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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Dec 23. 2021

부서진 고통의 조각을 맞출 때

<그녀의 조각들>에서 삶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관하여

※ <그녀의 조각들>의 엔딩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평소 글에서는 여성 캐릭터도 '그'라고 지칭하였으나, 이 글에서만은 제목과의 연결성을 위해 '그녀'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임신이라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마주한다는 큰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배속에 있다는 감각만 갖고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들이 무사히 잘 지나간 뒤 드디어 아기가 나올 때, 생각지도 못했던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녀의 조각들>은 이런 비극의 순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이다. 


아이를 가진 마사는 막달이 되자 일을 쉬고 집에서 아기를 출산하기로 결심한다. 남편인 션과 함께 집에서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리던 중 원래 아기를 받아주기로 했던 조산사에게 연락하지만, 조산사는 다른 사람의 아기를 받느라 마사의 집에 오지 못한다. 대신 다른 조산사인 에바가 집으로 와 출산을 도와주기 시작한다. 진통이 시작되고 엄청난 고통 끝에 마사는 아기를 출산하지만 뜻하지 않은 비극을 맞이하고 이 이후부터 마사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조각들>은 아기를 가진 부모라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비극으로부터 시작한다. 뱃속에 있다는 감각만 느껴지고 실제로 내가 안아보지도 못한 아기를 세상에 낳자마자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이는 감히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이자 고통일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고통을 단순히 말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보여준다. 마사를 단순히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마사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캐릭터가 갖는 심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마사가 진통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기를 낳는 순간까지 컷을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로 보여주었다.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처럼 현실과 똑같이 보이도록 연출된 장면은 아니지만, 아기를 낳기까지 산모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는지 최대한 보여주는 연출을 통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만든다. 이 출산 뒤에 이어지는 비극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어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비극이 일어난 순간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비극을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캐릭터와 관객 모두에게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사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끝난 뒤, 영화는 마사가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복귀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캐릭터의 고통을 잔인한 방식으로 재현하지는 않지만, 대신 그 주변의 반응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아프게 다가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녀가 다시 회사로 나가자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직장 동료들이 그녀를 향해 수군거린다. 자신의 방에는 다른 남자가 자신의 컴퓨터 앞에 영상을 보고 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은 다른 이들이 들어도 너무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그녀의 고통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며 그녀의 감정이 아닌 그 소식을 들은 자신들의 감정만 추스르려 한다. 마사가 회사에 갈 때 입은 붉은색 코트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유산한 불쌍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다른 사람에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고통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로로 인해 차고 있는 생리대, 가슴에서 새어 나오는 모유와 같이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산후의 흔적들은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돌볼 아기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괴롭게 만든다.


붉은색은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찍은 낙인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고통을 체감하게 해주는 색이기도 하다. 이 붉은색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는데, 처음 그녀의 온몸을 덮고 있던 붉은색 코트는 붉은색 부츠로 넘어가고 선명한 색을 띠던 붉은색은 와인색으로, 그리고 무채색의 옷으로 넘어간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고통의 크기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녀의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을 외부로 꺼내 그 고통을 희석시키려 하는 남편 션과 달리 마사는 자신의 고통을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채 방황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아기를 잃은 순간 그녀의 고통은 그녀가 느낄 새도 없이 마음속에서 산산조각 나 부서져 버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아기를 해부용으로 기부하려 하기도 하고, 션과의 관계에서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말하는 대신 그 고통을 어머니에게 분노로 표출한다. 조각난 고통은 마치 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며 그녀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조차 없게 만든다. 



강압적인 마사의 어머니는 이러한 비극에서 누군가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자신의 손자를 잃게 만든 조산사를 법정에 세운다. 마사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서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사는 자신의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증언하게 된다. 자신의 아기가 태어난 순간을 증언하던 마사는 자신의 아기에 대한 인상만 희미하게 남아있고 아기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법정이 잠시 휴정한 사이 출산 때 남편 션이 촬영했던 필름을 인쇄하러 간다. 마사는 네거티브 필름을 돋보기로 확인한 뒤, 붉은 암실에서 사진이 인화되는 것을 기다린다.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흰 바탕에서 천천히 상이 떠오르면서 그녀가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순간이 드러난다. 이 순간 마사는 비로소 자신이 낳은 아기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다. 아기에게서 사과향이 난다는 인상만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아기의 모습을 제대로 봄과 동시에 비로소 자신이 겪은 고통의 조각을 맞춰나가고 온전히 그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사는 다시 법정으로 돌아와 재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장면은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바이자 동시에 이 영화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드러낸다. 마사는 자신의 삶에 찾아온 비극으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조산사 에바에게 전가하고 그것을 통해 돈과 같은 보상을 바랄 수 있느냐고 말한다. 자신의 딸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딸은 그러한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마사가 하는 이 말은 인생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답과도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다가오는 고통을 괴로워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일어난 원인과 이유를 찾으려고만 애쓴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고통은 언제든 삶의 한가운데서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삶 속에서 그러한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는 것. 영화는 마치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마사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주는 것처럼 고통의 시작부터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까지 덤덤하게 보여주면서 이 말이 가진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드러낸다. 내가 가진 고통은 오로지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도 없다는 것. 법정에서 자신이 비로소 하고 싶었던 말을 통해 마사는 흩어져 있던 자신의 고통을 하나로 모아 비로소 자신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마사는 진정으로 자신의 아이를 떠나보내 주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사과나무 위로 올라가 있는 다른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한 아이를 떠나보내고 그 아이를 잃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지만, 이러한 순간들이 모두 지난 뒤 마사는 새로이 딸을 얻었다. 이는 고통에 대한 인생의 보상이 아닌, 인생을 살면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 들 중 하나일 것이다. 보상을 주기 위해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삶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때로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기쁨도 존재한다는 것. 영화는 마사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또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속에서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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