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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21. 2022

정의롭게 이기는가, 이기는 것이 정의인가

<킹메이커> 리뷰

※ 해당 포스팅은 시사회 초대 및 소정의 비용을 지원받아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킹메이커(Kingmaker).’ 직역하면 왕을 만드는 사람이란 뜻으로 보통은 정치판에서 다른 이를 권좌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킹메이커들이 존재해왔고, 이들의 뛰어난 전략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해왔다. 한 사람을 거물로 만든 지략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소재였기에 대중문화 속에서 ‘킹메이커’의 이야기가 종종 다뤄져 왔는데, 이번 설을 앞두고 또 한 편의 매력적인 ‘킹메이커’ 이야기가 관객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변성현 감독, 설경구, 이선균 주연의 <킹메이커>이다. 


<킹메이커>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는 정치인 ‘김운범’ 앞에 ‘서창대’가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화당에게 열세인 상황에서 ‘서창대’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방법으로 선거전략을 펼치면서 목포에서 ‘김운범’이 승리하게 만들고 ‘김운범’은 이후 ‘서창대’의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던 와중 ‘김운범’은 뜻하지 않게 위기를 맞이하고 그 위기의 배후로 ‘서창대’가 지목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예기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킹메이커>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여 영화적 재미와 상상력을 더해 제작된 픽션이다. 실존 인물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실존 인물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인 드라마에 집중하여 보니 더욱 흥미로웠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는 영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이지만,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캐릭터를 탁월하게 연기해낸 설경구, 이선균 두 배우와 이들을 한 화면 속에서 스타일리시하게 담아낸 변성현 감독의 연출력이 더해져 <킹메이커>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작품이 되었다. 특히 변성현 감독은 삶 속에서 두드러지게 빛나는 순간을 잡아내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는데, 전작인 <불한당>에 이어서 <킹메이커>에서도 이러한 그의 연출이 빛을 발한다. 

<킹메이커>에서는 빛으로 대표되는 김운범과 영화 속에서도 그림자로 불리는 서창대가 마주하는 장면들에서 인물들이 위치한 자리와 조명의 명암을 활용한 미장센이 도드라진다. 눈에 띄는 몇몇 장면들 중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은 영화 초반 서창대가 김운범의 사무실로 다시 찾아온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씬을 찍을 경우 흐름상 크게 튀는 느낌에 없게 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각 인물의 컷을 연결하여 보여주는 편이다. 김운범과 서창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각 개별 컷으로 볼 때는 마치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상태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컷이 전환된 후 전체 샷으로 보면 사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서 김운범, 서창대가 같은 곳을 향해 바라보고 있지만 그들이 택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두 캐릭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면서도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상하관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위 장면에서 이어져서 김운범, 서창대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창 밖에서 안쪽으로 차량 등이 비치고 김운범이 이야기를 하다가 몸을 앞으로 숙인다. 이때 서창대는 어둠 속에서 김운범을 바라보게 되는데, 영화 내내 사람들이 서창대를 부르는 명칭인 ‘그림자’처럼 그가 어둠 속에서밖에 살 수 없는 인물이고 김운범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어둠 속에 있는 서창대의 모습은 단순히 한 장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영화 속에서 주요한 장면들에서마다 드러난다. 이는 서창대가 뛰어난 전략가이지만 이 방법이 김운범이 전면에 내세워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드러나서 행동할 수 없다는 서창대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시각적으로 캐릭터들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킹메이커>는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나이대가 어느 정도 있는 관객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젊은 나이대의 관객들에게는 그 시대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처럼 변성현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부분뿐만 아니라 영화 속 배경까지 세밀하게 묘사해내면서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더욱 높여준다. 



<킹메이커>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변성현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뿐만이 아니라 김운범, 서창대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해낸 설경구, 이선균 두 배우들이다. 김운범, 서창대 캐릭터는 서로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화합할 때는 화합하다가도 대립할 때는 대립하는 감정선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운범 역할에는 이전에 변성현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설경구가 서창대 역은 이선균이 맡았는데 두 배우 모두 각자만의 연기 스타일로 캐릭터들의 개성이 뚜렷이 살아날 수 있도록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 속에서 서사를 주로 이끌어나가는 것은 서창대이지만,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원동력은 김운범 캐릭터이다. 설경구가 맡은 김운범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는 캐릭터로 그에게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어 서창대도 그 힘에 매료되어 김운범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캐릭터의 특성이 명확하게 살아나는 장면 중 하나는 목포 바다 앞에서 이뤄지는 김운범의 연설이다. 김운범은 서창대의 전략으로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신민당의 지지율을 늘렸으나, 반대로 공화당에게 역공을 당해 자칫하면 지지율이 추락할 수도 있는 열세에 처한다. 김운범은 이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유려하게 넘어가는데, 이 장면을 통해서 김운범이라는 캐릭터는 자신을 위기에 빠지게 만든 서창대도 버리지 않고 품고 가는 성품을 가진 이이며, 다른 후보를 비난하지 않고도 위기를 매끄럽게 넘어가는 성인에 가까운 모습임을 드러낸다. 공화당 후보의 연설이 끝난 뒤, 김운범이 강단을 향해 올라갈 때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죽여 그를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설경구는 짐짓 긴장하고 있는 목소리 속에서도 시민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하는 호소력 깊은 목소리를 통해 김운범의 캐릭터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본격적인 연설을 시작하기 전 자신이 갖고 온 연설문을 읽으려다가 내려놓는 짧은 순간으로도 설경구는 완벽하게 김운범이 되어 스크린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동안 다수의 작품 속에서 로맨틱한 역할로 관객들에게 인상 깊은 연기를 남겼던 이선균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서창대 역을 맡았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이는 서창대는 정당하게 사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칫 불편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이선균 배우는 이를 거부감 없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연기해낸다.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서창대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반 다시 김운범에게 돌아와서 김운범 진영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도록 설득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서창대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김운범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 모였다는 말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선동에 가까운 서창대의 말은 이선균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호소력 깊게 다가갈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매료시킨다.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군중만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까지 깊게 파고드는 서창대 캐릭터는 이선균의 연기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서로 다르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김운범과 서창대를 연기한 설경구, 이선균 배우 외에도 영화 속에서도 중요한 조연을 맡고 있는 배우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이태원 클라쓰], [비밀의 숲]의 유재명, <내부자들>의 조우진 등 다수의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실장 역을 맡은 조우진 배우이다. <킹메이커>에서 서창대와 이실장이 만나는 장면은 김운범, 서창대가 만나는 장면과는 다른 의미에서 케미를 불러일으킨다. 김운범과 서창대가 같은 진영에서 서로의 의견과 감정을 교류하다가 다른 방향성으로 인해 점차 부딪히게 되어 긴장감을 유발하는 관계라면, 서창대와 이실장은 시작부터 아예 다른 위치에 서서 각자의 입장과 이익을 위해 티격태격하는 관계이다. 특히 이 두 캐릭터는 너무나도 뚜렷한 목적성을 갖고 있기에 이들이 만나는 장면은 다른 어떤 장면보다 캐릭터들이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마저 느껴지는데 이는 서창대를 연기한 이선균과 이실장을 연기한 조우진 두 배우의 공이 가장 크다. 두 배우는 계략가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서로를 탐색하면서도 방어하는 두 캐릭터에게 녹아들어 서창대와 이실장이 만나는 장면마다 티키타카가 돋보이게 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김운범과 서창대, 두 캐릭터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드라마도 흥미롭지만, <킹메이커>를 조금 더 즐겁게 관람하기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사전에 실존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간단하게 알고 가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출발한 영화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엄창록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책사로서 김대중 대통령을 신민당의 주요 인사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선거전략으로 인해 중앙정보부가 그의 선거전략을 보고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이러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한 ‘서창대’라는 캐릭터는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연출, 스토리에 더해 <킹메이커>를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또 다른 포인트는 서창대가 영화 속에서 선보이는 뛰어난 선거전략들이다.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영화 속 서창대가 선보이는 선거전략은 영화적인 상상력이 더해져서 재탄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선거전략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해낼 수 없는 기발한 것들로 가득하다. 영화 초반 목포에서 우세를 잡기 위해 신민당 사람들이 공화당의 옷을 입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며 공화당을 지원해달라고 하던지, 공화당이 사람들에게 뿌린 고무신, 설탕, 와이셔츠 등 물품들을 공화당 옷을 입고 갈취하여 신민당의 이름으로 다시 뿌린다던지 등등등. 영화 속에서 선보이는 기발한 선거전략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연출되어 서창대가 앞으로 영화 속에서 얼마나 기발한 방법으로 선거전략을 펼칠지 기대되게 만든다. 서창대의 선거전략은 뒤로 갈수록 김운범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뚜렷한 목적성이 생기면서 더욱 과감해져 간다. 초반 서창대의 선거전략은 김운범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뚜렷한 목적성이 생기고 이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서창대의 방식은 김운범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더욱 과감하고 무모 해지는 선거전략의 변화와 더불어 이를 둘러싼 김운범과 서창대 관계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킹메이커>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서창대의 전략은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저 방법이 정말 옳은 방법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서창대가 선보이는 방식들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윤리적으로는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우리는 서창대와 같이 기발하지는 않더라도 윤리적인 선에서 어느 정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모습들을 미디어 속 정치인들에게 수 없이 본 바 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와 다른 진영에 속한 이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모습은 영화 속 1960년대에서도,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이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서로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두 인물들 생의 빛나는 순간들을 보여주면서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당신은 정의롭게 이기는 것을 믿는 김운범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기는 것이 정의라 믿는 서창대가 될 것 인가? 그 선택은 영화를 보고 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 해당 포스팅은 시사회 초대 및 소정의 비용을 지원받아 작성하였으며, 내용은 주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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