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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ul 12. 2022

서늘하면서도 깊은 청록의 사랑

<헤어질 결심> 속 사랑에 대하여

※ <헤어질 결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6년 만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멜로 영화이다. 멜로라는 장르 속에서도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여 때때로 섬뜩한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이전작들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부드러우면서도 서정적인 면모가 가득한 작품이다. 이전작들이 복합적인 감정들이 들끌으며 관객들을 휘몰아치게 만드는 영화들이었다면, <헤어질 결심>은 영화 속 대사처럼 감정이 잉크처럼 번져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감정의 깊이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영화에 가깝다. 그만큼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 세계와 거리가 있어 보이면서도 여전히 그의 인장이 살아있는 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에서 사랑은 늘 이야기 어딘가에 존재해왔었지만, 그 사랑은 항상 뜨겁게 불타오르고 정열적이면서도 정념적인 사랑에 가까웠다. <아가씨>에서의 히데코와 숙희도 그러했고, <박쥐>에서의 태주와 상현,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미도, 조금 더 멀리 본다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와 영미까지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들의 사랑이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에 가깝다면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와의 사랑은 조금 더 차갑고 푸른 느낌이다. 붉은색처럼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닌 안쪽으로 더욱 깊게 향하는 차갑고 서늘한 사랑. 이들의 사랑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은 단순히 청록의 미장센 만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성에서부터 기인한다. 형사와 피의자라는 관계로부터 시작했지만, 이들의 관계는 서로 수시로 역전된다. 처음에는 해준이 서래를 감시하며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 속에서는 서래가 자신을 지켜보는 해준의 시선을 느끼며 그 시선을 즐기고 있었고 이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이 관계는 완전히 대등한 것이 된다. 이후 서래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다시 만난 이들에게는 애증이라는 새로운 관계성이 생겨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분명 존재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그 사랑이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 관계.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들 관계의 속성은 서로를 열렬히 갈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서로를 감시하는 듯한 미스터리한 관계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있지만, 서로의 속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관계. 이들의 관계성은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이 관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한치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서래와 해준의 이러한 관계성은 이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서로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게 만든다. 해준이 서래에게 빠져드는 1부와 서래가 해준을 찾아오는 2부는  인물이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1부에서 해준은 서래에게 완벽히 빠져들었지만 서래가 갖고 있는 진실을 알고 그에게 배신감을 느껴 떠났다. 2부에서 서래는  다른 사건을 일으켜 해준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해준에게 잊을  없는 감정을 선사하고 떠난다. 서래와 해준이 갖고 있는 감정은 사랑으로 비슷했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의 크기는 때에 따라 서로 달라졌다. 이들의 감정의 차이는 단순히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닌, 사랑 자체가 갖고 있는 특징에 가깝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서로의 마음이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을  있을까? 그리고  사랑의 유효시간은 서로 동일하게 유지될  있을까? 마지막 시퀀스에서 서래가 해준에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녹음 파일을 갖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과 서래가 해준에게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중국어로 말하는 장면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도 사랑의 크기와 유효기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랑의 본질적인 특성을 집어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서래와 해준의 관계성이 이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크기가 서로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미장센인 산과 바다는 오히려 이들의 감정을 더욱 정확하게 드러내는 장소들이다. 해준은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산에서 서래에게 배신감을 느꼈지만, 서래는 호미산에서 해준이 자신에게 건네준 핸드폰을 다시 건네주며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해준은 서래에게 살인의 증거인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했지만, 서래가 버린 것은 해준이 준 핸드폰이 아니라 죽은 두 번째 남편의 핸드폰이었다. 해준에게 어떠한 언어로도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달은 서래는 자신의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엔딩에서 서래가 바닷속에서 죽음을 택한 것은 1부의 마지막 무렵 해준의 대사와 연결된다. 서래가 남편을 죽였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건네주며 해준은 "깊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요."라고 말한다. 형사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던 해준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주던 자부심을 버리고 사랑을 택했다. 그 사랑은 어떤 누구 앞에서도 내세울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서래에 대한 해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기에 그의 죄를 덮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서래는 그의 말속에 숨어있던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고, 자신의 핸드폰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닷속에 뉘이면서 스스로 '사랑해'라는 말이 되었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핸드폰을 바닷속에 던져버리라고 말할 때,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홀로 남겨진 서래를 보여주는 샷은 마치 서래가 깊은 바닷속 한가운데 홀로 남은 것처럼 보인다. 해준의 말은 서래의 미래를 예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이 미래가 되도록 선택한 것은 바로 서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용의자가 되었지만, 또 다른 사건의 용의자가 됨으로써 이제 어떠한 말로도 온전히 자신의 사랑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사랑해'라는 말 표면 위의 바다가 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였고, 해준에게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되었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별을 다룬 영화이다. 이별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기는 하나, 오히려 이별할 수밖에 없고 이뤄질  없는 사랑이기에 이들의 사랑이 더욱 애틋하고 잊을  없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조용하면서도 서늘하게 다가와 나를 완전히 붕괴시켜버리는 사랑.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이 그려낸  어떤 사랑보다도 <헤어질 결심> 가장 잊을  없는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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