 그의 친구가 "그런 일을 당할 외모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첫 번째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때 다른 작가들은 현지에게 "최대한 불쌍하고 피해자처럼 보이게 입어"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피해자 다움'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머리도 막 헝클어진 채로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눈에 초점이 풀린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폭행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앞에 존재하는 성폭행 피해자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고 내세우는 증거들이다. [나, 여기 있어요]의 현지는 이러한 '피해자 다움'에서 모두 벗어나 있다. '현지'가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들은 너무 많았지만, '현지'는 식음도 전폐하지 않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다녔다. 그는 피해자가 아닌, '현지'라는 인간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해나갔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것처럼, 현지도 자기 자신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온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피해자 다움'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 조차도 피해자들을 '피해자 다움'에 가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생각이었다. 성폭행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삶, 즉 밥을 먹고 돈을 벌러 다니고 남들과 즐겁게 수다를 떠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생각이었나. 성폭행 피해자들도 나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인데 단지 그들에게 그러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자신조차도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구분 지어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또 하나의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는 생각이었으며, 2차 가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나, 여기 있어요]인 것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와 닿는다. 현지에게 도움을 받아 상담을 받는 학생도 정한섭 사건 이후로 그 사건 피해자들은 업계를 다 떠났다고 말했을 때, 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한다. 사건의 피해자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 안타깝고 공감을 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겠지만 그들에게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는 것만 아니라 그들이 '피해자'라서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가두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그렇게 행동해왔던 것일까? 우리는 이제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단어로서 '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 그들과 연대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걸음으로 그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이름'을 먼저 불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