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희운 Jun 20. 2021

살아남은 자의 솔직한 욕망

<빛나는 순간>의 흥미로운 지점들

※ 이 리뷰는 <빛나는 순간> 사전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 이 리뷰에는 <빛나는 순간>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나는 순간>은 우리가 그동안 영화 속에서 많이 봐왔던 나이 많은 남성과 젊은 여성 간의 사랑이야기를 뒤집어서 제작한 영화이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 간의 사랑이 영화 속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만큼, <빛나는 순간>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순간>은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섬세하게 세공된 영화는 아니더라도 캐릭터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솔직하고 우직한 정공법으로 밀고 나가며, 캐릭터에 대한 존중이 돋보이는 영화라는 점이다.



처음 영화를 보기 전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 두 사람이 어떤 순간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가였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남성에게 빠지는 계기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데, 나이 든 여성이 젊은 남성에게 빠지는 계기를 어떻게 납득하게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의외로 영화는 굉장히 솔직하게 접근한다. 어떤 구차한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굳이 보태지 않고 인간의 솔직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정공법으로 밀고 나가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인물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보여준다. 자신도 모르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진옥을 보여주면서 진옥이라는 캐릭터의 나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진옥도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영화는 남성인 경훈보다는 진옥의 시선에 더 맞춰져 있는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옥이 경훈에게 빠져드는 것에 대해서 납득하기는 쉬워도, 경훈이 진옥에게 빠져드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경훈이 진옥에게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갖고 있다는 것임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쉽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에 나이 든 여성이 젊은 남성에게 빠지게 되는 계기만큼이나 젊은 남성이 나이 든 여성에게 빠지게 되는 계기도 조금 더 잘 보이게 묘사하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지점이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을 제외하더라도 <빛나는 순간>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빛나는 순간>은 인간의 솔직한 욕망을 다루면서도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상처를 내밀하게 어루만진다. 거칠고 투박하게 살아온 진옥이라는 인물은 한 평생 제주도에서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마주할 줄 몰랐던 인물이다. 그저 살기 위해서 매일 목숨을 걸고 물질을 해야 했고, 자신이 번 돈으로 무언가 부를 누리기보다는 그 돈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남편을 부양하기에 바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마음보다는 마음밖에 있는 현실을 살아야만 했었고 그의 성격은 퉁명스럽고 고지식하기만 했다. 그러던 진옥에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경훈이라는 존재가 나타난 순간, 자신이 그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상처를 비로소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진옥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부모님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딸은 자신이 매일 물질하던 바다에서 사고를 당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빛나는 순간>은 먼저 진옥의 욕망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그 이후 오랜 생애 동안 참아왔던 진옥의 상처를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만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나이 든 여성이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항상 미디어 속 나이 든 여성은 욕망과 성별이 거세된 무성의 존재로서 그저 다른 이를 품어주기 위한 용도로만 그려져 왔었는데, 이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욕망을 가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옥이 바다가 아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인 숲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마음을 연 경훈에게 상처를 털어놓는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 처연하고 아름답다.



<빛나는 순간>은 나이 든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오랜 경험을 쌓아온 주류 남성 사회에 편입되고자 애쓰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뒤집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전복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을 잊지 않는다. 경훈의 아는 형이 경훈이 나이 든 해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뱉는 "역겹다"는 표현은 영화를 처음 대하는 관객들이 느낄 수 있을 법한 감정이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 속에서 봐온 젊은 여성과 젊은 남성 간의 키스를 보고 아무도 역겹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등장한 진옥과 경훈의 키스신은 관객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감정이 들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상식이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안전한 틀을 벗어나는 데서 오는 불쾌감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 둘의 사랑은 현실적으로도, 그렇다고 영화 속에서라도 쉽게 이뤄질 수 없다. 현실이 아닌 영화이기 때문에 사랑이 이뤄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잊어버리고, 영화 속에서 납득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영화가 일반적인 사회의 통념을 뛰어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렇기에 영화는 상당히 현실적인 결말을 택한다. 잠깐 동안의 환상이 아닌 여태까지 살아온 자신의 현실을 택하기로 하는 진옥. 관객들은 진옥과 경훈의 사랑을 머릿속으로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진옥의 감정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다. 이들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진옥의 감정까지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옥의 안타까운 마음이 더 깊게 와닿는다.


<빛나는 순간>의 겉 외양은 30대와 70대의 파격적인 사랑이야기이지만, 그 내면에는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조차 없었던 한 인간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영화이다. 비록 투박한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노인의 사랑을 단순히 이목을 끌기 위한 소재로 활용한 것이 아닌 나이 든 여성의 캐릭터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의 감정을 소중하게 존중해줬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울림을 선사할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9년 내 멋대로 무비 어워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